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Analogue展   2000_0602 ▶ 2000_0607

이부록_The Wind of the Sayonara Empire_10:55min. negative, video projector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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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project team '육지_이부록_정재호_윤기언_이종석_박정혁 권오상_김익_김종수_이소영_이도영_용이_장윤석

책임기획 / 황록주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제2전시실 Tel. 02_760_4601

수상하면 신고하자 ● 갑자기 무성해진 것은 수상하다. 하룻밤 사이 일제히 피어난 봄나무의 푸른 잎들은 그래서 수상하다. 수상하다는 것은, 뭔가 변화가 닥쳤다는 것이다. 그 변화로 인해 무작정 겨울이 가버렸다는 게 확실해진다. "이제 더 이상 겨울은 없다. 나는 온 몸으로 봄", 외치는 나무들. 곳곳에서 잎을 피운다. 수상한 계절이 시작되었다. ● 문제는, 잎들이 피어났다고, 그것들이 갑자기 무성해졌다고 우리가 "이제 봄이다"라고 말하기엔 많은 난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잎들이 푸르러도 꽃샘추위가 남아있고, 지난 겨울의 흔적들은 발뒤꿈치를 따라다니고, 목에 두른 목도리는 아직 따뜻하고, 계절 바뀌어도 여전한 나, 그 '나'가 존재한다. 딱 잘라 '봄'이라고 말하기엔 수상한 게 많다. 딱 잘라 '봄'이라고 말하는 것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자연의 변화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 지난해부터 우리 곁엔,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잎을 피워낸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Digital. 그것은 온 몸으로 "이제는 디지털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 또 다른 잎들을 피우고, 새 가지를 뻗고, 수액을 늘린다. 더불어 그늘을 늘린다. 봄나무와 닮았다. 그런데, 이 수상함은 또다시 수상하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져버린 그 나무가, 나는 수상해 미치겠다. 본디 진짜는 진짜라고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 법. 예술은 자신이 예술이라 말하지 않는 법. 가짜는 제 스스로 가짜라고 인정하지 않는 법. 디지털은 제 그늘을 키우면서 자꾸만 저만이 길이요, 진리라고 말한다. ● 디지털을 싸잡아 수상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사실 무리다. 그것은 분명 인간에게는 없는, 혹은 잃어버리거나 퇴화되었을지도 모를 능력들을 실현해 나가면서, 便利(片利)를 가져다주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방법론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는 더군다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 새로운 도구가 나타나, 삶에 침투하고(마치 바이러스처럼), 그로 인해 기존의 양식이 변화한다는 수순이야 괜히 발 걸어 넘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디지털이란 얼마나 확실한 언어인가. 둘 사이에 있는 무수한 점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줄 수 있다는 사실, 0과 1로 모든 것을 환원시켜보겠다는 의지, 놓치는 것 없이 그렇게 명쾌해보고자 하는 노력,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그 무엇도 분명치 않은 세상에 그토록 행복한 결론을 던져주는 그것을 왜 굳이 수상하다고 해야 한단 말인가. ● 이쯤 되면 이제 화두는 거기에 있는 그 녀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 다시 말하면, 의미화 과정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그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과연 우리가 정말 수상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 문제는 인간이다. ●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로 인해 고민하고, 울고 웃는다. 그 새로운 것들을 관리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자율 신경체제를 갖춘 시스템이 되어 간다. 자본주의가 편들어 주는 것은 누구에게나 권력의 형태로 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 구조적 권력에 늘 새로운 것을 올려놓는다. 디지털은 이제 자본주의 권력이 새롭게 숭배하는 연인이 되었다. ● 우리는 이것을 수상하게 여겨야 한다. 디지털은 봄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라났지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수상함'과는 다른 종류의 물음을 제기한다. 전자가 말 그대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오는 한계로서의 수상함, 그리하여 다다를 수 없는 지점으로 온다면, 후자는 우리가 뭔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를 막아서는 수상함으로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디지털이 무성하게 피워 올리는 것은 흙에서 양분과 수분을 얻어 나오는 숭고한 꽃이 아니라, 겉모습만 화려한 조화(造花)다. 바라볼 수조차 없는 진리의 태양이 아니라 아찔하도록 잠시 우리를 마비시키는 권력이다. ● 과연 이 화려한 조화의 숲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수학자인 괴델Kurt G del은 우리가 사용하는 수학 시스템에 오류가 없다는 사실, 자기 자신이 분명히 옳다는 사실을 그 시스템 자체가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라깡Jacques Lacan은 이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는 여기서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다른 점, 즉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말한 원초적 소외로부터의 분리가 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 생태학자인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인간의 역사는 도구 발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도구가 인간에 의해 통제 불능한 상태에 놓이면 인간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통제 불능의 도구가 핵무기(이것이 디지털 기술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는 사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명하다. 모두가 함께 살아 남기 위하여 통제 불능의 도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 것 역시 당연시되는 결과일 것이다. ● 짤막히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인간만이 지닌 가장 인간다운 능력, 즉 '윤리'라는 것을 (낮은 목소리로)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라깡이 말하는 반성도, 한스 요나스가 말하는 통제 능력도 실은 이 윤리에 다름 아니다. 디지털은 근래 인간에 의해 모종의 (너무나도 매혹적인) 권력을 부여받고 자라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디지털은 이 시대의 피고가 아니다. 피고는 언제나 인간일 뿐. 디지털을 큰 목소리로 '디지털이다'라고 외치게 하는 인간일 뿐. ● 무엇인가를 단정짓고 확언하고자 하는 것은 유혹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다른 것들을 살해함으로써만 태어날 수 있기에, 그저 기쁘게 받아들이기에는 늘 찜찜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이 전시는 속단하거나 단정짓지 않으면서 낮으막히 명쾌한 것에 대해 말한다. 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음이라는 명쾌함을 그대로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진정한 명쾌함을 가장한 속단과 확언들을 막아서야 한다. 혹여 그 반대급부로서의 아날로그를 도리어 소리 높여 외치지도 말아야 한다. 부디 이 말들이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윤리에 가깝기를 바라면서. ● 그래, 이제 수상하면 신고하자. 신고하러 관공서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에게 모든 수상한 것들을, 진리를 가장한 그것들을, 지나친 확언으로 오는 그것들을, 나를 잠식할 지도 모르는 그 유혹의 말들을... ● 황록주

Vol.20000527a | 아날로그 Analogue展

@ 통의동 보안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