생각을 쫓는 눈 Eyes Chasing Thoughts

이정은展 / LEEJUNGEUN / 李貞恩 / painting   2015_0603 ▶ 2015_0617 / 일요일 휴관

이정은_우주에 가득찬 노래_한지, 석회, 모래, 안료_160×260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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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60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가회동60 GAHOEDONG60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gahoedong60.com

갈아엎어진 회화의 대지 ● 회화는 결국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모더니즘적 언명이 있기는 하지만, 회화적 논리의 정점이자 회화의 종말을 암시하는 순수한 평면은 그 이후에도 수없이 갈아엎어졌다. 그림만큼이나 틈틈이 써온 이정은의 시 같은 단상에 '....화가는 작품이라는 주인의 거친 땅을 갈아 엎어 생명을 움틔워야만 하는 운명의 보이지 않는 끈에 결박된 포로다....'라는 글귀에서 읽혀지듯, 회화는 그렇게 갈아엎어진 거칠거칠하고 울퉁불퉁한 토양으로부터 시작하며, 여기에 상징의 씨앗을 흩뿌려 회화의 대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고자 한다. 작가에게 회화는 순수한 평면이기 위해 몰아낸 다양한 것들을 회귀시키는 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더니즘이 이룬 성과 이전으로 퇴행 또는 역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정은의 그림은 깊이가 있지만, 그 깊이는 수많은 표층들로 이루어진 깊이이다. 내용이 있지만, 완결된 이야기를 가지지 않는다. 이정은의 그림은 스스로 평가하듯 '얇지만 단단하며', '평면이지만 공간에 있는 듯'하고, '평평하지만 있어야 할 것이 다 있는' 느낌을 준다. ● 이 독특한 공간감은 주체/객체의 이원 항을 넘어선다. 특히 큰 작품에서는 갖가지 경계를 무화시키는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화가의 친근한 벗인 음악은 그리기 이외의 휴식 시간마저도 몰입을 지속하게 했을 것이다. 큰 작품은 물론 작은 작품들 역시 광대한 표면에서 떠도는 느낌을 준다. 현대의 페미니즘과 심리학에, 뫼비우스 띠처럼 안팎이 구별되지 않는 육체와 정신의 새로운 또는 대안적 모델(엘리자베츠 그로츠, 자끄 라캉)이 있는 것처럼, 우주 또한 하나의 표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철학에서도 원형과 그 복제에 근거한 플라톤적인 이원주의를 일원론적(=다원론적) 실재로 해체하기 위한 흐름이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대표적이다. 마누엘 데란다는 들뢰즈의 사상을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으로 정리한 책에서, 하나의 표면을 그자체로서 하나의 공간이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개진한 가우스를 따라서 표면을 공간자체로서 연구한다는 발상이 리만에 의해 더욱 상세히 연구되었다고 지적한다. ● 현대물리학에 큰 영향을 준 수학자 리만은 n차원의 표면들 또는 공간들을 연구했으며, 이 n차원 곡(曲) 구조들(curved structure)은 그자체내의 특징들을 통해서만 정의된다. 데란다에 의하면, 들뢰즈가 본질이라는 개념 대신에 쓰는 '다양체(multiplicity)'는 이러한 구조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 의하면, 들뢰즈의 존재론에 있어 하나의 종(種)은 그것의 본질적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발생시키는 형태 발생적 과정에 의해 정의된다. 종들은 시간을 배제한 범주를 표상하기 보다는 역사적으로(시간적으로) 구성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종에 대한 본질주의적 설명이 정태적이라면, 형태 발생적 설명은 동태적이다. 다양체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존재들인 본질과는 다르며, 영원한 원형들의 저장소와는 다른 연속적인 공간을 형성해 서로 엉겨 붙게 되는 식별불가능성의 지대를 창조함으로서, 그것들의 동일성을 와해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정은_赤月靑空-赤出於藍_한지, 석회, 모래, 안료_97×97cm×2_2015

본질 개념은 통일되어 있고 시간초월적인 동일성을 함축하는 반면, 다양체는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전부 한꺼번에 주어지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정의되는 동일성을 함축한다. 차이들에 의해 함께 짜이는 다양체들을 영원한 원형들과 혼동되지 않는다. 다양체는 발산하는 실재화들(realizations)을 함축한다. 실재화는 주름처럼 접혀지고 펼쳐지는 일원적 과정을 말한다. 데란다에 의하면 '수학적 다양체'(manifold) 개념과 밀접한 들뢰즈의 다양체의 개념은 현실성이 분화되어 나오는 잠재성을 개념화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데란다는 다양체를 '가능성들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다양체들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인 혼효면(plan of consistency)들의 집합처럼 보이는 이정은의 그림은 다양체들의 연속체를 상상하게 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많은 중심이 있다. 각각이 자족적인 우주를 이루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대우주를 이루는 그림에는 생성과 소멸사이에 놓여있는 미지의 개체들이 산재해 있다. ●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 속에서 작가는 이전 것들의 잔해와 흔적이 다시 뭉쳐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암시한다. 겹겹이 뿌리는 작업의 연속은 점을 선으로, 선을 표면으로, 표면을 표면들로 뒤덮는다. 얼룩들 사이에 선적인 요소는 기호 같다. 바탕과 기호들의 관계를 통해 풍경 같은 형상이 감지된다. 천체를 떠올리는 둥근 기호는 이 풍경을 우주적 풍경으로 만든다. 원을 빼고 완전한 기호는 발견되지 않으며, 파편화된 기호가 궁극에는 조화롭게 짜 맞춰질지도 모를 퍼즐조각같이 편재한다. 신이 우주에 써놓은 문장들은 오랜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흐릿해졌다. 성스러운 존재의 연쇄는 끊어졌다. 끈과 구슬은 다시 꿰어질 이야기를 위해 우주를 떠돈다. 작품 여기저기에 떠 있는 검은 원들은 끝없는 이야기의 마침표처럼 보이며, 시공간을 단축시켜줄 수 있는 블랙 홀로 다가온다. 또는 앞으로 뒤로, 그리고 사방으로 확장하는 공간 감 속에서 앞쪽으로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는 입자 같다. ● 즉 그것의 일부는 이미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우리는 그 단면을 보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2차원은 물론 3차원도 넘나는 듯한 유희가 있다. 다른 작품에 있는 초승달(들)은 원을 만월처럼 보이게 하면서 변화무쌍한 시공간의 축을 암시한다. 얼룩은 원으로 자라나며, 원 또한 얼룩으로 해체될 것이다. 잔해들은 먼지가 되어 흩어지거나 낙진이 될 것이며, 또 다른 생성의 원료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먼지에서 태어난 우주의 상이 있다. 각 작품들에는 잠재적 움직임이 있으며, 이 관계는 작품들 간에도 성립된다. 무한한 층위들 속에서 형태와 형태, 색과 색이 밀고 당겨진다. 이번 전시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블루와 레드 계열의 색은 물과 불, 차가움과 뜨거움, 음과 양, 새벽과 황혼, 심해와 대지, 이성과 감성, 반성과 몰입, 질서와 무질서, 현대와 원시, 형태와 해체, 가까워지는/멀어지는 우주, 탄생하는/소멸하는 별, 정적인/활동적인 힘 같이 상보적 관계를 통해 총체적 우주의 지도를 그린다.

이정은_Journey to Red-생각쫓기1_한지, 석회, 모래, 안료_112×145cm_2014

상보적인 요소들 간의 밀고 당김이 있을지언정, 둥근 태극문양 같은 하나로의 환원 또는 화합은 없다. 작은 하나들이 모여서, 또는 큰 하나로,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을 듯 넉넉한 화면은 초월이나 화해보다는 긴장감과 생동감에 방점이 찍힌다. 많은 요소들이 부유하고 떠돌지만, 죽은 듯한 씨가 움트듯, 홀연히 한 송이 꽃이 피듯,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는 절묘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면과 면의 만남은 접혀진 종이처럼 의외의 만남을 주선하며 사건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장에서의 사건의 현실의 사건사고와 달리 유쾌하며 널리 고무된다. 시작은 화가가 하지만, 그림은 스스로 완성 된다. 작가는 그림 스스로 가는 과정을 조율만 하면 된다. 그래서 그림은 그리는 만큼이나 기다리는 과정이, 만드는 만큼이나 만나는 과정이 된다. 그것은 끝없는 대화이다. 결론이 없다고 무익하지는 않다. 세상에서 이야기되는 그 수많은 유익한 이야기가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볼 때 더욱 그렇다. ● 대부분의 '유익한' 이야기란 아전인수(我田引水)처럼, 말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어서 이러한 독백 스타일의 말은 소외와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림은 타자와의 끝없는 대화일 뿐 아니라, 가려는 길과 온 길이 뒤엉킨 복잡한 지도가 된다. 지도는 명확한 방향성을 가리키는 기호로 채워져 있지 않고, 무수한 시공간의 내력을 담은 얼룩덜룩한 화면 위에 파편화된 채로 부유한다. 점과 선을 막 뿌린 바탕에 떠있는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인 원은 천체나 마침표 등을 연상시킨다. 이 단색의 원은 카오스같이 부글거리는 바탕 면 위, 맨 마지막에 그려지며, 다른 형상들에 비해 에너지가 응축되어 보인다. 그것은 수많은 재잘거림과 아우성을 침묵하게 한다. 그러나 무거운 느낌이 없기에 억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작가말대로 '마침표지만 쉼표' 같다. 안정된 원조차도 그 공간적 위상이 다양하여 절대적이기 보다는 상대적이다. ● 그것은 원초적 혼돈 속에 떠 있는 작은 섬, 또는 부표처럼 보인다. 그것은 정지나 질서가 더 큰 움직임이나 무질서 속에서 한순간 이룬 균형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그 밖의 기호들도 자연적, 인위적 기호들에서 온 것이다. 기호들은 송신자와 수신자와의 시공간적 거리가 너무 멀어져 모호해진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모호함은, 탄생이 있으면 변화와 소멸이 있는 모든 기호들의 운명이다. 작가의 스케치북에 단상처럼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드로잉들은 회화에서 뿌려진 씨앗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씨앗은 콩에서 콩 나고 팥에서 팥 나는 식의 동일성의 원리에 충실하지 않다. 두툼한 스케치북에는 기이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자라고 있으며, 그것이 맞닥뜨린 환경에 따라 무엇으로 발현될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숨겨져 있다. 거의 폭발에 가까운 힘을 받아 조각난 상징의 파편들이 조화롭게 짜 맞춰져 우주와 삶의 비밀을 알려주는 온전한 상징으로 완성되는 것은 언제쯤일까. ● 이정은의 작품은 그 과정이 영원히 지속되며 태초, 또는 종말의 지점이란 영원히 유예될 것임을 예시한다. 그녀의 그림은 시작과 끝의 중간에 있는 과정중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은 신만이 아는 진실이며, 세상에 홀로 떨궈진 인간은 생명과 우주가 흘러가는 과정을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과정을 덧없이 지나치는가, 매순간의 완성을 통해 조금씩 차이의 계열을 만들어가면서 창조의 비밀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하는가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예술가나 과학자는 자신이 만든, 또는 공통의 규약을 통해 게임하면서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를 실험한다. 그들은 끝없는 실험을 통해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잠재적인 것은 무한하고 현실적인 것은 유한하다. 무한에서 무한으로, 유한에서 유한으로의 평행이동이 아니라, 무한과 유한 사이의 교차적 관계가 중요하다. 끝없이 초월만 외치거나 당면한 현실에만 충실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억압적이다.

이정은_Journey to Red-생각쫓기2_한지, 석회, 모래, 안료_112×145cm_2014

예술은 이 양극단의 부당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예술을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사는 무상의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있을 때 예술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나 도처에 예술을 거세하고 길들이려는 압박이 있으며, 지배적 제도를 내면화한 무늬만 작가인 군상들도 넘쳐난다. 작업에의 몰두라는 핵심만 빼고 모든 것을 두루 갖춘 그들 말이다. 동양화처럼 바닥에 죽 펼쳐놓고 하는 이정은의 작업은 큰 스케일의 경우 작품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있고, 작은 스케일의 경우도 조합적 배열을 통해서 확장될 수 있다. 환경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 장에서 수많은 게임의 수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깊은 몰입의 과정은 유한과 무한 사이를 넘나들게 한다. 작가는 캔버스보다는 바닥에도 길게 드리울 수 있는 거대한 걸개그림 같은 형식을 생각하며, 화면이 사각형이 아니라 원 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쉼표 같은 마침표', 즉 계속 이어지지만 그래도 하나의 마침표로 완결될 수 있는 소우주로서의 예술은 매력적이다. 적절한 순간에 마침표를 찍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을 작가가 신처럼 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과학자들은 신을 흉내 낼 수 있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예술은 과학자들처럼 분업시스템을 통한 것이 아니라, 홀로 그 과업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공유되지 않는 언어로 매번 그 총체적인 우주의 상을 시도하고 때로 희열도 맛본다. 영원한 하나의 상과 그것의 재현에 집착하는 관념론을 거부하는 현대의 작가에게 남은 것은 '반복과 차이의 유희'(니이체, 들뢰즈)일 뿐이다. 반복과 차이의 유희 속에서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 필연이다. 필연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야 할 미완의 과제로 던져진다. 이정은에게 예술은 그 과정을 기록하는 거듭해서 씌여진 파피루스와도 같은 장이다. 한국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벽화를 연구한 작가의 화면은 오래된 벽 같은 느낌을 주는 다양한 형식적 장치를 구사하고 있다. ● 이정은의 그림이 동양화 같은 느낌도 주고 어떤 부분은 동양화 붓을 쓰기도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동양화처럼 한 번에 가는 것이 아닌, 수많은 흔적들이 축적된 오래된 사물 같은 표면을 그림을 통해서 구현하려 한다. 그러나 전형적인 서양화처럼 두텁게 쌓이지는 않는다. 완전히 덮이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교차된다. 그래서 이정은의 작품은 이상적인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볼 때마다 다르게 보여 지고, 들을 때마다 다르게 들리고, 읽을 때 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예술은 하나의 진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무한한 방법을 중시한다. 이정은의 그림에 종종 나타나는, 자연과 과학에서 유래한 선적 기호들처럼 무한한 점근선, 또는 과학적 패러다임의 갱신처럼 문제를 새롭게 배열함으로서 답을 구하려는 새로운 좌표축의 설정이다. 한지와 석회, 모래로 밑 작업을 하는 과정은 그리는 과정 못지않게 많은 공력이 들어가며, 그자체로 추상 회화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벽은 벽에 불과하다. 창문에서 벽으로 '진화'한 현대회화의 궤적은 심도에서 표면으로의 이동을 보여준다. 많은 현대 화가들이 이 막다른 길에서 벽의 표면만을 가다듬는 공예가의 길로 선회했다.

이정은_생명의 춤(scene 1-2-3-4)_한지, 석회, 모래, 안료_97×97cm×4_2015

이러한 한계적 상황이 회화가 다시금 갈아엎어져야 필연성을 부여한다. 갈아엎어진 회화의 대지에 조각난 상징의 파편들이 산재한 이정은의 작품은 카시러가 상징을 정의하듯이, '표현에 의해 외부대상을 고정시키는 수단일 뿐 아니라, 이것을 통해 다시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매개'이다. 작가는 그렇게 회화의 대지에 여려 겹의 층위를 주고 씨를 뿌리듯이 물감을 흩뿌린다. 비옥한 대지만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씨까지 뿌리는 이미지가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다. 화면에 깊이와 질감을 주는 재료가 의미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색과 형이 바탕에 안착되었을 때이다. 그것은 우연을 필연으로 고양시키고 불안정한 과정을 일순간이나마 고정시키는 형식적 장치이다. 그러나 오래된 벽 같이 단단해 보이는 바탕은 그 위를 지나가는 색과 형태를 고착시키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견고함과 유동성이 함께 있는 것이다. 밑 작업을 포함하여 수많은 층들에 산포된 이미지들이 상호작용하는 화면에는 깊이가 있지만, 그 깊이는 그저 하나의 심연으로 뭉뚱그려지는 막연한 깊이가 아니라, 많은 표층들로 이루어진 깊이이다. ● 이러한 표층들은 안팎의 뒤집힘에 유동적이다. 이전시대를 특징짓는 심층의 모델—본질/현상, 무의식/의식 등—은 표층들로 해체된다. 저 깊숙이 있다고 가정되는 핵심적 무엇을 재현하지 않고, 유동적 표층에서 부유하면서 생멸한다. 화석이나 지층, 단층처럼, 이정은의 작품에 내재한 시간성은 불확정성을 높인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투명함이 겹쳐서 만들어진 불투명함이지, 혼돈에서 혼돈으로 끝나는 맹목적 과정이 아니다. 어떤 시간이 공간화 되었을 층, 어떤 공간이 시간화 되었을 층들이 공존하면서 공명한다. 그 중 어떤 것이 앞으로 당겨질지, 어떤 것이 뒤로 물러날지는 매번 다르게 다가온다. 마치 작가가 즐겨 듣고 직접 연주하기도 하는 음악처럼 말이다. 이정은이 시각을 통해 들려주는 소리는 재연보다는 즉흥에 가깝고, 단성보다는 다성(polyphony)에 가깝다. 하나의 선율에도 무수한 변주가 있을 수 있다. 벽화처럼 단단하면서 인터페이스처럼 동적인 느낌을 주는 이정은의 그림은 청색 씨실과 홍색 날실로 짜여 진 우주 같은 상보성의 원리에 다가간다. ■ 이선영

이정은_야상별곡(夜想別曲)_한지, 석회, 모래, 안료_97×97cm×4_2015

마음 방 한 켠에 쏜살같이 정수리를 날아 지나가던 수상한 공(空)이라는 놈을 붙잡아 놓았다. 눈 깜빡 할 새 세상의 곳곳 어딘가로 스며들어 제 몸은 감춰 버리고 소문만을 부풀리는 가공할 만한 녀석이다. 몇날 며칠을 차가운 골방에 자루 채 꾸깃꾸깃 처박아둔 그 녀석이 먼지 틈새로 뭉게구름이 피어나듯 어떤 기류와 충돌하여 부지불식 결에 부풀어 올라 미확인 비행체처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녀석은 태생이 좀체 길들여지지 않는 외계에서 온 뿔난 혹성 같아서 불현듯 난장을 치고 돌개바람 일듯 어디론가 달음질치기 일쑤다. 도무지 내 눈에는 허구헌날 부랑자마냥 개념상실에다가 천진난만 오만방자해서 천태만상의 우(遇)를 자초하니 속수무책인 골칫덩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동자가 고요히 숨을 고르고 녀석을 거듭 쫓는 까닭은, 난데없이 달려오는 그 허술한 품새가 대담하고 난감하고 거침이 없으나 다시 空으로 사라져가는 담담한 결이 달빛에 몸을 실은 하얀 나비 춤사위 덧없는 탄식처럼 가벼워서 가당치 않게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 날의 그 장면부터였었던 것 같다. 나는 어느덧 메마른 해갈을 기다리는 모래 사막처럼 갈라진 빈 화면에 생각이라는 비호구름 같은 떠돌이 본체를 붉고 푸른 물감으로 흩고 헤쳐 뿌려대며 충동하고 쫓고 있다. ● 세상의 한 낮은 쓸데없이 들끓고 광채나고 무겁고, 이미 생각이란 녀석은 결박 당해서 박제된 무기력한 식물종처럼 메마른 창백한 뿌리를 땅에 내려 달콤한 수맥에 탐닉되어 고삐 풀린 제 버거운 하얀 날개죽지를 꺾어 버렸다. ● 나의 헐벗은 생각이 날아가고 침략하는 그 곳은 우주의 한 송이 꽃처럼 소립자처럼 충만하게 존재하여, 광학 현미경을 들여대고 초음파로 잡아내도 쪼개고 다시 쪼개어도 만져지지 않는 오직 감지되는 어떤 감각의 아름다움의 풍경(風景)이며 일종의 금단의 땅, 잃어버린 제국, 중력에 지배당하는 질량을 가지고는 볼 수도 만져 볼 수 없는 헐벗어서 더욱 아름다운 광활한 대지인 것이다.

이정은_푸른 꽃이 피어나고 있다_한지, 석회, 모래, 안료_130×160cm_2015

"사람의 눈은 세 개다. 영혼과 감각을 깨워 흔들어 대는 감춰지고 퇴화된 거대한 푸른빛의 눈. 순간에 반짝여진 눈동자가 거칠고 생생한 생각을 쫓기 시작한다. 그 꼴(形)이 참 희한하다. 계속해서 꼴을 버리고 바꾸고 변신 중이다. 무엇을 집어 삼켜서 자라나는 꼴이고 무엇을 품어 놓은 꼴일까? 아름다움은 눈동자에 장미 가시처럼 박혀서 심장을 붉고 붉게 몰락시키는 한 순간의 영원함, 그 한 찰나에 있다. 나의 눈은 지금 한 뼘 사람의 뇌와 심장으로 꾸는 아름다운 색(色)의 꿈을 쫓는 꿈을 꾸고 있다." (쫒는 자의 변辨. 2015년의 여름날 작업실에서.) ■ 이정은

Vol.20150603e | 이정은展 / LEEJUNGEUN / 李貞恩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