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받이-1991년의 동향과 전망展

책임기획_심광현   1991_0309 ▶︎ 1991_0408

김영진_우리 시대의 초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1991_부분

참여작가_김영진_김우선_신지철_오치균_최민화_최진욱

서울 미술관_폐관 서울 종로구 구기동 88-2번지 Tel. 02_387_4117

1991년의 동향과 전망 : 바람받이 ● 그동안 매년 초 전해의 창작성과를 여러 비평가들의 평가를 토대로 선별, 종합하는 형태로 개최해 오던 서울미술관의 연례기획전시였던 『예술노트』『문제작가 작품』展이 그 명칭을 지난 해부터 『동향과 전망』展으로 개편하여 개최된 데에(『1990년의 동향과 전망 : 새벽의 숨결』展(90. 3. 5-3. 31)) 이어, 이제 두 번째의 『동향과 전망』展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동향과 전망』展은 그 명칭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전년도의 창작경향이 새해로 넘어오면서 어떤 흐름을 새롭게 띄어가고 있는가를 주목하고 이를 토대로 새해 미술계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를 전망하는 전향적인 성격을 지닌 전시입니다. 따라서 종전처럼 여러 평론가들이 개별적으로 추천한 작가들을 다양하게 종합함으로써 전년도의 흐름을 모아본다는 취집 보다는 주목할만한 새로운 동향과 전망을 끌어내는 데에 역점을 둔 만큼 전시의 기획/작가 및 작품 선정/홍보/디스플레이 등의 모든 과정에서 일관된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 책임있는 조직전시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논쟁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김영진_노동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2cm_1991

지난 해에는 80년대 미술의 거센 물결이 90년의 새로운 상황을 맞아 몇 갈래로 세분화되고 뒤엉키면서 일정한 소용돌이 상태에 진입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전시 공간과 전시활동의 증가, 해외미술정보와 작품의 수입개방, 국제적인 미술교류의 확대, 미술시장의 급속한 팽창과 문화매체 및 정보소통량의 증대, 대중의 문화적 욕구상승으로 인한 미술수용 방식의 다변화와 같은 새로운 조건들은 미술문화가 새롭게 질적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는 일정한 전제조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동구권 변화와 남북교류 등에 따른 국내외 정세변화와 문화부의 신설과 같은 제도적 움직임들은 80년대 후반에 들어 제도권 문화와 민중문화운동의 팽팽한 대립이 일종의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던 상태에 대해 외부로부터 충격을 가하는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고 보여지며, 그 과정에서 창작가들의 새로운 대응태도가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측면들은 이제 90년대의 미술이 80년대와는 분명히 다른 갈래의 물길로 흘러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바, 이런 상황에서는 상황 변화에 대한 작가들의 올바른 인식과 능동적인 창작전망의 토대 자체가 절대적인 빈곤상태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호전될 경우 작가들의 반응은 어떠한 것이며, 이로부터 어떤 점에서 진보와 퇴보가 발생할 것인가? 미술이 사회변혁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단순한 도덕적, 당위적 차원을 넘어서서 현실성을 띄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 노력이 필요하며, 그럴 경우 종전의 '순수미술'이나 '정치적 미술'이 보여준 편향들과 어떤 차별성을 드러낼 것인가? 정치지형의 변화와 생산조건 및 문화전반의 변동에 따른 미술의 개념과 그 사회적 기능 변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타진할 것인가? 지난해부터 문제시 되면서 이제는 절박한 문제로 다가오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야말로 90년대 우리 미술의 새로운 전망을 여는 데는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지철_불순한 백색 디자인_합판에 혼합재료_지름 170cm_1991
신지철_입춘(入春)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0×135cm_1991_부분

우리 미술계가 이런 문제들과 씨름하는 와중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점은 이전에 비해 작가들이 창작의 예술적 깊이와 미적 가치판단의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단은, 80년대 후반에 들어 심화되었던 이념논쟁이 일정 정도 초보적 단계를 넘어서게 됨으로써 그동안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작품의 예술적 깊이의 문제에 파고들 수 있는 여력을 얻기 시작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사태의 추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은 제도권이든 민중미술권이든 공히 적용되는 것으로 사실상 우리 미술에서 미술사적, 미학적 이론의 논의가 본격화되고 세계미술의 복잡한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가 그 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80년대, 특히 그 후반에 들어서야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다지 놀랄 일도 못된다 할 것입니다. 본래 미술의 올바른 이념수립을 문제 삼으면서 미술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의 확산을 주도해 왔던 민중미술의 경우에도 그 논의가 기능주의나 신원주의, 도구주의의 차원을 벗어나 민족민중미술의 폭넓은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 겨우 최근의 일이며, 구체적인 창작방법과 미학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맴돈다고 할 때, 최근 들어 이들 작가들이 미적, 예술적 성취를 제고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 것은 결코 뒤늦은 일만은 아니라 할 것입니다. 그에 반해 미술의 사회적 기능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율적 예술의 형식문제에 자신의 존재근거를 걸어왔던 제도미술의 경우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그동안 제도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온 모더니즘 미학이 그 허세에 비해 내용적으로는 매우 빈곤한 상태에 놓여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서구에서의 복잡한 역사적 전개과정은 사장된 채 그 표피만이 단편적, 파편적, 편의적으로 수용됨으로써 그 미학적 기초가 실은 사상누각에 불과했기 때문이었고, 80년대 후반에 일종의 대체효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에 있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는 데에서 형식주의를 지향해 온 작가들이 정작 진정한 의미에서 형식의 미적 깊이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역설이 초래되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80년대 후반에 들어 지배문화의 내부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수용이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은 예술개념의 확장에 대한 적극적 필요성의 측면보다도 사실은 지배문화의 안정적 질서를 동요시켜 왔던 모더니즘/리얼리즘 논쟁의 폭발적인 정치적 효과를 중화시키려는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일차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개성에 기초한 감수성과 미적 이상을 통대로 세계와의 폭넓은 의사소통을 진전시키기보다는 단말마적으로 유행하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정한 사조와 양식, 단편적인 이론들을 도입하여 소모품식으로쓰고 버리는 데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며,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현학적 이론의 몇 구절을 암송하여 내용적 공허함을 과대포장하는 데에만 관심이 팔려있어, 갑작스러운 미술시장의 확대에 상업적으로 대처하기에도 급급한 형편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집어본다면 우리 미술은 이제야 비로소 구체적인 창작의 예술적 깊이와 미적 가치의 내실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우선_정치임문님 신상명세서(연작)_색지에 펜과 수채_각 73.5×55cm_1991
최민화_들에서(습작)_캔버스에 유채_97×145cm_1991

그러나 창작의 예술적 깊이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 반드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아닐 것입니다. 민족민중미술이 그동안 획득했던 최대의 성과, 즉 여하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견고한 민중연대성에의 확고한 지향은 예술적 깊이를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미술과 사회의 풍부한 상호연관을 옳게 파악해가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등대의 역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중되는 탄압으로 민중운동의 열기가 식어가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동구권의 변화라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겹쳐 사회변혁에 대한 전망이 전반적으로 약화된다고 해서 그동안 실천속에서 어렵게 쟁취한 민중연대의 문제의식을 교조적인 사회과학주의와 등치시키고 그 대신 운동의 열기에 의해 소홀히 되어왔던 예술성의 문제를 천착한다는 식의 잘못된 양자택일적 태도를 취한다면 이는 분면 미술과 사회의 폭넓은 발전연관의 맥락에서 볼 때 커다란 퇴보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보의 확장으로 창작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전제조건이 일정하게 마련된다 해도 이것의 예의 맹목적인 형식주의적 예술관을 타파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단지 양식의 다변화나 탈장르라는 구호의 확대에 그치고 만다면 점차 확대되고 있는 다양한 제도미술공간도 무의미한 물감덩어리나 돌과 금속덩어리로 가득찬 창고로 곧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은 제반모순이 중층적으로 가중되고 겹쳐지면서 질적 비약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를 앞둔 소용돌이의 막바지와도 유사합니다. ● 이제까지의 무수했던 논의들을 돌이켜 볼 때 단지 장르의 확산이라든가, 해체라는 식의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주장은 상황의 타개에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인 바, 오히려 창작과 비평은 자신의 질적 심화를 위해 일대 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해외의 정보가 부족하다든가, 전시공간이나 매체가 부족하다든가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많은 정보와 전시장을 제대로 소화해낼 창조적인 창작과 문제를 넓고 깊게 조망해내는 이론적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문제의 표피를 맴돌면서 가지 수를 나열하거나 그 강도를 적당히 두드려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창조적 힘에 의해 문제의 심층으로 깊이 파고드는 일입니다. 또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나 지나친 넉넉함은 여전히 첨예한 현실의 모순을 뒤덮어 버리거나 간과하게 할 것이며, 애매모호한 '예술적 중간 상태'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미술이념논쟁은 미술양식이나 장르, 사조의 틀을 넘어 시각문화와 사회현실을 포괄하는 전반적인 문화변동의 포괄적이고 중층적인 차원으로 더욱 고도화, 심화되어야 하며, 비평은 창작과 감상의 상호연관과 내 작품 내부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내적 변증법을 생생하게 파고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작가 역시 소재주의나 추상적 형식의 차원을 맴도는 대신 자신의 감수성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주제와 형식의 변증법을 강렬한 밀도로 구현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와 같이 창작과 비평의 동시적인 질적 비약이 이루어짐으로써 겉치레나 편짜기식, 또는 지적 과시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쉬운 안이한 소통방식을 넘어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위한 창조적 긴장상태를 유지할 때, 우리 미술문화는 현재 이루어진 토대의 양적 확산을 자신의 질적 발전을 위해 진정한 자양분으로 섭취하게 될 것입니다.

오치균_용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6×122cm_1991
오치균_무악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6×107cm_1991

이번 전시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91년 우리 미술계의 흐름에 동력을 부여할 수 있을 쟁점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쟁점 자체가 매우 복잡한 맥락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한 두 가지의 형태로 손쉽게 요약해 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일차적으로 80년대 미술운동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 단서가 찾아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시급하게 떠오르고 있는 창작의 예술적 깊이의 심화라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이는 무엇보다도 현실주의(리얼리즘)를 둘러싼 이론과 실천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이를테면 현실주의를 지향해온 치열한 노력의 소중한 결실들을 새로운 비약을 위한 원동력으로 가다듬어내는 것으로서, 이는 곧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운동의 초기에 나타났던 민중미술의 성급하고 들뜬 경향, 즉 사회적 삶과 문화발전의 합법칙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프롤레트쿨트적 청산주의나 봉건적 성향의 민중주의로서의 좌우편향에 빠지면서- 단지 소재나 주제의 참신성, 도덕적 당위성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우위성을 자랑하려 했던 협소하고도 천박한 경향을 하루 빨리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심화된 과학적인 현실인식으로 사회적 삶을 넓고 깊게 형상화 해내기 위해 그동안 양심적인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져온 비판적 현실주의의 치열한 예술적 노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 미적 성취를 폭넓게 계승함으로써 현실인식의 견고한 과 시적 개방성의 변증법을 획득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동안 문화주의라든가 소시민적 예술지상주의라는 식으로 매도되어 왔던 비판적 현실주의의 흐름들은 그 현실인식의 불철저성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자세와 양심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미적 가치평가의 고유성에 대한 심화된 인식과 현실의 예술적 가공구조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을 단련하면서도 천박한 이데올로기론자들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해 심도 있는 비판적 인식을 형상화해내곤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의 방식은 곧 80년대를 풍미하던 도덕주의적 민중주의로부터의 해방이자 민중의 핵심부에서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시련 속에서 단련되어온 과학을 통해 현실인식의 깊이를 심화하는 것이며, 후자의 방향이란 양심적이고 성실한 예술가들이 이루어 낸 비판적 현실주의의 미적 자양분을 흡수함으로써 과학적 현실인식을 미적 차원으로 가공해 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주의 미술의 새로운 질을 창출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은 미숙하지만 과학적(당파적) 현실주의를 지향하는 생동하는 미술과 현실인식의 폭과 깊이는 불철저하지만 자신의 개성적 판단에 기초한 미적 깊이와 섬세함을 갖춘 비판적 현실주의의 예술적 성과가 충분히 상호침투 할 수 있는 일정한 과정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하겠습니다(그리고 이런 과정이란 바로 진정으로 민중에 기반한 폭넓은 민주주의 문화건설을 위한 진보적 작가들의 참다운 동맹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와 같은 상호침투에 초점을 두고 기획되어졌습니다.

최진욱_연희동 습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5×130cm_1991
최진욱_연희동 습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12cm_1991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의 역동적 변화에 상응하여 미술의 문화적 가치가 크게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미술은 이제 우리의 감수성의 토대 전체를 좌우할 만큼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에서의 시각적 효과의 증대, 다양한 색채와 형태의 건물, 도로, 가로, 자동차, 패션, 사진 이미지의 증대 등 시각환경의 급속한 변화는 지배문화의 견고한 접착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새로운 시각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일상적 지각 속에 상품미학이 창궐하게끔 하는 거대한 수원지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대중적 감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시각매체를(사진이나 비디오 등)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이를 통해 고루하고 보수적인 틀에 갖혀 있는 협소한 순수예술의 개념과 기능을 전폭적으로 전복, 확장하는 일입니다. 이럴 경우 미술의 장르적 폭은 매체에 대한 전략적 접근(일상적 지각에 깊이 스며든 지배이데올로기를 폭로하고 동시대의 기술적 발전에 따라 나타나는 감수성의 변화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민중의 정치적 의식을 새롭게 강화하려는 전략방향)에 의해 역동적으로 변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향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순수회화가 떠맡아야 할 역할은 새로운 방식으로 증대할 것인 바, 이는 곧 점점 퇴폐화하는 상업주의의 얄팍한 센세이셔널리즘에 대항하여 인간적 감수성의 깊이를 더욱 천착해 나가야 할 필요의 증대와 부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도르노가 고급문화의 비판적 거리유지의 기능이라 불렀던 긍정적 측면(그러나 아도르노처럼 대중문화를 멸시하면서 그것과 단지 부정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으려 했던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방식이 아니라)을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으로(보수적인 형식으로 각질화되고 있는 기존 회화의 편협성을 내부로부터 전복시키고 잠재되어 있는 회화적 형상화 능력을 무제한적으로 방출시켜 내는 방향으로)발전시키는 것을 뜻합니다(가량 회화가 영화나 사진과의 차별성만을 고집하면서 스스로의 지각영역을 축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영화와 사진형식의 발전에 의해 초래된 시지각적 감수성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동시대의 감수성에 기초하면서도 회화적 지각과 형식화의 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식의 변증법적 전략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로 이 후자의 방향에 주목하고자 하는 바, 이는 전자보다 후자를 중시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우리 작가들에 의해 전자의 전략방향으로 능동적 접근이 충분히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사정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전자의 방향은 최근 들어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한스 하케나 바바라 크루거 등)의 전략에 대한 충분한 점점과 미술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현실주의 미술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 조만간 그 역동적인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기대됩니다. 다만 이번 전시에서는 점차 일상문화에서 비중이 커져가고 있는 만화와 회화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그와 같은 발전 경로를 개괄적으로 예시해 보려는 데에서 만족하고자 하였습니다.

최진욱_그림의 시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2×260cm_1991

물론 이번 전시가 이와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쟁점을 충분히 드러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며, 여기에 소개된 작가들이 동일한 입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창작의 성과를 충분히 보여줄 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이런 목표는 한 두 차례의 시도로 충족되기에는 너무나 큰 쟁점이며 다만 수많은 비판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해결되어 나갈 것이라는 점에서 이 전시가 하나의 『바람받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조직자의 솔직한 바램입니다. 더구나 현재 우리문화의 상황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직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해 이번 전시의 주제를 「바람받이」(바람이 거세게 부는 언덕)이라 명명해 보았습니다. 사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미술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나 형식적 측면에서나, 그 사회적 기능의 다변화라는 점에 있어서나 아직 천박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비약을 위해서는 모순에 찬 현실의 거센 바람과 끈질기게 대면하면서, 혹독하고 냉엄한 비판과 자기비판의 어려운 시련을 견뎌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히 부족한 것은 그와 같은 비판과 자기 비판의 냉혹한 정신입니다. 그러나 세계와 우리 자신을 비춰줄 빛은 바로 그 엄정함 속에서 응축되는 모순들의 결절들을 통해서만 희미한 여명을 뚫고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 심광현

Vol.19910309a | 1991년의 동향과 전망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