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이야기

김주호展 / KIMJOOHO / 金周鎬 / sculpture   1999_0507 ▶︎ 1999_0527

김주호_둥근 봉투_질구이_25×24×18cm_199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주호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1999_0507_금요일_05:00pm

서남미술전시관_폐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동양증권빌딩 1층 www.seonam.org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소통으로서의 조각 ● 다른 사람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표정과 몸짓, 말과 글자는 자신의 기분이나 마음의 상태, 요청, 제안 , 거절, 친밀감이나 분노 등은 물론 보다 어렵고 심오한 뜻을 전달하는데 가장 유효한 표현수단일 것이다. 상식적인 맥락에서 말이나 글자들이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의사전달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서로 다른 언어권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지 위장된 친절인지 판단하기 힘들 경우도 있다. 대개 표정을 통해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할 수 있지만 만약 그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다면 그것조차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게다가 뭐가 그리 바쁜지 늘 분주하기만 한 요즘 사람들의 표정만 가지고 그 사람의 상태를 알아차린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것도 현실이다. 게다가 유니폼처럼 비슷비슷한 정장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규격화된 언행만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주호_인간 그리고 그들의 관계_하드보드에 안료_∽×55cm_1999
김주호_휴계실 풍경_질구이_63×∽×20cm_1998
김주호_휴계실 풍경_질구이_63×∽×20cm_1998_부분

요즘 세상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거세된 소통회로' 위를 광속처럼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수많은 분절된 담(discourse)들이 충돌하고 거래되며 결국에는 먼지처럼 공중에 부유하는 소통의 부재를 증거하는 장소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어렵고 골치 아프고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이 함께 질주하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작가는 작가대로 뭔가 대화를 제안하는 것 같은데 영 오리무중이고, 세상살이는 편안하게 그것에 대해 사색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으니 에라, 까짓 것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조, 포기, 무관심이 뒤범벅되어 그나마 무거운 머리로부터 미술의 '미'자를 추방해버린다. 그래도 세상은 열심히 운동한다. 나도 이 경주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만나고 떠들고 주장하고, 호소하고, 설득하고 관철시킨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나의 존재를,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標識)이므로 나는 생존의 각축장이란 말에 문득 진저리를 치면서도 당당하게 그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

김주호_사람 1,2,3_폴리에스터_각 166×51×48cm_1999
김주호_5월 어느날 풍경_나무 안료에 채색_90×26×23cm_1999

그런데 어쩌다 흘깃 스쳐본 이상한 물건에서 어라, 저건 어쩐지 내 모습을 표현해 놓은 것 같은데 라고 깨닫는 순간 내가 여러 가지 이유를 동원하며 추방해 버렸던 이른바 미술이란 것이 실제로 내 옆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작고 신선한 감동을 받는다. 어떻게 고상하고 거룩한 미술에 나와 같은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끼어들 수 있다는 말인가. 먼저 의심을 해본다. 저건 필경 내가 알고 있는, 혹은 학교교육과 미술언론들이 나에게 강요하다시피 가르쳤던 숭고하고 초월적인 미술작품은 아니리라. 그래도 작달막한 키에 정장을 한 샐러리맨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가 안경을 착용하고 있고, 손에 컵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행색이 꼭 우리 회사 자판기 앞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과 같단 말이야. 저기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있는 남자는 꼭 김 대리를 연상시키고 그 앞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남자는 필경 강 부장이군. 이처럼 김주호의 작품은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는 일상을 주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다. 이해하기 쉽다는 말이 가치가 낮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학적이고 애매한 관념의 도식도, 그렇다고 감각에만 호소하는 허망함도 없다. 그의 작품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상은 살만한 것이란 넉넉한 관용과 겸손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사람됨됨이 이른바 인품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말하자면 소통의 회로가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인 현대미술에서 하나의 예외처럼 보인다. 짐짓 심각하고, 어려운 용어와 지적 오만으로 무장한 전문어를 동원해야 작품의 고귀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눈과 마음보다 머리와 언어가 비대해져 버린 현대미술을 향해 그는 미술은 참으로 재미있고 삶과 밀착해 있음을 이 어리숙하지만 흥미진진한 군상들을 통해 증명해 보이려 하는 것이다.

김주호_나들이_나무_81×21×18cm_1997

김주호의 작품중 질구이 작품의 경우 그 내용만큼이나 크기에서 친화력이 높다. 무엇보다 가마의 크기에서 오는 제한일 수도 있지만 굳이 대형작품을 제작하지 않는 이유도 큰 규모의 작품이 야기할 수 있는 심리적 부담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의 규격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질문에 대해 그는 쓸데없이 크기만 부풀려 놓은 것을 재료인 흙의 성질을 거슬리고 궁극적으로는 재료의 낭비에 봉사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 그의 작품이 지닌 친화력은 표현된 인물들의 해학적인 모습과 표정에 의해 고양된다. 튀어나온 광대뼈, 큰 머리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은 하체, 헤벌린 입과 그 속의 치아, 호탕함과 비굴함, 자신감과 피로가 서로 교차하는 다양한 표정들-그것은 우리가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고 있는 동료이거나 행인, 혹은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익살스럽게 과장된 표정은 프랑스 혁명기의 국민의회 의원들을 풍자적으로 포착하여 훌륭하게 구현해놓은 도미에(Honor Daumier)의 캐리커처 조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 그러나 김주호의 작품에는 비수처럼 파고드는 공격성이 없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아이러니보다 유머에, 풍자보다 골계에 더 밀착해 있다. 그러면 그가 만들어낸 특유의 도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번 전시에서 그는 전시장이 있는 여의도의 지역성에 주목한다. 거대한 오피스 타운인 여의도에서 그는 군중 속의 개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빌딩의 복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일처럼 다양한 각종 민원을 제기하고 있는 시위대에게서 그는 작품의 주제를 포착하고자 한다.

김주호_아!_질구이_49×24×18cm_1998
김주호_아직도 계속되는 시선_질구이_88×177×8cm_1999

군중이란 보통명사에 의해 묻혀버릴 개인들은 늘 그의 표적이 된다. 그들의 꿈과 행복, 그들의 욕망과 피곤은 그의 작품에 생기를 부여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지는 않는다. 그는 신문들의 언론매체에 게재된 사진 중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오려 스크랩하고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뒤적이며 구상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눈을 감는 버릇이 생겼다고 몇 번인가 말한 적 있다. 즉 눈을 감는 순간 그의 뇌리에 새겨졌던 인물의 인상은 변형의 과정을 그치며 그 특징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실물에 필적하는 사실성이 아니라 인상적인 순간이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동료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된 재미있는 형태나 탈, 운주사의 수더분하면서도 고졸한 불상, 심지어 카툰으로부터 나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을 주제로 한 대상이 그의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무엇이든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은 영락없이 그만의 독창적인 인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순간적인 인상을 재빨리 형태로 구체화하는데 있어서 흙은 가장 익숙하고 유용한 재료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질구이가 압도적으로 많다.

김주호_그림자-젊잖은 대화_철판_41×39×10cm_1999
김주호_탈바꿈 투시도_철판_41×27×17cm_1999

그러나 그는 흙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인 작업장 주변에는 수많은 질구이 군상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그 한켠에 농기구의 파편이나 부속으로 만든 작품들이 놓여있다. 또 마당에 풀어놓은 흰 진돗개가 벗삼을 법한 동물조각들이 자연과 어우러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바야흐로 농부로서 밭을 일구는 주인님의 충실한 수호자이고 또한 주인님의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는 식구이기도 하다. 질구이 작업과 함께 그는 요즘 나무와 철판, 합성수지로 작업하고 있다. 더불어 아직은 끝을 가늠하기 힘든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날렵한 붓질을 이용해 그리고 있다. 이 모든 작업들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대화의 채널이며, 작가는 가장 겸손한 자세로 그것에 대해 제안하고 있다. 이 유쾌한 모임에 초대받은 나는 이 글을 쓰는 순간 무척 행복하다. 현상과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 못지않게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들려주는 것 또한 미술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대화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작품에서나 사람 그 자체에서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이 작가가 특유의 넉넉한 정신으로 판을 벌려놓았으니 이제 가서 대화의 길을 터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인가 보다. 거기에서 나와 이웃을 발견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 최태만

Vol.19990507a | 김주호展 / KIMJOOHO / 金周鎬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