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사진가는 길에서도 걷지 않는다

사진마을 단체展   1999_1102 ▶︎ 1999_1102

홍일_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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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김남수_김영길_오종은_유현민_이준형_홍일

서남포토스페이스(폐관) Tel. 02.3770.2672

사람 다니라고 닦아놓은 길을 쳐다만 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은 길의 순기능을 높이 사는 실용주의적 주장임에 분명하지만 그 길을 보라는 사람도 있다. 들어가 살라고 만든 방 안에서 면벽(面壁)을 하는 이도 있으니 길을 걷거나 뛰지 말고 한참을 보라 한다면 거기에도 어떤 연유가 있는지 무시 말고 생각해볼 일이다. 닳도록 다녀서 생겨난 진창길이든 나라발전에 이로우라고 뚫어놓은 아스팔트길이든 길이라는 공간에선 너나없이 오가기 마련이기에 그러한 길의 소통성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길이 저 스스로 간직한 유구한 정서와 풍부한 표정을 간과할 생각 또한 없다. 길은 멀어지지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의 눈은 두 개 모두 앞에 붙어 있어서 지나온 길은 보지 못하고 가야 할 길만 시종 본다. 그래서 쭉 뻗은 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 길로는 누군가 다가올 수도 있다. 길은 뱀처럼 앞뒤를 갖지도 넥타이처럼 위아래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길은 나그네에게 주어지면 쉼 없이 밟아야 할 끝없는 궤도가 되고 길섶의 돌에게는 무작정의 기다림을 요구하는 고독의 장소가 된다. ● 길은 평행이며 김영길의 등 뒤로도 얼마든지 뻗어 있다. 그러나 기껏해야 땅거죽에서 일곱 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지평선 위에서 길의 소실점을 갖게 된다. 그렇듯 그의 사진 속 길은 선원근법에 충실한 회화처럼 삼각의 꼭지점을 만들어 엄격한 균제(均齊)의 아름다움마저 제공한다. 그러나 그 소실점이 자아내는 공간의 아뜩함이야말로 대지의 좌표 위에 발을 딛고 선 존재감의 상징으로서 한결 유효한 언어다. ● 오종은의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덕을 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충분한 안개와 자유, 나중에 미소지을 여행의 추억 따위를 뒤범벅하고 있다. 맵시 나는 단편처럼 개운한 그의 사진은 일상의 무게를 벗어난 '무진'을 그립게 만든다. 이주형의 '기억의 풍경-공원'은 이국정서 물씬한 공원이되 언젠가 거닌 듯 낯설지 않은 기시감(旣視感)을 자아낸다. 그것은 현존이되 꿈과 회상의 스틸이며 불명료와 부유(浮游)의 눈으로 지각한 풍경이다. ● 홍일의 사진은 빛의 누적과 멋쩍은 구도로 어스름한 여의도 도로변의 냉랭한 밤공기를 흡입한다. 그의 사진기는 퀭한 눈으로 도심의 야경을 견고히 붙들고 권장하지 않는 화면분할로 권태로움을 과장한다.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도시는 대낮의 소음과 태양의 온기가 박멸된 진공(眞空)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유현민의 길은 프랑스 아를르의 주택가 골목인데 궁금증을 유발한다. 길은 저만치서 꼬부라져 어디로 향했는지 짐작할 수 없다. 현실이라면 당장에 걸어가 확인할 수 있을텐데 사진이라서 궁금하다. 한 뼘의 하늘도 없이 건물 외벽으로만 에워싸인 그 사진 속엔 강아지 한 마리 없다. 하지만 손때 묻은 문짝과 낙서된 벽, 흰 빨래와 키워진 화분은 방금 전 누군가가 집에서 나와 모퉁이를 휙 돌아서 골목을 빠져나갔을 법 한 친화력을 담보한다. 냄새가 나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의 사진에는 밥 짓는 냄새와 아이들 노는 소리가 있다. ●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한가로운 시골마을의 어귀를 보여주는 김남수의 사진은 '없어야 할 건 있고 있을 건 없어 보이는' 중립적 시선의 사진이다. 그의 프레임은 아직 남아 있다는 시골 인심처럼 넉넉하게 긴장을 풀고 있어서 풍경의 졸렬한 구석구석을 주워담는다. 한담을 나누는 촌부들 옆의 쓰레기 뭉치와 뭉게구름을 가르는 고압선까지 전부 다 담는다. ● 여섯 사진가가 정도(正道)를 걸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정도에는 문(門)이 없다는 혹자의 말이 의미로울 리 없다. 그 식상한 말이 철저한 목표지향의 은유이기도 하거니와 그렇지 않더라도 이들은 이동(移動)을 돕는 길의 물리적 효율에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길은 과정이 아니라 응시의 대상이며 사고(思考)의 장소다. 그나마 몇 걸음 물러나 바라보고 있으니 정도라든가 톨게이트의 거래 따위가 대수로울 리 없다. ■ 김승현

Vol.19991102a | On the Road - 사진가는 길에서도 걷지 않는다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