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가다

책임기획_김학량   2000_0519 ▶︎ 2000_0530

박진화_푸른 사람들 풍경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1999

참여작가 신옥주_박진화_박진호_김호득

서남미술전시관(폐관) Tel. 02_3770_3870/3

다가가다 ● 이 전시는 내가 기왕에 기획한 反-풍경 (동아갤러리, 1996. 12), 바람을 쐬다 (원서갤러리, 1999. 8)를 잇는 연속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뒤엣 것에 대해서는 개념적 연속성을 지닌다. 풍경을 억압하는 일시점 투시 원근법적 의미 발생 구조를 서서히 풀어헤쳐 가면서, 종내 풍경적 재현주의라고 할 만한, 또 풍경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만한 시선과 의미의 그물 자체를 무화시키고 싶은 꿈을 꾼다. 풍경의 형이상학이란, 거칠게 말하여, 주체 자아와 대상 타자 사이에 존재론적'거리'를 전제하고서 세상에 대드는 그 모든 태도를 두고 이르는데, 그런 태도는 급기야 세상에다가 아주 모뉴멘탈하고 신화적이며 고급스럽고 우아한 억압적 의미(대개는 작가 자신도 모르는)를 들이밀려는 욕심을 가꿀 수 밖에 없게 되거나, 세상을 늘 어떻게든 조종해야 하는 물건으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전시에서는 작가와 세상 사이에 어떤 양상으로든 숨어있게 마련인 그 거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좁히든가, 차라리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작가가 세상을 향하여 시선을 던지고 해석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나를 들여다보고 또 내 몸을 덮쳐 오더라는, 그리하여 졸지에 受動的 존재의 노릇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그런 역설적 느낌을 다루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인제는 나와 세상이 속을 비우고 허허롭게 살을 부비기. 거의 아무 저의 없이···. ● 하여 이번에는 사람의 시력이 허여하는 가시거리 안에서는 물상의 정체를 넉넉하게 통관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반성을 껴안고 있다. 그러니까 가시거리 내에서 세상을 어떻게 독해하고 재현할 것인가 하는 자문에 애를 태우다, 어느 순간 멈칫, 물러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간 버려 두었던 소리나 냄새, 촉감 같은 데까지 감각의 층위를 넓혀가는 方案이 있음을 눈치챘다는 것. 여기 참여한 작업들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보면 극히 미시적이거나 지독하게 거시적이다. 보기가 아니라 더듬기. ① ● 잠정적으로 아우르자면, 오늘 우리의 작업들은 그 무엇보다, 슬그머니 세상에 潛入하는 작가의 태도 그 자체가 녹녹히 배어있는, 그럴수록 形을 잊어가려는 묘한 내면의 자취로서 세상에 겨우 寄生할 것이라는 점. 그것이 우리 눈에는 아주 지루하거나 건조하고 재미없으며 무미한 무엇으로 비치기도 십상일 터이나, 그것조차 이미 의미의 정치판을 떠난 자의 고약한 숙명이라 할 수 밖에. ● ① 그것은 미술이라기보다 修行이라 할 무엇. 미술 이전의 어떤 수행, 미술의 한 조건으로서 자신의 육신과 넋에게 바치는 어떤 誠心. 그저 無心한 行이거나 佛家의 冬安居라든지, 生에 대한 방편적 息이라 할 수도···. ● 박진화 그림의 경우, 발생 모태를 더듬자면 80년대'민중미술'이 지녔던 의식의 맥락에 가 닿는데, 지금 그 인연의 줄기는 서사적 背景으로서 출몰하기는 하지만, 지금 그의 그림을 더듬는 화두로 삼지는 않겠다. 나에게 그의 그림은 줄곧 어떤 鎭魂이다―그것은 굿이며 노래이고 춤(그러므로 다시 그의 그림은 모태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의 그림이 주는 시각적 인상은 아득하다. 아득하다는 것은, 거칠게 단속적으로 캔버스를 바투 비비고 다니는 붓질의 흔적이, 그 격렬함으로 말미암아 강렬하게 화면을 현전시키는 쪽과는 정반대로, 도리어, 黎明의 저 섬뜩한 푸른빛에 힘입어 오히려 물상의 풍광을 아득한 가시계 바깥이라든가, 혹은 누구든 간직하고 있을 가슴 속 상처 깊숙이 끌고 들어 그곳에 파묻히게 하더라는 말이다. 여명이 섬뜩하다는 것은, 물상의 외양을 묻어두던 밤의 권력에 대한 혐오 혹은 공포라든가, 어둠 끝에 터오는 낮의 세계가 단박 희망과는 결코 연관되지 못하리라는 경험적 예감 같은, 그런, 여명 자체가, 은근하지만 매우 질긴 부랑의 이미지와 관련된다는 데서 나타나는 감수성이다. 그러므로 박진화의 푸른 풍경은 古今을 하염없이 漂浪할 만큼 깊으며, 東西를 무던히도 去來할 만큼 아득하다. 그윽하고 아득하였다. 박진화의 그림이 하나의 육신으로서 나의 넋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만큼 그윽하고 아득한'품'을 지녀서일 터이다. 그 품은 따스하고 넉넉하여 生의 계기를 틔우는 그런 무엇인 듯도 하지만, 불현듯 엄습하는 회한에, 온 육신과 넋을 떨며 망연자실할 그런 息의 자리라면 어떨까. 그러니 그의 붓질과 색채는 외연적 기능에 거하지 아니하였다. 얼핏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남기는 그의 붓질이니 색채 들은 形에 포섭되지 않는 無常함을 머금어서 이내 세상에 대한 주체적 재현을 超越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줄곧 내게는 鎭魂이었던 것(이 진혼은 남의 상처에 대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의 內傷에 대한 것일 터). 박진화가 퍽 오래전부터 곱씹어 오는'忘形'이라는 것도 이 鎭이나 超와 한 궤를 타고 있었던 것. 그러니 꼭 그만큼, 그의 붓질이니 색채 들은 무엇을 그리는 동시에 지우는 노릇을 덤덤하게(?) 행하고 있었던 것. 고약한 팔자, 그리기가 곧 지우기라니···② ● ② 물론 이는 그림 일반에 대한 추상적 해명으로서 어엿한 값을 가지지만, 사실상 우리 화가들은 그리기 쪽 아니면 지우기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삶에 대한 긴장이 실팍하지도 않은데 과도하게 세상에 대한 괄호치기를 범하거나 현상학적 부재 결핍을 또 짐짓 숭앙하며 젠체하는 이도 적지 않다.

박진호_노이로제 Neurose_작가의 몸을 복사한 뒤 다시 사진촬영_180×120cm_1997

사진은 어떠한가. 박진호는 자기 몸을 복사기에 들이대어 복사한 다음, 그 복사 이미지를 1:1이나 1:2 정도의 배율로 접사촬영하고, 그것을 180×120cm 정도로 확대 인화한다― "복사되고 극도로 클로즈업되고 크게 확대된 나의'몸'은 더 이상'육체'의 물질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로테스크한 추상이 된다"(그의 작업노트). 어떤 측면에서 사진 자체가 그러하듯 그의 이미지는 그의 말대로 "동결이고, 박제이며, 화석이고, 미라"이다. 피사계 심도가 매우 얕은 카메라라고 할 수 있는 복사기는 자신의 애꾸눈으로 강렬한 빛을 쏘면서 그의 몸을 매우 정직하게 훑지만, 결국 복사기의 눈은 박진호의 몸을 흑/백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미지로 재편한다. 복사기의 초점범위를 벗어난 곳은 막막한 암흑 속으로 묻히며, 복사기 유리면에 밀착한 부분 역시 과도한 근접성 때문에 초점범위를 벗어나 막막한 하얀색으로 흩어진다. 결국 까맣게 묻힌 곳이나 하얗게 날아간 곳이나 박진호 육신의 실존을 증명하지 못하고 휘발해 버린 여백의 공간이 된다―깊이가 소외된 실존···. 깊이의 영역을 포괄적으로 헤아리게 해주는 중간톤을 배제해 버림으로써 그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이의 幻影을 박탈한다―바로 여기 있거나, 없다; 있음/없음, 흑/백, 원/근. ● 사람의 감각은 그 쌍들 사이의 결들을 通覺할 줄 알아, 멀리 있어도 오히려 밝히 알 수 있고 가까이 있어도 도리어 어두울 수 있는, 그런 逆動과 모순의 감각을 지니며, 그리하여 상상이라는 어떤, 의미의 환영주의를 버릇으로 지닌다. 따라서 사람의 감각이 생산하는 의미는 이미 정치인데, 복사기는 그러한 정치의 세계를 아지 못하며, 그러한 측면에서 그 기계는 솔직하다―깊이를 더듬을 수 없는, 정치를 결여한 정직한 눈과 감각.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모순을 정직하게 드러내기도 하는 것. ● 따라서 박진호는 오히려, 밀착된 평면에만 주목하여 굴곡은 간과하거나 배제하는 그 기계의 흑백 이원론을 통하여 비로소 자기 몸의 굴곡을 명쾌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하여 자신에게 다가갔던 것은 아닐까. 시선(혹은 視野)이 절망할 때 육신의 通覺이 온전하게 작동한다. 시선은 大路를 성급하게 종횡하며 아이덴티티를 구하지만, 온전한 육신은 시선의 그늘을 暗行하며 세상을 더듬는다. 그렇게 더디게 물상에 다가간다.

신옥주_지혜의 문_철판_1996~2000

조각이 환영적인, 의미의 모뉴멘탈리티를 돌보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신옥주의 조각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마치 그림 같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허공에 그린 그림이었다. 線이 아니라, 劃, 드로잉···. 그것은 평면-회화적 선이라기보다, 공기의 흐름을 따라 공간을 헤엄치는 것. 그다지도 어눌하게, 머뭇머뭇하며 허공을 潛行하는 것이었다.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이 조각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신옥주의 조각은 육체적 모뉴멘탈리티라든가 의미의 정치를 가지고 공간을 휘두르거나 표현주의적 飛行을 감행할 줄을 몰랐다. 그것은 거의 우연에 가깝고 무차별적이며, 비결정적인 획과 리듬으로 은근히 대기를 호흡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옥주의 조각은 볼 만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획을 더듬는 것이어야 한다. 눈을 지그시 감고, 더듬는다―우둘투둘, 절단된 표면, 미세한 굴곡과 각도, 어눌한 흐름···. 눈을 지그시 감고 더듬을 때, 저 모던한 회화적 조각은 삼라만상을 여행한다. 그곳은 세상 바깥인 듯했지만, 온 세상을 그 안에 머금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각은 空間, 빈-사이. 혹은 빈-사이에 관한 것. ③ ● ③ 시와 같은 것일까, 그것은. 그는 이렇게 쪽지를 보내왔다― "문이 없다. / 울타리도 / 벽도 없다. / 안과 밖이 없으니 / 입구도 출구도 없다. // 그런데 우리는 / 문을 / 만들고자 한다." ···시랄 수 있지만, 그러다 그의 획은 춤일지도, 노래일지도, 유장하게 흐르는 그저 어떤 가락일지도···.

김호득_흔들림, 문득_한지에 수묵_138×199cm_2000

꽤 널찍한 작업장 바닥에 넓다란 한지를 펴고 깔고 앉아 적당한 크기의 붓을 가지고 툭 툭 툭 툭 툭 ···, 왼손으로 붓질을 해 간다. 나는 붓질의 의미가 아니라 붓질의 質을 보았다. 그림을 응시하는 나의 눈을 흥분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고 물으니까 김호득은 이렇게 말한다: "막막해서···." 무심하게 되풀이되는 붓질이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러면서도 그가 형이상학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자기고백인 셈. 자칫 모든 그림은 종내 이러저러한 선이니 점이니 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고, 급기야 그 선이며 점들이 우주 삼라만상이 운신하는 이치까지 내함한다고'道士들'이 떠들었으니, 그것을 곧장 김호득의 오늘 그림들에 갖다 붙이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가 붓질을 行하는 사이사이(間)에는 숱한 物象의 기미가 슬쩍슬쩍 스며있다고 나는 錯覺한다. 나의 착각이 그르지 않음은 그 모든 인간사의 事象들이 사실상 저마다 하나의 점이요 획이며 그 점 획들은 또 저마다 하나의 어떤 行이어서 의미는 그 행 자체에서보다 행들의 사이(間)에서 슬그머니 배어남을 우리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떤 깨달음을 그가 자신의 붓질에 각인하였다면 그것은 농간이었을테지만, 그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다. 의미의 向背를 파악하는 것이 언어와 마찬가지로 미술의 無常함을 과히 농간하는 짓이라 여기고서 그림에 대하여 詩로 응수하던 전통이 동서고금에 퍼져 있었음을 눈치챈다면, 김호득의 흔들림은 그제서는 문득 그림으로 둔갑하기도 할 것이다. ● 붓질이 그득한 화면과는 달리 빈-무한한 종이에 몇 개의 스트록만 스친 화면의 경우, 그것은 어떤 멈춤. 그리고 싶은 욕심을 멈추는 것. 그 사이에 온갖 설레임, 조마조마함, 아득함, 막막함 들이 교차하고, 그러는 동안 그 빈-사이엔 온갖 그림들이 그려졌다가는 지워지고 지워졌다가는 다시 그려지고···. 그리기가 곧 지우기와 다르지 않다는 지독한 可逆과 逆動. 그러므로 여백 역시 어엿한 그림이며, 여백이 표상하는 無爲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지독한 有爲이기도 한 것. 다가간다는 것은 곧 떠난다는 것. ● 그리하여, 나는 김호득의 그림을 갓난 아기의 최초의 옹알이라든가, 길 가다 흘리는 흥얼거림이라든가, 바람결이며 새소리에 무심코 화답하는 느릿한 춤이라든가 무심한 눈길, 그런 정도로 감상할 것이다. ● 오늘 우리의 다가감은 어떠한 否定(떠남)의 내색인 동시에, 誠을 향하는 절실한 기원이기도 하다. 그것은 我를 확정하고자 하는 꾀가 아니라 我를 한없이 흩어지게 함으로써 가뭇한 그림자 속에서 꿈꾸는 일이었다. 주변들을 收拾하여 폐쇄적 중심을 가설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를 한없이 풀어놓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超越일 것인데, 초월은 떠남이 아니라, 因緣을 통해 남에게 건너감으로써 나를 풀고 세상을 헤엄치는 일이었다. 초월은 그렇게 하고서야 나에게 돌아오는 어떤 길이었던 것. 그러므로 우리의 다가감은 떠남과 다르지 않으며, 이 둘은 또한 공간적 위상의 이동과 관련되기보다, 우리 육신과 넋의 시간적 修行에 관한 하나의 修辭일 가능성이 높다. ■ 김학량

Vol.20000529a | 다가가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