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

책임기획 / 강성원   1997_1124 ▶ 1997_1229

민정기_숲에서(1)_석판_90×60cm_1986

1부 / 1997_1124 ▶ 1997_1209 민정기_박흥순_오형근_이강일_최민화

2부 / 1997_1211 ▶ 1997_1229 김지원_남궁문_박영숙_심현희_정원철

포스코미술관 POSCO ART MUSEUM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440 (대치4동 892번지) 포스코센터 서관 2층 Tel. +82.(0)2.3457.1665 www.poscoartmuseum.org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영혼들의 흐름 ● 세상은 지금 '표현'으로 넘쳐난다. 인생의 한에서 열까지 '표현의 정치'가 아닌 것이 없다.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되, 표현된 것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거나 전혀 다른 의도로 표현을 하기가 다반사이다. 표현에 일종의 '정치'가 개입된 것이다. ●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어느 인종, 어느 민족의 삶에서나 '표현'은 중요한 기능을 했고, 인류문화는 이렇게 '표현된 것'의 총화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세계는 어떤 시대보다 더 복합적인 '표현의 정치' 시대가 되고 있다. 삶을 구성하는 실제적 실체가 점점 더 희박해져 가고 있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조차 '유령 같은 표현의 왕국'에 그 현실감을 의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번 거짓말에 말리기 시작하더니 거짓말에 영원히 말리지 않으면 오히려 삶에 치명적이게 되는 게 현실이다. ● 가훈에서 교훈, 사훈, 국가의 헌법에 이르기까지 인간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여러 단위의 조직들은 제각각의 규율과 원리, 법, 목적 등을 갖고 있는데, 이에 관련된 모든 담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체계'이다. 대중들은 이것을 믿고 따르고 어떤 사람은 이것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이념 또한 표현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매우 추상적이다. 일종의 '가이드 라인' 같은 표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표현들에는 '자유'와 '평등', '평화', '행복' 같은 개념들이 속한다.

민정기_양평의 가을_종이에 아크릴채색_64×42cm_1997
박흥순_그리움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1997
박흥순_마라도 회상(回想)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1997

이런 표현들은 '가이드 라인'으로서의 기능을 지니면서도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유명론적일 뿐 인생의 실제에 대응 혹은 반영하는 표현들이 아니기에, 이들의 가이드 라인으로서의 기능은 삶의 내용과 형식을 무조건적으로 재단할 뿐이게 된다. 삶은 언제나 이런 표현들의 내용과 어긋나게 마련이다. ● '상식'도 이런 표현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상식은 이념 같은 표현들보다 좀 더 개인적인 경험의 공통분모를 표현한다. 이념과는 달리 상식은 사회전체의 개별 구성원들을 통합하는 보다 구체적인 원리이긴 하지만, 또 그만큼 개인적 경험의 차이들을 무화하면서 표현의 폭력을 구사하기도 한다.

오형근_웃옷을 어깨에 건 아줌마_흑백인화_88×119cm_1997
오형근_호랑이 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_흑백인화_88×119cm_1997
이강일_가족_종이에 아크릴채색_123×77cm_1997
이강일_가족_종이에 아크릴채색_123×77cm_1995

사회를 권력의 정점하에 통합하려는 의지가 크면 클수록 '상식적 표현'보다는 '이념적 표현'에 의지하는 표현의 정치학이 강화된다. 이런 사회의 모든 표현은 조작, 계산된다. 사회의 표현들 전체는 고도로 복합적인 정치적 표현으로 통합된다. ●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표현들도 있다. 이런 표현들은 지극히 구체적인 그만큼 상식적 표현에 어긋나기도 쉽다. 개인적인 표현들 중에는 스스로를 속이고 상식적인 표현으로만 위자오딘 경우가 더 많다. 개인적 표현의 경우 상당 부분 사회의 여러 다른 표현체계에 감염되어 있기도 한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상품미학도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지배논리의 표현체계를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의 정치학인데, 상품미학의 감성체계가 개인적 감성의 표현으로 이입된 경우도 허다하다.

최민화_20C 회화의 추억-No.1_종이에 유채_70×55cm_1997 최민화_20C 회화의 추억-No.2_종이에 유채_70×55cm_1997
최민화_20C 회화의 추억-No.6_종이에 유채_70×55cm_1997
최민화_20C 회화의 추억-No.7_종이에 유채_70×55cm_1997

세상에 남이 표현하지 않은 것이나 표현하지 않았지만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혹은 표현은 반대로 했지만 제대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을 헤아려 알아주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에 근거해 측정되고 판단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기준을 마련하는 길이고 경제적이다. 이것은 물물교환할 때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화폐가 교환의 기준이 된 것과 같은 논리이다. 비록 그것이 겉돌거나 떠도는 표현일지라도, 그런 표현이 표명되었다면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래야 그로부터 모든 것이 움직일 수 있다. ● 사실 이런 세계는 어떻게 보면 착종되고 뒤얽혀서 오해와 왜곡이 가득한 그 속에 합리성의 믿음을 심고 출발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오해된 것을 오해하고 그것을 다시 또 오해하고 오해하는... 그런데 어느날 이것이 진실로 둔갑해 세상의 종교 혹은 신념이 된 세상,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주관적 내지는 객관적 진실의 중심이란 정말로 인위적일 수 밖에 없다.

김지원_자화상-경고_천에 유채_373×213cm_1994
김지원_경고_캔버스에 유채_60×50cm_1994
남궁문_기도하면 살려주시겠습니까?_캔버스에 유채, 먹_116.8×91cm_1995
남궁문_꿈_한지에 채색_144×225cm_1997
박영숙_양육체·성-1/3_흑백인화_각 300×120cm_1997

우리 미술계에 떠도는 이미지 중에는 이런 곡해의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미지도 있고 외관의 외관만을 표현한 이미지가 있는가하면, 역사 속의 이미지를 밑도 끝도 없이 현재로 끌어와 쓴 이미지도 있다. 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역사에 관한, 혹은 표현과 표현에 관계된 것에 대한 숱한 왜곡, 절충, 오해도 존재한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여가의 정체성을 확보할만한 아무런 지표도 주어진 것이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이미지가 이미지의 꼬리를 물고 끝없이 진실을 은폐하려는 곳, 바로 그 곳인,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그 곳은 비록 모든 이미지들의 무덤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기가 어느 정도로는 통하는 곳인 것은 확실하다. 아직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혹은 이미지의 기의와 기표가 엇갈리는 어느 사이에 진공의 빈 공간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폐되어진 채 남아 있거나 이미지의 표리가 이미지 사이의 기의의 틈새를 새로 만들어 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코는 이런 기미를 맡을 수 있기에는 너무 둔감해졌다. 관행 그 자체가 상상력의 어머니처럼 되버렸다. 이미지는 이미지 은행에서 빌려줄 뿐이다. 은행이 창조력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심현희_누워서 TV보기_장지에 아크릴채색_134×169cm_1997
심현희_담배 피우는 내 남편_장지에 아크릴채색_169×134cm_1997
정원철_대석리 사람들_리놀륨 인각_180×120cm_1997
정원철_어머니와 도장-반복된 일상_장지에 도장찍기_210×150cm_1997

이 전시는 이런 우리의 현실상황들 자체를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고자 한 전시이다. (료타르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이 곧 전통적 숭고미 개념이라 하면서 이것을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관한 규정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시는 숭고미 개념에 관한 전시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모든 위대한 예술은 항상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 왔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전시는 이런 의도 하의 전시는 아니다. ● 이 전시는 '표현'을 관통하는 허위의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층위로 인해 기의와 기표가 서로 찢겨 해체되었거나 피를 흘리며 넌센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표현될 것에 관한(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독해의 일련의 표상체계(독해의 문법)를 만들어 표현된 것의 저편에 있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혹은 표현될 수 없었거나 표현을 잃어버리거나 잘못 표현된, 즉 겉으로 드러난 외관과는 달리 그 속에서 울며 소리 지르며 떠도는 여러 종류의 진실의 유령들)을 들여다보고자 한 전시이다. 낚싯줄에 과거의 강에 묻힌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려오듯, 고기 뱃속의 약육강식의 역사가 백일하에 드러나듯, 그렇게 표상의 체계를 낚시줄 삼아 이미지의 저쪽에 대해 냄새 맡아 보고자 하는 전시이다. ● 이 전시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그 이미지들이 지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의 역사를 메아리처럼 읽고 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된 전시이다. 각각의 이미지가 지닌 메아리와 그 메아리가 닿는 끝부분에 천착해서 거기서 아스팔트 밑에 깔린 마음의 역사를 읽어 주기를 바란다. ■ 강성원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강성원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neo@neolook.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71124a |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