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Honey

이동기展 / LEEDONGI / 李東起 / painting   1999_0416 ▶︎ 1999_0430

이동기_Money Honey_서남미술전시관_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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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미술전시관_폐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동양증권빌딩 1층 www.seonam.org

대중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

'비어있는 개념'에서 '채워진 개념'으로 ● 언제부턴가 '핸드 메이드'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 있다. 대량복제·대량생산의 시대를 사는 이 시점에 손으로 만들어 정성스러움은 물론 나와 몇몇, 혹은 나만이 갖을 수 있는 나의 것이라는 상류계급의식, 귀족의식, 고급의식의 일루젼은 핸드 메이드의 가격을 금전의 가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한다. 수공(手工)에 이렇게 의미부여가 가능한 것은, 정신적 노력을 요하는 것이냐, 신체적 수고를 요하는 것이냐에 따라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구분 짓던 르네상스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다른 이들과 '나는 다르다' 나아가 '달라야 한다'는 '튀어야 하는' 열병을 앓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의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같은 경우에 핸드 메이드는 '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넘어서 '하나밖에 없다'라는 개념으로 확대된다. ● 하나밖에 없는 것... 이것은 예술의 특성이 아닌가. 이렇듯 '하나밖에 없는' 것이 대접받는 시대에 작가 이동기가 미술관에 들고 들어간 것은 고급이 아닌 대중적 모티프, 널려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량생산을 전제로 하는 대중적popular 시각 이미지를 그는 '핸드 메이드'로 생산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대중이미지'가 '수공'에 의해 차용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전략을 내포하는 것일까? ● 흔히들 대중문화는 (진정한) 문화와 비교되는 허약한 타자이며, 진정한 것의 전진을 가로막는 위험한 그림자라고 한다. 그 사용 맥락에 따라 때로는 여러 가지 모순되는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사실상 '비어 있는' 개념적 범주가 바로 대중문화이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시각 이미지는 비어 있어 가볍기에 깃털처럼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중독시킨다. 여기에 단서가 있다. 얼핏보면 그가 대중문화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이 아트의 '적자'가 되고 싶은 것이 진실된 그의 속내이다. ● 이동기는 분명 대중적 시각 이미지들을 차용/인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이디오신크라시idiosyncracy'로 전통적인 예술의 아우라, 즉 복제 불가능한 예술의 일회적 현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우라는 미술관 제도 속의 어떤 예술작품들 못지 않게 그 두께가 두텁다. ● 이로서 그는 '허약한 타자', '위험한 그림자'를 '튼튼한 주체', '정직한 실재'로 그 상황을 역전시키고 '비어 있는' 개념을 충만히 '채워진', 혹은 '비어 있지 않은' 개념으로 돌려놓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PC통신에 수없이 올라있는 "십대들의 단편 환타지"와 매우 닮은꼴임에도 불구하고 이동기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의 노림수는 적중한 듯 보인다.

이동기_Money Honey_서남미술전시관_1999
이동기_Money Honey_서남미술전시관_1999

Work와 Text 사이 ● 이동기의 작업을, 내러티브 만화의 컷 하나를 베끼고 확대한다든지, 기존의 만화 이미지를 합성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든지, 또는 대중스타나 신문의 프로그램, 신문 광고의 이미지 등 대중적 이미지를 확대한다든지 하는 작업등으로 그 형태를 분류한다 할지라도, 이런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그려져' 있거나 '인쇄된' 매체들에서 출발한다. 즉 뉴-미디어, 영상매체는 아닌 것이다. ● 대부분 이동기의 이미지 작업을 체취 없는 객관화된 대상으로 보지만, 극히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 - 자신이 읽었던 만화의 한 컷, 보았던 신문 프로그램·한 칸 짜리 만평,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디스크 자켓 등- 과 취향에 밀착하고 있음은 그의 작업 앞에 서보면 금새 눈치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대중적 이미지의 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그가 대중적 이미지를 채택하면서도 그 이미지들은 대부분 현재는 없고 과거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그가 오늘날 대중 매체의 선두주자인 영상매체와는 인연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조용필」은 있으나 H.O.T와 S.E.S는 없고 거리의 소녀와 왕자님(「전쟁과 사랑」)은 있으나 드래곤 볼이나 세일러 문은 없다. 「수배자」신창원은 있으나 요즘 아이들을 들뜨게 하는 보라돌이, 나나, 뚜비, 뽀 등 텔레토비 친구들은 더더욱 없다. ● 이같은 사실은 자신과 세계의 감성적 충돌의 경험 이미지만이 그의 작업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듯 극히 주관적인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작업Work 이미지들은 결코 자신의 주관적인 관념이나 생각을 객관화하겠다는 작가의 단호한 의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리에게 열려있는 의미로서 텍스트Text가 된다. 이때 이동기의 작업은 이미 정해진 '읽는 위치reading position'에 갇혀 있지 않고 그야말로 대중문화와 같이 관람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부딪히고 다르게 흡수되어 그 의미는 끝없는 확장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팝pop이라는 대중적 상상력을 전제하고 있는 그의 작업은 팝처럼 소통되기를 꿈꾸는 작가의 욕망과 함께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처럼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예술작품과는 다른 위상을 갖는다. 이는 종래의 전통적인 예술작품들이 주·객체의 소통 코드가 동일하기를 강요했던 반면, 이동기의 작업은 관람자의 역할이나 작업이 가지는 모순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역설적으로 작가를 예술이라는 담론으로 이끌게 하는 것이다. 과도하게 말하면 이동기는 "음악이나 연극처럼 수행perform되는 것, 나아가 그 수행의 와중에서 관객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예술"로서의 자신의 작업을 유도하고자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동기 작업의 힘은 그가 텍스트 안에 써놓은 것이라기 보다는 관람자에게 작동되는 해석의 여지, 그것을 열어놓는 그의 욕망-Money Honey에 있다. 즉 미키마우스가 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의 꿈으로 자리잡았듯, 아톰이 오늘의 일본을 세계 제일의 로봇 왕국으로 자라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되었듯, 자신의 캐릭터 「아토마우스」로, 「수배자」신창원으로, 시인 「이상(李箱)」으로 「아름다운 별」 지구 곳곳에 자리잡고 싶은 거다. 이를 위해 이동기는 '작가의 죽음'도 불사하고 있다.

이동기_Money Honey_서남미술전시관_1999
이동기_Money Honey_서남미술전시관_1999

아토마우스의 허(虛) ● 이동기는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 나가는 작가 중에 하나다. 92년 『젊은 모색』(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수많은 갤러리와 미술관들에 기획전으로 또는 개인전으로 초대되는 것이 그 예이다. 어느새 그가 아토마우스라는 캐릭터를 고안한지도 6년이 되었다. ● 6살된 아토마우스는 때로는 달러($)나 원(₩), 엔(¥)으로, 한 때는 손오공으로, 거미로 또는 얼굴만으로, 교복입은 모습으로 놀라거나 웃거나 찡그린 채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동기를 떠올리면 누구나 아토마우스가 오버-랩 될 정도로 이동기의 이미지는 이미 대중에게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더이상 자극적이거나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기발한 이미지를 새롭게 고안하지 않는다면, 평생 아토마우스의 망령에 붙잡혀 지내야 할만큼 그의 이미지는 고정되었다. 이런 류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이동기를 대표하는 작업은 누가 뭐래도 「아토마우스Atomaus」이다. ● 일본만화의 전설적인 존재인 데쓰카 오사무의 '아톰'과 미국 월트 디즈니가 만들어낸 '미키마우스'의 교배종인 아토마우스에는 콜로니얼colonial한 우리의 냄새가 묻어 있다. 일본과 서구문물의 이중이식의 산물, 타자의 몸을 빌어 태어난 아토마우스로 "일본과 미국 문화에 잠식당해 가는 한국문화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논리는 왠지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로서는 이런 거대서사가 그의 작업에 담겨있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섣불리 말하자면 아토마우스는 이동기에게 그야말로 콜로니얼한 환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뿐이다. 서구문화 수용만이 근대화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으로 맹목적인 서구화에 몰입했던 근대기 한국이 가졌던 환상과도 같은 그런. 그래서 일까? 아토마우스는 어떤 종류의 기준이나 관습이 나타날 가능성도 없는 공허한 시뮬라크라 simulacrum로 비쳐진다. ● '배후동기'가 배제된 듯한 아토마우스와 그의 작업에 복원된 일상적 이미지들은 '어떤 것에 대한', '무엇에 관한' 등이 없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동기 스스로가 자신의 의도와 관념을 배제한 채 타자 앞에 서고자 하는 특수성 때문으로 짐작되지만, 시인 발레리의 말처럼 어떤 작품이든지 근본적인 동기는 마음 속에서만일지라도 논의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닌가? 지금껏 이동기 작업의 리얼리티는 '실존하지 않는' 환영의 공간 이미지로 '실재하는' 공간으로 역전될 수 있다는 환상에 그 비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이든 환영이든 간에 거기서 유추되는 것은 그러한 환상을 뛰어넘는 '무엇'이어야 할 듯 하다. ● 그가 팝아트의 전사 앤디 워홀과 같이 자신의 작품에의 의미부여를 거부한다면야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이동기의 경우는 스스로가 미국의 팝아트와의 차별을 원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이번 전시에 선보였던 60여 개가 넘는 아토마우스가 제 힘으로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그의 욕망처럼 그야말로 '채워진' 개념, '비어있지 않는' 이미지로의 전회(轉回)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대중적 이미지에 중독된 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동기로부터 이동기 자신을 떼어놓기 위한 방법이다. ● 평범한 얘기지만, 지속적인 한계 수정을 통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것이 작가들을 그토록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은 아닐까? ■ 김주원

Vol.19990416a | 이동기展 / LEEDONGI / 李東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