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 삶의 표정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   1993_0209 ▶ 1993_0221

곽성동_길_MDF에 유채_90×100cm_1993

참여작가 곽선동_김선두_김해성_김호석_노광 류성하_서용선_심현희_오원배_정동암 정병국_정일_진원장_조덕현_허진

책임기획 / 윤진섭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압구정 본점_폐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456번지 Tel. +82.(0)2.547.2233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 금번 현대미술관이 개최하는 『인물화, 삶의 표정』전은 금년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장시간에 걸친 전시행사로 마련하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 중 그 네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1부 『자연, 그 새로운 해석』, 제2부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의 대결』, 제 3부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 제4부 『인물화, 그 삶의 풍경』, 제5부 『실내정경, 그 친화적 세계에의 접근』 등 총 5부로 진행될 예정인 이 기획전은 구상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작가들의 독특한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 ● 바깥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구상회화가 오늘의 미술적 상황 하에서 새삼스럽게 되물어져야할 가장 큰 이유는 구상미술이 그간 모더니즘이란이름 아래 전개되어 왔던 추상과 실험 일변도의 미술경향 하에서 그 가치 및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모더니즘의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모더니스트 회화의 핵심은 2차원 평면으로부터 일루젼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는데 두어졌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회화적 규범 아래에서는 바깥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될 수 밖에 없었다. ● 서구미술이 진행과 거의 그 궤적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어 온 한국현대미술은 현재 그것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서구가 앓고 있는 몸살(이른바 '해체'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현상 따위)과 유사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70년대 한국화단을 점유했던 소위 미니머리즘 및 개념미술과 오브제 미학의 대두 그리고 80년대의 새로운 구상적 경향의 팽배 등은 비록 그 속에서 서구의 그것과는 변별되는 미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가 갖는 역학관계상 고유한 우리의 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 우리의 미술이 지닌 이와 같은 한계는 대망의 2천년대를 바라보는 '90년대인 오늘에도 그 현상적 징후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지칭되는 오늘의 문화환경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청산해야 할 유산인 모더니즘 그 자체의 문화적 조건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뒤에 다가올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현상을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경, 인물, 정물, 풍자, 심리묘사 등으로 그 범주를 정할 수 있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는 이처럼 극도의 혼란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의 화단현실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갈피를 잡아보자는 의도 하에 기획되었다. 금번 기획전시리즈에 등장하게 될 작가들은 굳이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딱딱한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특유의 방법론을 통하여 대상세계의 해석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각 기획전의 내용을 통하여 오늘의 구상회화가 지닌 문제점과 더불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참신한 전망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금번 기획전들에 등장하게 될 작품들의 편편(片片)이 우리미술의 풍요로움을 획득하는데 일조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이것으로 기획의 변(辨)을 갈음하고자 한다. ■ 윤진섭

김선두_반편 1_장지기법_99.5×70cm
김해성_신세대(新世代)_판넬에 혼합재료_104×67m_1992

『인물화, 삶의 표정』전에 부쳐 ● 인간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소재이다. 서양화의 역사는 다름 아닌 '인물화의 역사'라고 할만큼 인물의 존재는 절대적인 영역을 장악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라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표정 및 몸짓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자기표현성을 가진 존재인 까닭이다. 표정 및 몸짓 그리고 의상에 따라 천변만화의 다양한 형태변주 및 사상, 감정의 표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따라서 화가들이 인물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 및 철학 또는 이념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자연풍경을 소재로 해서는 이러한 내용을 표현하기가 힘들다. 움직이지 못할 뿐 더러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 인물화는 초상화를 비롯하여 신화화, 역사화, 누드화, 풍속화, 전쟁화 등으로 그 표현 영역 도한 넓다. 항상 인간이 주제이자 소재가 되므로 인간생활이 복잡해질수록 그에 따른 그림의 의미내용도 심화, 확대되기 마련이다. 특히 과학 및 의식의 발달에 의한 지적사고의 심화는 인물화의 양식을 세분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처음의 초상화 형식에서 신화화, 종교화, 풍속화, 전쟁화, 누드와 등으로 세분화되면서 그림의 주제 또한 단순한 재현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계된 이야기 그리고 상징성 등으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김호석_소외 된 삶_종이에 수묵채색_187×97cm_1993
노광_J의 상(像)_162.1×130.3cm_1990

우리나라의 경우 그 예술성을 높이 인정받고 있는 종교화로서의 고려불화 이래 조선시대의 초상화 및 풍속화에서 독특한 표현양식을 구축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눈을 돌려 보면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진정한 인물화 양식 및 작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는 대답이 궁색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한국화에서는 전통적인 채색화 기법에 의한 초상화 형식의 작품이 소수의 작가들을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양화에서도 선전 이래 국전 및 미술대전 등을 통해 이른바 '국전풍'의 정적인 구도의 인물화와 80년대의 민중미술에서 인물화의 존재를 짚어볼 수 있다. ● 그러나 오늘 이 시점에서 보았을 때는 커다란 흐름 또한 경향성으로 집약해 낼 수 있는 인물화의 형식적인 특징을 요약해 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적인 성과가 있는 인물화가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일관된 주제의식이나 기법 및 형식적인 공통성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다. ● 그런데 최근 수년간 일부 30-40대 작가들 중에는 인물화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개별적인 성과를 얻고 있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에서건 아니면 구상성으로 회귀하는 미술계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든간에 인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기대하고 있다. 전형적인 사실주의의 시각에서부터 모더니즘적인 경향과 상징적인 의미체계, 그리고 사회 비판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대상으로 하는 소재는 다양하다. ●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그 이전의 뉴페인팅, 신표현주의 등 서구미술사조의 표피적인 이해 및 명목적인 추종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 같은 미술의 경향과 섞이는 일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참여하는 작가들만큼은 그러한 흐름에 휘말리지 않는 견고한 자의식을 보호막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랬기에 비록 그것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완성된 미학에 이르지 못했을망정, 진지한 자기 발견을 위한 노력의 자취는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는 이즘 또는 이념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인 미술운동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장르의 붕괴 현상이 말해주듯이 어떤 특정 경향이나 기법 또는 방법론에 대입시켜 하나의 공통분모를 이끌어내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모든 회화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어느 한 곳에 스스로를 묶어두지 않으려는 의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가들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류성하_연평아재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1988
서용선_폭력의 기억_한지에 아크릴채색_78×52cm_1992

따라서 오늘의 상황은 다원주의 시대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다. 그동안 민중미술이 이념 및 체계문제로 기존의 순수미 또는 모더니즘 경향의 인물화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현실 참여를 내세우며 한국적인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미의식을 간과한 나머지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역사의식과 순수 조형 그리고 내면의 심화에 시선을 돌린 일부 화가들은 자기 육성만이 진실임을 자각,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개별적인 형식을 추구해 왔다. ● 오늘 『인물화, 삶의 표정』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대부분 자기 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무언가 작가로서의 끈끈한 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땅 밑에서 차오르는 새순과 같은 자기 확신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맨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은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표백이 아닌 완전한 이탈이다. 한국인의 정서 또는 미감에 의한 새로운 조형식(造形式)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말하는 '한국인의 정서 또는 미감'이란 자신 속에서 찾아낸 한국인만의 경험과 체질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정서적인 공감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밀착된 언어의 집합니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결코 이상화된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가적인 시선은 자신의 내부 또는 생활주변, 나아가서는 민족적인 삶의 자취 등 이 땅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겨냥되고 있다. 그러기에 서구미학으로 현란하게 치장된 어설픔을 느낄 수 없다. 소박하고 순수하면서도 굴절되지 않는 건강한 시각으로 나 자신과 우리들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 하나하나는 해독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배제한다. 물론 작품에 내재된 암시적이고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의미체계에까지 접근해 들어가기란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일차적으로 그림으로서의 윤리성, 즉 표현적인 기능성을 선결함으로써 일단 신뢰를 준다. 그 같은 신뢰감이 우리에게는 친근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심현희_내일_헝겊에 수묵채색_141×177m_1989
오원배_무제_1992

이들의 작가의식은 스스로의 체질, 감정, 기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맞는 표현양식 및 형식 그리고 기법에 순응한다. 즉 시류에 부하뇌동하지 않는 견고한 주체의식을 담보로 하여 독자적인 조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획자가 이러한 점을 고려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적인 회화의 토용이 생산해낸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보고 싶은 의도가 깔려 있다고나 할까. 고전적인 시각과 리얼리즘 기법을 혼합한 노광을 선정한 것은 비록 그것이 이미 1세기 전의 양식이라 할지라도 회화의 실질적인 문제로서 여전히 한국미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 화가들의 의식은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유를 지향한다. 따라서 과거로부터의 흔적은 모티브로하여 그를 다시 주제로 상승시키는 조덕현과 허진은 사진과 같은 정지된 시간의 현장성에서 리얼리티를 얻고자 한다. 이 같은 역사적인 시간성을 통해 우리들 삶의 끈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미 어떤 형태든 주어진 이미지를 차용하여 과거를 우리들 현실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의 미의식을 단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고 있다. ● 우리미술에는 여전히 모더니즘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현실적인 이미지를 평면적인 색채이미지에 대입시켜 구성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미에 도달하고 있는 정병국, 진원장도 거기에 속한다. 이들은 조형기법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감각적으로 진행하는 형태변형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정동암_은폐된 사가(史家) 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7×152cm_1992
정병국_경유지(經由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5×53cm_1992

개인적인 체험 및 조형적 사고와 환상적인 미감에 능숙하게 반응하는 정일은 또 다른 모더니즘 정신과 합치된다. 밝고 화려한 색채감각은 순전히 그 자신의 개인사적인 감성의 쾌활한 성장에 기인한다. 현실공간을 무시한 소재의 배치 및 상징성의 부여로 미의식 개방을 유도하는 그의 조형감각은 일상성을 비일상성으로 전환시키는데 기능한다. ● 냉철한 현실비판 의식을 리얼리티로 간주하는 오원배, 서용선, 김해성은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수사법을 이용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간과되고 있는 도시사회에서의 소외, 향락, 비정함, 몰개성 등의 문제점을 각기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조명하고 있다. 이들의 현실인식은 직접화법이 아닌 간접화법으로 전달된다. 천박하지 않은 서술법이야말로 이들을 이념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요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도시적인 서정성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성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들 초상을 추구하는 김호석, 곽성동, 심현희, 류성하, 정동암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의 인물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삶의 현장성과 함께 심도있게 해부되는 현대인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초상을 발견하고 있다. 거기에는 형식적인 새로움은 없을망정, 진실한 표현 속에서 미적가치를 얻으려는 진지함을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들의 의식 속에 공통적으로 투영되는 사실의 하나는 한국적인 얼굴이다.

정일_어제 오후_캔버스에 유채_135×135cm_1992
조덕현_어떤 여성사_캔버스에 콘테, 아크릴_117×91cm_1992
진원장_꿈_유화_60.5×72.5cm_1990
허진_유전_여러 종이에 수묵채색_130×160cm_1991

새로운 산수화로서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김선두는 남도의 특유한 풍토에서 그 가능성을 추출해내고 있다. 그림 속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듯 싶지만 그 자연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주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서정미가 넘쳐 흐르는 논밭길의 조형적인 해석에서 남다른 감각을 보여준다. ● 이상과 같이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듯이 여기에 초대된 작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꾸어 가는데 충실하다. 이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쌓일 때 척박한 한국의 인물화의 풍토를 기름지게 만들 것임을 확신한다. ■ 신항섭

『인물화, 삶의 표정』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윤진섭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neo@neolook.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30209a | 인물화, 삶의 표정-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