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自然), 그 새로운 해석 1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   1992_0505 ▶ 1992_0517

박용인_성당이 있는 풍경_90.9×72.7cm_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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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김산하_박용인_송창_오치균_윤종구_이강하 이원희_이호중_정재성_주태석_최경철

책임기획 / 윤진섭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압구정 본점_폐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456번지 Tel. +82.(0)2.547.2233

『구상회화의 재조명』시리즈를 기획하면서 ● 금번 현대미술관이 개최하는 『자연, 그 새로운 해석』展은 금년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장시간에 걸친 전시행사로 마련하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 중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1부 『자연, 그 새로운 해석』, 제2부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이 대결』, 제3부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 제4부 『인물화, 그 삶의 풍경』, 제5부 『실내정경, 그 친화적 세계에의 접근』 등 총 5부로 진행될 예정인 이 기획전은 구상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자각들의 독특한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 ● '바깥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구상회화가 오늘의 미술적 상황 하에서 새삼스럽게 되물어져야할 가장 큰 이유는 구상미술이 그간 모더니즘이란 이름 아래 전개되어 왔던 추상과 실험 일변도의 미술경향 하에서 그 가치 및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모더니즘의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모더니스트 회화의 핵심은 2차원 평면으로부터 일루젼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는데 두어졌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회화적 규범 아래에서는 바깥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 자체가 금기시될 수 밖에 없었다.

박용인_해질 무렵_72.7×90.9cm_1991

서구미술이 진행과 거의 그 궤적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어 온 한국현대미술은 현재 그것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서구가 앓고 있는 몸살(이른바 '해체'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현상 따위)과 유사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70년대 한국화단을 점유했던 소위 미니멀리즘 및 개념미술과 오브제 미학의 대두 그리고 80년대의 새로운 구상적 경향의 팽배 등은 비록 그 속에서 서구의 그것과는 변별되는 미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가 갖는 역학관계상 고유한 우리의 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우리의 미술이 지닌 이와 같은 한계는 대망의 2천년대를 바라보는 '90년대인 오늘에도 그 현상적 징후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지칭되는 오늘의 문화 환경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청산해야 할 유산인 모더니즘 그 자체의 문화적 조건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뒤에 다가올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현상을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경, 인물, 정물, 풍자, 심리묘사 등으로 그 범주를 정할 수 있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는 이처럼 극도의 혼란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의 화단현실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갈피를 잡아보자는 의도 하에 기획되었다. 금번 기획전시리즈에 등장하게 될 작가들은 굳이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딱딱한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특유의 방법론을 통하여 대상세계의 해석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각 기획전의 내용을 통하여 오늘의 구상회화가 지닌 문제점과 더불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참신한 전망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금번 기획전들에 등장하게 될 작품들의 편편(片片)이 우리미술의 풍요로움을 획득하는데 일조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이것으로 기획의 변(辨)을 갈음하고자 한다. ■ 윤진섭

주태석_自然 · Image_73×91cm_1991
송창_뛴다, 군화를 벗고_91×150cm_1990

한국 근현대 풍경화의 위상 ● 하나의 절대 가치, 하나의 절대 규범이나 양식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현대인은 그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마치 교통혼잡을 보는 것 만큼이나 수많은 개별들에 의한 삶이 교차하는 현대에 있어서 절대선, 지고의 미가 한 점으로 집결되리라는 믿음은 이제 상당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 미래학자들이 설파하는 얘기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의 속도를 초월해서 가중되어 가고 있으며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인간의 정신이 환경의 변화를 뒤쫓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샬 맥루한은 새로운 환경변화의 진원지를 미디어로 지목하면서 이 미디어의 효과를 명쾌하게 이해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고정관념에 의한 현상을 파악하려는 인간들의 뿌리깊은 습관이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관료적 문화와 관습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있으며 새로운 미디어로 하여금 낡은 미디어가 하던 일을 떠맡아 하도록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 사실 인간은 과거라는 토양에 발을 딛고서야 설수 있는 존재다. 네 발을 전부 과거에 두지 않고 그 중 두 개의 발은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이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가 되는 것만큼이나 인간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존립과 사고양식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물론 비행기나 우주 로봇 등의 발명품이 인간을 땅이라는 것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력의 작용과 무관한 삶을 영위코자 한다면 아마도 인류는 지구를 떠나 다른 천체에서 역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며, 실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해도 인간이 지금의 모습과 유사성을 갖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명명하는 인간의 역사와는 완전히 결별된 몇 번의 빙하기 이후의 변화와도 비견될 수 없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될 것이 자명하리라는 것이다.

오치균_여름 한남동_162.2×130.3cm_1991

현대 풍경화에 다양성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과거 풍경화의 비다양성을 결과적으로 암시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풍경화는 이조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산수화'라 해서 산과 물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풍경인 것이나, 현재 우리가 일컫는 풍경화와는 몇 가지 의미에서 큰 차이점을 지닌다. ● 첫째, 인간 주변의 풍경을 시각화했다기보다는 이상적인 풍경의 전형을 모델로 해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거의 전시기를 통해서-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화나 영정조 시대의 정선을 비롯한 진경산수와 김홍도 등의 풍속화는 예외로 하고-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그려진 산수화로서 우리 주변의 풍경을 의식하여 표현한 예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동양화의 수련방식이 실제 사물의 모사에 있지 않고 선대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산수화를 통틀어 급변하는 변모보다는 항상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굽이치는 흐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둘째, 사물의 모방보다 사물의 내부에 존재하는 기운의 표현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산수화의 비평기준에서 가장 중요시된 척도가 '기운생동'이었으며, 이러한 기운은 사물의 외형적, 물리적인 기가 아니라 정신적이며 생동하는 호흡의 율동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작품에서 요구되는 것이 자연 고도의 정신성이었으며 테크닉의 구사는 오히려 배제되고 천시되었던 것이다. ● 셋째, 색채의 사용이 절제되었다는 측면이다. 사물의 본질 속으로 영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색채가 없는 것이 훨씬 용이하였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로써 간결한 담채 이상의 진채 사용이 엄격하게 배제되었고 채색화는 주로 장인이 담당하는 영역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 넷째, 산수화 속에 설혹 인간의 존재가 표현되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거대한 산수 속의 한 점에 불과하였다. 이는 인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상대적 자연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영입시키는 거대한 자연의 질서, 우주적 조화로서의 자연관의 표현이었다. 유채와 캔버스가 서로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 있고 서양의 작가들이 마치 이들을 지배하려는 자세로 임했던 것과는 달리, 동양의 작가들은 종이와 먹이 서로 흡수하고 스며드는 것에서 만물의 조화와 합일의 표현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산하_흙_72.7×90.9cm_1991

이러한 전통 산수화는 근대기 서구문명의 침입, 그것도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닌 일제를 통한 강제적 침투에 의해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이조 후기 전통과의 연계 속에서 서양화 기법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몇몇 사대부 화가들의 노력이 단절되면서 근대기에는 일본적 감성이 근대적 감성인 것으로 선전되고 강요되어 영입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전통화에서 중요시 되었던 정신적 격조의 우위성은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일본적 정서 표현으로 대체되었고 근대기 미술은 혼돈과 방황을 거듭하면서 사회적 변모를 담는 새로운 표현매체와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시대성의 표현,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고 있었다. ● 소정 변관식은 근대기 미술의 요구에 걸맞는 성과를 이룬 작가 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어느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그림에서 화제(畵題)를 과감하게 버리고 서양화의 단일 시각을 채택한 청전 이상범이나 초기에 일련의 실험적 작업을 선보였던 묵로 이용우 등에 비해서 훨씬 보수성이 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관식이 가장 대표적인 근대기 미술인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그가 뿌리내린 과거의 전통적 요소가 시대성을 가늠하면서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 서양화적 기법을 수용하려는 근대 일본 남화의 개방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조선조 정선의 진경산수, 특히 금강산도의 강한 표현성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시대성과 독자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 근대기 풍경화의 모습은 앞의 변관식의 예처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식 사고와 가치관의 침투, 서양화적 기법의 수용 등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특히 오지호나 김주경을 중심으로 한 인상파 회화는 우리나라 구상화나 풍경화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오지호는 변관식과는 달리 서양회화사의 한 유파인 인상파를 우리나라의 토양과 기후에 적용시켜서 민족적 양식으로 정립코자 했고, 추상미술의 타락성과 피폐함을 지적함으로써 추상미술에 정면 도저한 오지호의 구상 옹호론은 우리나라 국전사를 화려하게 장식할 정도로 상당 기간 유효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구상회화의 전개양식이 사물의 미화된 모방 차원에 머무름으로써 매너리즘으로 고착되고 말아 구상화는 신세대의 도전을 받고 화단의 주변부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원희_서후에서_50.5×72.7cm_1992

흔히 미술사의 흐름을 얘기할 때 파토스와 에토스의 순환공식을 운운하게 된다. 물론 이때 잊어서는 안될 사항은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반복적 순환이 아니라 반경의 중심이 매번 변화하면서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60년대, 70년대, 추상회화의 물결 속에서 간신히 명백을 유지해온 구상화가 80년대 신구상회화 붐의 물결을 타면서도 다시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역에 있다고 하겠다. ● 그렇다면 오늘날의 구상회화, 그 중에서도 풍경화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구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추상이라는 전대미문의 세계를 창조했던 인류는 다시 추상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기 위해 구상으로 재복귀했다. 그러나 구상으로의 재복귀가 과거 구상미술의 규범 속으로의 재편입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실로 이들의 모습을 하나의 유행양식으로 간주하여 총괄해서 그 특성을 논하기에는 현대 풍경화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한 양태를 띠면서 개별적으로 존립하는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특성을 논한다면 풍경이 단순한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대신하는 매개물로 선택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풍경화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풍경이면서도 때로는 전혀 현실과는 관계없는 사물이 되기도 하고, 풍경의 단편들이 서로 겹치면서 경계가 사라지는 혼돈 양태를 띄기도 한다.

이원희_흔적_50.5×72.7cm_1991
이강하_저, 언덕길 넘어_91×116.7cm_1990

이러한 미술양식이 오늘날의 구상회화와 풍경화를 이끄는 특성이라 한다면 양식의 유행을 낳은 사회적 양태와는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70년대 차가운 추상, 논리적 추리의 단순성을 겪은 후 미술가들은 보다 인간적이고 직접적이며 따뜻한 표현세계를 원해 구상양식으로 되돌아 가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과거 구상형식의 확고한 틀을 받아들이기에는 현대 사회의 변모가 너무나 스피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확고부동하게 정지된 풍경을 그린다는 자체가 불가능해 졌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불변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의 것을 선택하기에는 가치의 다양성이 너무나도 산재해 있으며 더구나 확실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 하에서 사물은 단지 이미지의 차원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끊임없이 변모하는 이미지의 나열은 현대인의 생활과 의식의 형성을 단적으로 논정해 준다. ●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의 풍경화는 굳이 풍경화라고 명명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띠며, 이미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고 분리되어 정리되어 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경화 역시 중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겪는 경험과 지식의 반영이며, 언제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진지한 물음이라는 점에서 과거 풍경화와의 연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김현숙

『自然, 그 새로운 해석』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윤진섭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neo@neolook.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20505a | 자연(自然), 그 새로운 해석 1-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