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미술은 독립적일 수 있는가?

홍지연_20세기 패션쑈_1999

● 이 글은 지난 9월 20일에 있었던 독립에술제'99 내부공사 세미나의 발제 요약입니다.

미술은 독립적일 수 있는가라는 거창하고 뻔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모기회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기회식', 군대식 피학대 음란증의 하나로 여름밤 벌거벗거나 팬티만 입고 연병장이나 내무반 막사 밖에 차렷자세로 서있는 어리석음의 한 극치. ● 그렇다. 미술판, 미술계란 일종의 '모기회식'판이다. 작가들이란 캄캄한 밤 벌거벗은 것에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서있고, 이익을 챙기는 자들은 앵앵거리며 영양가 있는 작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하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이란 다른 종류의 산업에 비해 극히 작은 규모이다. 영화, 대중음악, 문학 따위의 문화산업에 비겨도 시장의 규모와 거래량 등에서 거의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때 몇조 단위가 된다는 고미술품의 거래는 제외된다. 고미술품은 미술품이라기 보다는 투기성과 자기과시가 결합된 희귀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기회식'판 정도의 규모에 지나지 않는 미술판은 상당히 과대포장되어 있다. 특히 90년대는 사회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무지갯빛 거품에 싸여 있었다. 과대포장된 미술판 안에 있는 작가들은 근본적으로 독립적이다. 작품이 팔리고 화랑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는 극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작품의 제작, 전시, 판매의 전과정이 독립적인 것이다. 그리고 독립은 규모로는 작을지 모르지만 극단적인 자기 희생성을 띤다. 그 자기희생은 투자분을 건질 가망이 전혀 없는 전시회를 둘러싸고 모든 것은 바치는 살신성인적 자기투자다. 이 후원자 없는, 외부 투자 없는, 운명적인 독립성의 역사는 길고도 그 뿌리가 깊다. ● 굳이 예를 들자면 17세기, 교회의 주문과 후원이 사라진 신교도 네델란드가 그 적절한 경우가 될 것이다. 가장 큰 고객이었던 교회의 주문이 사라지고 대신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수요가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화가들은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서 화가들은 그림 이외에 생존을 위한 작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관을 경영하는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반 고엔은 튜울립 장사를, 홉 베마는 세금 징수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홉 베마는 굶어 죽다시피 했고, 프란스 할스는 만년에 시립양로원에 몸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렘브란트조차도 죽었을 때 장례비도 없을 지경이었다. ● 동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화가들은 국립이미지제작소인 도화서나 도화원의 화원이었다. 즉 시험을 통과하거나 음서에 의한 관료로서 밥을 먹고 주문된 작품을 제작했으므로 전혀 독립적이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이른바 문인화가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림이 본업이 아니라 일종의 취미활동인 사람들이었다. 관료, 문필가, 지주로서 먹을 것이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누렸던 독립성은 화가로서의 독립성, 미술의 독립성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 후원자 패트런이 사라진 미술계에서 독립적인 매체, 생산과 판매에서 독립성의 확립이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 멀고 험함은 그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변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독립성의 극단적인 예가 아방가르드 운동이다. 아방가르드가 주창했던 삶과 예술의 일치,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시도란 철저한 독립성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조차도 상업적인 자본과 제동의 정교한 그물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이미 삼십 년도 더 전에 증명되었다. ● 미안한 얘기지만 영화나 대중음악의 역사에 비해 훨씬 긴 역사를 지닌 미술분야에서 독립이라는 신화는 무너져 버린지 오래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러면서도 다른 분야에 비해 생산, 판매, 소통 등에서 독립적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미술영역의 생산물의 성격에 기인한 바 크지만 이러한 이중성이 시각예술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직도 미술은 독립적일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독립적이기 위해서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경제적인 독립이다. 생산한 미술품을 판매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아야 한다. 둘째로는 제도로부터의 독립이다. 미술을 둘러싼 미술관, 언론, 평가, 학교 등등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는 대개의 미술가,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걸작을 남기겠다는 생각, 대가가 되어 명예를 얻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물론 이밖에도 여러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지만 대강 이상의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완전히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은 사실상 도달 불가능한 것들이다. 특별히 유산을 물려받거나 떼돈을 벌거나 하기 전에는 경제적 독립은 불가능하다. 제도로부터의 독립 역시 판매를 하지 않는다 해도 작품의 발표와 전시 등에서 제도의 힘을 빌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로서 명예, 혹은 좋은 작품을 남기겠다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는 전혀 가망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족적인 아마추어가 아닌 한 모든 미술가들은 허영에 가까운 명예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존재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 그러므로 미술을 완벽히 독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상대적인 독립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상대적 독립이지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작품 판매에 의한 수입에 기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부업이 필요하다. 우리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기업이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다. 교사, 교수 등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 길은 만만치 않다. 특히 교수는 권위, 수입, 권력, 명예 따위를 보장받는 대단한 지위이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이 필요하다. 학연, 지연, 혈연에 금맥까지 요구되는 대단한 지위이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 교수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좋은 작품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더구나 애써 들어간 학교 자체가 바로 제도의 핵심이 된다. 그것이 싫다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복수적인 수입이 가능하도록 하거나 사업을 벌이거나 배우자나 다른 가족의 수입에 기대 기생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경제적 독립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고 그만큼 작품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 작품을 내버려야 하는 것이다. ● 다음으로 제도로부터의 독립이다. 제도로부터의 독립이란 흔히 말하는 화랑과 미술관, 비평가, 화상이라는 삼각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전시라는 전통적인 형식들을 대관화랑, 미술관 등에서 하지 않고 비평으로부터 초연하며 화상을 통하지 않고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중 일부는 실현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최근에 다시 열리기 시작한 대안공간이라든가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공간에서의 전시, 혹은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전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도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다. 자기희생적 대안공간은 늘 존속이 불안하고 일반적인 공간들은 관리와 선택이 어려우며, 사이버 공간 역시 돈과 노력이 요구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사이버 공간에서의 미술품 체험이란 컴퓨터 작업이 아닌 한 늘 불안한 대리체험이 된다. 사이버 공간에 희미한 가능성이 보이기는 한다. 사이버 공간을 통한 작품의 소개와 판매 등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것을 이미 가진 기존세력에 의해 선점 당하기 쉬우며 이미 선점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도 아직은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 비평과 화상에서 초연하는 것은 쉬울 수도 있다. 제멋에 겨워 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제멋에 겨운 자족은 반성 없는 졸작을 양산할 가능성이 크고 만약 작품이 팔릴만 하다면 화상들로부터 자유도 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경우 화상들은 판매 가능성이 높은 작품 이외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원초적으로 자유롭다. 하지만 그것도 화상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경우에 한해서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예 따위로부터의 독립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프로이드가 말했듯이 예술가들이 바라는 것은 돈과 명예이고 예술이란 그것을 추구하는 또다른 우회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만 덧붙이기로 하자.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속 시원한 답을 했으며 좋겠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단지 미술이 독립적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구속력이 가장 높은 제도와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전투는 전면전이 아니라 진창에서 나뒹구는 지루한 진지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계의 제도들이란 최근의 광주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선정을 둘러싼 추악한 잡음에서 보듯이 사회의 다른 제도들과 미로로 연결된 완강한 보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전투에서 이기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다. 이기리라는 보장도 전망도 없는 지루한 싸움은 신념 없이는 불가능하다. 설사 이긴다 해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제도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새로 형성된 제도가 보다 나은 것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도달되기 전에 예단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미술관, 이 '모기회식'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밀고 당기는 혈투 속으로 뛰어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 강홍구·작가

Vol.19990921a | 순수미술은 독립적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