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밤]

공성훈 회화展   2000_0516 ▶︎ 2000_0529

공성훈_개_캔버스에 유채_133.3×162.2cm_1998

갤러리 우덕 서울 서초구 잠원동 28-10번지 한국야쿠르트빌딩 2층 Tel. 02_3449_6071

하나, 주로 개념적인 설치작업을, 특히 요즈음에는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 작업을 해오던 공성훈이 이번에는 회화를, 그것도 오일 페인팅으로 개인전을 연다. ● 그 동안 고정된 매체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을 해온 그이기에 이번에 또 다른 변덕을 부리는 것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 회화매체의 테두리 밖에서 이런저런 재료와 형식을 주물럭거리며 주유(周遊)하는 것과 그림으로서의 그림(공성훈은 96년도의 MANIF전에서 먼지그림을 선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회화로서의 회화라기보다는 그가 벌이는 개념적 게임의 소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으로 이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로 보인다. 왜냐하면 회화라는 장르의 결코 만만치 않은 역사적 두께와 무게가, 축적된 숙련에서 우러나오는 일정한 질(quality)과 더 이상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독창성을 동시에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질과 독창성이라는 신화가 만들어내고/만들어지고 이용하는/이용당하는 제도와 시장에 순응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회화에 접근하는 것에 망설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명제. 그 명제에 따르면 회화는 이미 낡은 경험만을 표현하는 낡은 형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성훈과 같이 회화 밖에서 맴돌던 작가가 새삼 회화를 시작한다는 것은 일종의 개종(改宗)현상이 아닐까? ● 둘, 다음은 위에서 언급한, 회화에 대한 몇 가지 혐의들에 대한 공성훈의 답변이다. ● ①. 당신의 회화가 질과 독창성을 동시에 확보하길 기대하는가? ● 모르겠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독창성이란 게 가능한가요? 당신도 위에서 신화라고 쓰지 않았나요? 질? 그건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 거죠? ● 단지, 제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 지금까지 들었던 회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구전설화처럼 느껴졌어요. 류용문이라는 친구가 사자와 용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에게는 용과 사자 모두 가상의 동물이기도 하고 실재하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거죠. 사자는 지구상에 실제로 살고 있지만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고 용은 허구이지만 사자보다 더 많은 자료들이 그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제가 회화를 흠모하든 폄하하든 어떤 그림을 두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몽유도원도인가요, 아니면 모나리자인가요? 욕심이라면, 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다 보면 캔버스에서 혹시라도 용이든 사자든 기어나오지 않을까 하고 바랐던 것 뿐입니다.● ②. 회화는 제도와 시장에 순응적이지 않은가? ● 뭐는 안 그렇겠습니까.● 팔리는 그림이 얼마나 된다고... 차라리 우리나라에서 회화가 너무도 상업적이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설치나 매체는 안 팔리니까 순응적이 아닌가요? 혹시 제도와 저널에 순응하고 있지는 않나요? 특히 상품문화와 대중문화를 긍정하고 영속화하고 있지는 않나요? 회화든 아니든, 반동적인 미술은 자신보다 우세한 권위에 기대어 그 권위와 경쟁하고 동일화하려는 욕망을 지닌 미술이 아닐까요? ● 이번에 작품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겁니다만, 그림은 사진을 찍으면 손해를 보더라고요. 그전의 설치작업은 사진이 더 그럴 듯 했는데... 그래서 든 생각이, 경험을 물질화시킨 회화가 포터블한 성질 때문에 전유(專有)되기 쉬운 것이라면, 경험이 정보로 변환되는 미술은 자르고 붙이는 등 재단하고 관리하기가 더욱 용이하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 ③. 회화적 형식이 아직도 동시대적 경험을 반영하는 유효한 수단이라고 믿는가? ● 왜 모두 반영만 이야기하죠? 왜 아무도 초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죠? 저는 구석기인이 아니라도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 답변의 말미에 공성훈은 자신의 작업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전의 작업도 그만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림 그리는 일에서 '보푸라기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덧붙인다. 보푸라기? 종이나 헝겊 등의 거죽에서 일어나는 가는 털? 미술이 사고를 물질화시키는 활동의 하나라고 본다면, 회화야말로 사고의 프로세스와 행위의 프로세스(즉 전적으로 사유화된 체험, 코드화되지 않은 체험) 두 프로세스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 하다.

공성훈_여자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00

셋, 공성훈의 그림들은 이전의 슬라이드 작업의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했다. 우선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형태들과 빛에 대한 관심이 그러했고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 분명한 형상들이 매끄럽지 않은 동작들을 보여준다는 점도 그러했다. 그 자신도 이번 그림들을 전시할 화랑의 벽을 가능하면 검은 색으로 칠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 왜 개를 그렸느냐는 질문에 그는 '개를 그리면 개같은 그림이 되지 않느냐'는 농담과 함께 고야의 아쿼틴트 판화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 그림은 빛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거인의 그림이었다. 식육용으로 사육하는 잡종견을 통해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영웅상을 보여주겠다는 웅대한 야망? 그러나 고야의 거인이 운명이 부르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린 것처럼 보이는 반면, 공성훈의 개는 사진기를 든 시커먼 그림자에 반응/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커먼 그림자는 개에 빛을 비추고(shoot), 총을 쏘듯이(shoot) 사진을 찍어댄다(shoot). 개는 화면의 중심에 포착된 움직이는 표적이 되거나 다행히도 겨냥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 밤공기는 낮의 대기보다 투명하지 않다. 단지 어둡기 때문에 그런 것만이 아니라 농도가 짙기 때문이다. 갤(Gel) 또는 콜로이드(Colloid)상태의 진한 설탕물처럼 흘러 다니는 밤공기 속에서 혀를 날름대고 있는 교회 십자가의 빨간 네온, 아파트 창문들, 가로등, 자동차 불빛들은 사라진 표적이 음모에 의한 것은 아니냐고 수군대는 듯하다. ● 넷, '한곳에 정착하여 이것이나 다른 것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로서 자신의 활동에 핵심적이다. 왜냐하면 문화가 우리를 덫에 걸리게 만들고 그래서 감시할 수 있는 정체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름붙이기(naming)와 분류(categorizing)라는 방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필자가 "시각과언어"에서 나온 어떤 책을 읽던 중에 메모해둔 구절인데 책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공성훈의 이번 작업이 이루어낸 성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미루어야 될 것 같다. 초보화가의 데뷔전만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필자가 그에게 감히 부추키는 대로 스스로를 배신하고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가 신형을 표표히 날리는 경공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비척거리는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판가름날 것이기 때문이다. ■ kong38@unitel.co.kr

Vol.20000513a | 공성훈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