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파리떼, 그리고 예술의 똥

안창홍 회화展   1999_1101 ▶︎ 1999_1101

안창홍_우리도 모델처럼_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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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홍의 그림을 본지도, 또 그를 안지도 벌써 15년이 넘어가는 것 같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갖게 되는 변함없는 느낌은, 뭔가 인간의 이성이니 합리성이니 논리니 하는 사유방식이 그의 그림 앞에서는 무색해진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의 그림 속에서 직관과 예감, 환각적 상상력이 얼마나 당당하고 생생한가, 그리고 이를 통한 현실인식과 통찰력이 얼마나 정확한가에 놀라워한다. 한 마디로 안창홍의 그림은 작가 특유의 독심술적인 감각의 원리가 관통하는 그야말로 직설적이고 화려한 '감각의 제국'이다. 감각이 이성과 합리성, 논리적 사고를 통합시켜 내는 그런 육질의 세계라는 것이다. ● 대개의 경우 그림을 보되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일이 흔치 않은데, 안창홍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그림 안에서 감각의 촉수로 인간을 읽고, 세상을 읽고 느끼며, 바라보게 된다. 안창홍의 그림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감각의 기능을 회복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림이 담는 메시지가 단순하고 단일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오히려 겹겹이 중첩되어 있는 그림 속의 의미가 전체로 읽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은 아주 낯익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낯선 그 무엇을 안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 정체가 무엇일까. 그의 그림이 의식과 무의식의 두 얼굴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언뜻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속 깊은 우리의 무의식의 얼굴과 맞닥뜨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의 복잡한 심리적 기제를 드러낸다는 것, 그것이 곧 감각을 언어로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감각의 언어란, 그래서 구체적이고 생생한 인지의 힘이며 호흡이다.

안창홍이 인간의 무의식의 근저를 건드리는 것, 그 자체는 이미 인간을 향한, 세상을 향한 일종의 공격적인 제스처가 된다. 그 공격성은 거의 맹수의 그것과 흡사하다. 집중된 공격의 힘이나 속도나 강도가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힘이 집중되는 곳은 바로 욕망이라는 야성적 인간성에 권력이라는 사회화된 야성이 결합되어 있는 불온한 인간의 본질, 그로 인한 비극성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감각이, 공격성이 현실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 그의 공격성이 공격성 그 자체로 극화되거나 양식화되지 않는 것은, 그가 현실을 '우화적인 변용'을 통해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의 깊숙한 곳을 찌르고, 그 살을 저며내고 떠내는 방식으로 현실을 희화화하고 풍자한다. 때로는 키치적 정서로, 싸구려 미학의 저돌성을 앞세워, 가짜의 논리로, 고급취미와 그 속물주의에 반격을 가한다. 때로는 진실의 껍질을 뒤집는 그로테스크와 추의 미학을 통해, 때로는 화려한 컬트적 감성으로 온갖 제도적 질서에의 굴종과 순응을 한껏 비웃어버린다. 그렇게 말하는 방식이 실제로 의식의 수면 위로 무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일을 더욱더 용이하게 만들고, 현실에 대해 일정하게 거리를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현실과 맞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식욕이, 그의 열정이, 그의 당당함이, 그의 오만함이 그를 계속해서 숨쉬고 말하고 배설하고 토해내고, 그리고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공격성은 곧 생명력인 셈이다.

이번 개인전에 보이는 작품들은 최근의 아크릴릭 작품들과 드로잉들이다. 드로잉은 지난 시절의 작품도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안창홍이 집중해 오던 권력과 욕망이라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다만 그 주제를 육화시킴에 있어 '파리떼'와 '똥'이라는 두 개의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지난 시절과 다르다. 파리떼는 안창홍 특유의 화사하고도 야한 색조의 초상화에 난데없이 스물거리며 달라 붙어있거나, 아니면 '욕망'과 '씹', '똥', '권력'이라는 대형 문자를 그림처럼 만들어내고 있다. 파리떼와 똥은 언어를 만드는 육체이자, 그 자체가 언어의 육체를 구성하기도 한다. ● 안창홍에게 언어는 본질적으로 유기질적인 것이다. 언어는 침이며, 분비물이며, 소화력을 과시하는 내장이며, 살갗이며, 혀이다. 스물거리는 파리들이 권력과 욕망의 메타포로 읽힐 때, 그 지점에서 발화되는 것은 권력과 욕망에의 집착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야유와 독설이자, 동시에 자기가 자기를 먹어대는 권력과 욕망의 거식증에 대한 공포와 신경증적 강박이다. 파리떼는 또한 역설적으로, 그 자체로 인간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집단 무의식처럼, 권력의 복병처럼 은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모두를 씹어먹고, 토해내며, 방뇨하며, 난도질하며, 쳐낸다. 글자 한 가운데서 파리는 추상표현주의의 미적 형식처럼 비정형화되면서 똥 속에서 범벅이 된다. 초상화 위로 파리들이 달라붙어 있는 경우, 그림은 폭력이 암시되어 있는 초상으로 바뀐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 인형의 섬세함과 진홍빛의 매혹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그 청량함을 점령한다. 권력의 쓰레기에 꾀는 파리가 한 개인의 초상이라는 일상에, 익명에, 멈춰버린 시간에, 부동성에, 그리고 예비된 죽음의 시선 위로 자리한다. 그리고는 이내 공격을, 권력의 무차별적 사격을 준비한다.

화려한 유혹의 표정 속에서 안창홍의 초상은 빛난다. 그러나 묘한 것은 그 화려함이 쾌락의 절정을 말하는 듯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점이다. 「탱탱한 젊음」 같은 경우 일차적으로 젊음과 생명력이 두드러지지만, 그 속에서 아스라히 비극적 표정이 읽혀진다거나 죽음의 순간에 멈춰져 버린 듯한 화석화된 모습으로 와 닿는다. 「혀와 혀」가 오가는 야한 사랑의 장면도 그것이 야한 만큼 뭔가 억압된 실체를 느끼게 되며, 그래서인지 뭔가 '훔쳐보는 자'의 불순하고도 수상쩍은 시선이 잔뜩 끼여있음을 보게된다. ● 안창홍의 사랑의 표정에는 언제나 '사(邪)'가 끼여있다(꼭 사랑의 장면만이 아닌 청순한 소녀의 초상을 그렸을 때조차도 이미 그 안에는 그 소녀를 범할 것 같은 충동이, 혹은 그 소녀는 범해질 것이라는 사악한 예감이 던져져 있다). 그것은 인물들의 눈빛에도 몸짓에도 배어있다. 그 자체는 쾌락을 즐기되 금기시된 욕망을 범하는 자의 것이다. 인물들은 금기시된 욕망과 쾌락을 즐기고 과시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욕망을 통제하고 금기시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한 조롱으로, 저항으로 읽힌다. 그러나 늘 죽음이라는 극단의 순간에까지 밀고가는 '비극적 저항'의 맥락을 갖는다. 그 저항이 비극적임으로 더욱 몸짓은 화려하다.

그 화려함은 드로잉에서 더 많은 힘과 경쾌함으로 이어진다. 드로잉의 선은 아크릴릭의 색채화에 비해 생생함이 훨씬 선연하다. 선의 날렵함은 안창홍의 몸무게를 내용적 충만함으로 전환시켜 간다. 그것이 가벼운 듯하면서도 힘을 실어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안창홍 특유의 현실의 '우화적 변용'이라는 방식이 훨씬 자유롭게 펼쳐지는 선의 세계에서 말과 이미지는 그만큼 동적인 상태를 획득한다. 이 형상들의 다이내미즘은 인물들을 더욱 아름다운 '비극'의 주인공으로 묘사한다. 「서로 찌르기」는 엑스타시의 순간에 저질러지는 사악한 쾌락의 완성이다. 「남자와 여자」의 혀놀림과 애무의 몸짓도 '종이 위에 먹'에서는 한결 외설적이다. 「나른한 오후」에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그림자가 너무도 음흉하다. 표현의 구체성, 생생함, 역동성 등은 안창홍의 드로잉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안창홍은 드로잉의 원리를 생래적으로 체득한 화가다. ● 드로잉이란 기본적으로 모순의 운동법칙을 그 자체로 실현해 내는 것이다. 선의 빠른 필치는 화가의 감정의 상태가 가라앉기 전에 본래의 표출을 가능하게 만든다. 형태의 윤곽선만을 그리게 되는 선은 형상을 가상의 것으로 만들되, 미완의 과정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법칙 속에서 특유의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선은 가볍고 빠르고 미니멀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그 자체로 힘과 구체성, 생생함과 복합성을 내재하는 것이다. 선은 불균형이고 미완인데도 균형과 완결을 도모한다. 안창홍은 그 선의 원리를, 모순된 성격이 자아내는 충돌의 힘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래서 오는 덤이자 선물이다.

안창홍은 중력과 비상을, 성스러움과 독신(瀆神)을 꼭같은 아우라로 공존시킨다. 불, 별, 달을 가지고 노는 연금술사의 모습을 한 자화상에는 두 개의 삼각형이 있다. 양손으로 연결되는 선이 하나의 밑받침선이 되어 위로는 화가의 얼굴과 만나는 삼각형을, 밑으로는 화가의 아랫도리로 이어지는 삼각형을 만든다. 이 두 개의 삼각형은 위로는 화가됨의 자존(自尊)과 아래로는 화가됨의 욕됨을 말하는 이중구조로 해석된다. 나비를 쫓는 자화상도 위로는 가볍게 날아가는 나비를 향하는 비상에의 욕구가 보이지만, 아래로는 안창홍의 비만과 살코기가 그를 땅에 묶어두는 중력의 법칙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두 팔의 날개짓과 두 다리의 낙착(落着)이 화가됨의 자존과 욕됨의 극단을 늘 그렇게 올리고 당기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돌산의 정상에 올라가 똥을 싼다. 긴장된 승냥이의 웅크린 자세로 표독스럽고 기묘한 표정을 하고는 물감 같은 똥을 짜낸다. 「화가의 똥」은 물감이고, 무지개 빛 환상이며, 향기 없는 떡이다. 예술은 화가의 똥으로 빚은 떡시루이며, 청결의 위선이며, 탐욕의 보호구역이다. 똥은 모순과 역설의 의미체이며, 안창홍이 던지는 예의 화려한 비웃음의 물체라 할 것이다. ● 예술에 대한 화가의 영웅주의적 애착과 애정이 언제나 예술의 속세적 타락과 간사함을 노려보고 분노하게 된다. 낮게 포복하여 이리저리 정세를 살피는 땅개 같은 예술에 대해 화가는 똥으로 답한다. 게으른 자유와 느린 호흡, 깊고 찬찬한 리듬, 화려하고도 폭발적인 생명력을 기리는 무지개 색깔의 똥.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재빠르고 경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내려 붓는 똥. 예술이 소비되는 구경거리의 사회에 던지는 생산의 똥. 경제적 부가 문화적 빈곤을 정당화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내뱉는 욕의 똥... 예술이여, 아름다운 똥의 세례를 받을지어다. ■ 박신의

Vol.19991025a | 안창홍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