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사람들

박은태展   2000_0527 ▶︎ 2000_0601

박은태_노숙자(추워!추워!)_장지에 아크릴채색_170×213cm_2000

초대일시_2000_0527_토요일_05:00pm

서울역 문화관 Tel. 02_3149_3086

전시를 준비하며... 스스로 쓴 작업 후기● 1. 대부분에 작가들이 그러하지만 더구나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작가들은, 문학을 비롯하여 작품의 내용이 과거자신의 성장과정과 무관할 수 없으며 그 자의식부터 끄집어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후 그 자의식의 사회와의 관계설정과 보편화는 그 작가의 작품의 생명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본 그의 삶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자. 전형적인 한촌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성장 후, 70년대 말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노동자 양성 공교육을 받고 유능한 기능인으로(?), 21년 전 그는 꿈에 그리던 서울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상경 후 다니던 공장생활은 상상과는 너무 실망스러웠으며 십수년 선배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 끔찍했다. 그러나 시골의 가족을 위해서는 공장은 다녀야 했고 어떻게든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어 시작한 게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처음 목적은 취미로 시작했지만, 화실을 다니면서 화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당시의 직업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 목표가 당시의 현실도 벗어 날 수 있고 공장 생활보다는 당시 생각으로는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만족감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낙도의 미술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박은태_저무는 강변에서_유채_162×91cm_1995
박은태_비맞는 여자_장지에 아크릴채색_140×171cm_1999

그런 이후, 그는 꽤 오랫동안 그림공부와 공장생활을 오가며 고생 끝에 운좋게도 계급상승의 동아줄인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87년 그때가 어떤 때인가? 그도 그 당시 대부분 학생들 같이 거리와, 그리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이상과 꿈이 씌인 책 사이를 오가며 학교 생활을 보내고 다시 그 꿈의 실천을 위해 미술 운동 조직에 몸담고 활동해왔다, 그가 줄곧 활동했던 노동미술위원회 활동의 주된 사업은 걸개그림 등의 현장 지원 사업과 개인 창작의 소통 구조로써 현장 미술전 등등 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게 활동했으며 지금도 활동선상에 있다. 이 개인전도 그 활동의 연장 연상에서 준비한 것이기에 인사동의 관객하고는 상대적으로 다른 대중과 만남을 위해 서울역을 택한 것이다.

박은태_뒤돌아 앉은 사람_장지에 아크릴채색_250×154cm_1996
박은태_시화호 원주민의 삶_장지에 아크릴_691×49cm_1997
박은태_창원공단에서1_장지에 아크릴채색_149×195cm_1997
박은태_창원공단에서2_유채_153×196cm_1994

문예운동 과정에서 민중에 대한 대상화 문제는 흔히 갈등 관계에 빠지기 쉬운 부분인데, 그에게 있어서는 공장으로 내 몰았을 수밖에 없는 유년시절의 어려운 생활과 이후 감수성 예민할 때 경험한 짧지 않은 공장생활, 그리고 다시 운동으로 연이어 노동자 곁을 맴돌고 있는 근 십년의 지금에 비추어 볼 때 대상에 대한 짝사랑은 아닌 듯 싶다, 그러한 활동들은 자기 정체성에서 출발했었고 그 모색에 과정으로 이어져 왔다. 그는 오히려 줄곧 자기 이야기를 해 왔다고 생각했으며 그 고집은 지나치리 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한 노미위 활동으로 사회운동의 복무와 개인창작 양쪽에 어느정도 만족감과 갖고 활동하다가 전반적인 민중 운동의 침체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가 자신의 현실과의 정서적 거리감의 한계 - 즉 운동의 역학 관계만으로 풀 수 없는 정서적 요인 - 그리고, 작업의 형식적인 관성화 등에서 오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는 그러한 한계의 요인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과거 정서와 멀어짐과 동시에, 흔히 처하게 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만 대상을 그리던 기간이 길어지고 작업 시간부족에서 오는 형식적 한계가 극에 다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이전부터 늘 이러한 한계의 해결책으로 생각했던 현장체험을 결심하고 안산으로 내려가 짧지만 3개월 반쯤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작업도 3년 정도 이전보다 긴 호흡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 발표한 작품의 절반 이상이 안산에서 그 기간 동안에 구상되었음을 그는 의미를 둔다. 그러한 체험을 토대로 한 작품을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평가하고는 무관하게, 일차적으로 창작자가 그 작품을 애착을 갖고 작업을 하려면 작품의 내용이 그리는 작가와 정서적인 유대감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정서의 체득은 몸이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와 같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다소 무거운 것이라면 더욱 심층적이고 정기적인 자기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박은태_출구_장지에 아크릴채색_140×140cm_1997
박은태_휴식_장지에 아크릴채색_170×80cm_1997
박은태_송월 할머니_장지에 아크릴채색_205×134cm_2000

2.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주로 무엇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대부분에 작품에서 엿보인다 - 그 염원이 사람을 통해서든 자연을 통해서든 - 그리고, 그 대상은 항상 너무 열심히 살면서도 위태위태한 나날의 연속과 미래가 그리 보장되지 못한 우리 주변의 초라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유난히 기억에 남아있는 유년시절의 한 그림을 기억하고 있다. 겨울에는 도저히 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골담초 꽃이 매해 봄이면 어김없이 돌담 장독대 옆에 짙노란색으로 피어날 때 그 꽃을 크레파스로 종이가 찢어지게 눌러 그렸던 그림일기가 가끔 생각난다고 한다. 그는 그런 염원으로 이 그림들을 그렸다고 하며, 이 작품들에 대상들이 골담초 꽃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났듯이 반드시 그들도 빛을 보게 되리라는 염원을 갖고 있다.

박은태_깡통 쌓는 사람_장지에 아크릴채색_202×80cm_1997
박은태_광양제철준공기념_장지에 아크릴채색_203×128cm_1988(2000)
박은태_염원4(불멸의 나무)_장지에 아크릴채색_195×111cm_1998

주로 초기 작업인 (창원공단에서1.2)나 (염원1.2).그리고 (저무는 한강변에서),(돌아앉은 사람)은 그의 과거 정서를 매개로한 형상과 민중 운동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 깨닫게된 자본과의 대립구도에서 상대적으로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모습을 종교화적인 형상을 빌어 그들에 대한 죽음을 성스러움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안산생활에서 구상되거나 제작된 (출구)(깡통 쌓는 아저씨)(염원3)(긴휴식)(기념촬영)(노숙자)(고잔뜰에서 바라본 시화공단의 하늘)(염원4)(송월 할머니)(시화호 원주민의 삶)인데, 먼저 (깡통 쌓는 아저씨)와 (긴 휴식)은 그가 안산의 깡통공장에서 느꼈던 소재인데, 당시 공장에서 산재로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의 아슬아슬한 작업모습이고, 그 다음은, 예전에 비해 작업강도가 더욱 높아진 탓에 화장실에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는데 그 순간의 하늘은 왜 그리도 맑고 높아 보이는지? 라는 그의 당시 심정을 그린 것이다. (출구)와 (염원3)은 당시의 해고자와 실직자를 그린 것인데 IMF 상황이전에도 노동자에겐 그 이름만큼 숙명적으로 진행된 일들이다. (염원4)는 이런 전도된 가치관 - 자연으로 상징된 사과나무 - 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그린 것인데, 나중에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을 보다가 고대 인도에서는 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가지가 아래로 뻗친 나무를 성스럽게 여긴다는 구절을 보고는 우연에 일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고잔뜰에서 바라본 시화공단모습)은 장마중의 먹구름 사이를 뚫고 드러나는 일몰의 장쾌함과 그 빛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공단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시화호 원주민의 삶)은 시화호를 막고 공단과 도시를 개발하며 땅이 콘크리트로 둘러 쌓이는 과정은, 그곳에서 사는 원주민만큼 위태위태함을 보여 주고 있다. (송월 할머니)는 그가 그해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홀로 농사를 짓고 사시는 먼 친척 할머니께서 모내기하시려고 새벽 논에 홀로 나가셨다가 손에 모포기 들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농사도 상품이 아니다 싶으면, 벼이삭이 갖 피어나는 논도 갈아업는 세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노숙자)는 서울역 주변의 노숙자들을 관찰하며 그린 것인데, 서울을 꿈꾸었던, 과거 몇십년에 이농민의 의식 속에 이상과 현실로써 서울역은 상징으로 그들의 삶의 좌절과 성공 속에서 항상 돌아가고픈 장소(그리고 옛고향 땅과의 만남)로, 여겨져 같이 형상화 시켰다. 그리고 최근작인 (광양체철준공기념)은 88년 일간지에 광야제철 준공 기념 광고 사진을 변형시켜 그 해 제작된 것인데 그림이 훼손되었고, 또 조금 더 기량이 나은 상태에서 그리고 싶어, 같은 크기로 다시 그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맞는 여자)는 99년 폭우 때 버스차창 밖으로 스쳐간 이미지를 형상화했는데, 그의 그때 심정은 비를 흠뻑 맞고 차배달을 하는 그 여자가 어쩌면 울고 있으리라는 느낌에서 창작의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박은태_고잔뜰에서 바라본 시화공단_장지에 아크릴채색_140×202cm_1999
박은태_염원3_아크릴채색_160×327cm_1996
박은태_기념촬영_요철지에 아크릴채색_95×136cm_1999

이제 그림은 작가의 손을 떠났고, 그림을 읽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형식의 문제는 내용이 규정한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오히려 문제는 작품은 절대적으로 작가의 삶과 연관된다는 것이고, 결국에는 작가가 그런 삶을 살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작품에서 일관된 염원에 문제는 평등에의 염원이다. 예전엔 그 문제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찾았다면 지금은 조금 넓게 사물과 자연 속에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순례의 길에 기꺼이 평생을 바쳐볼 생각이다. ● 끝으로,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동료 선배들과, 주변단체의 동료들, 그리고 또 어려울 때 거처를 마련해주신 수원민예총 식구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 박은태

Vol.20000522a | 박은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