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혼자 돌아온 사람들" ● 97년부터 99년 말까지 경기도에 있는 한 양로원에서 50여명 남짓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삶과 죽음을 카메라에 담았다. 파인더를 통해 그분들의 모습, 백 마디의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삶의 흔적이 배인 얼굴들을 보았다. ● 그분들의 방에서 밥도 같이 먹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가까운 곳에서 지내면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사랑, 인간적이라는 것, 힘겨운 노동,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내가 그 명제들을 그리도 갈구하듯이 그분들의 지난 세월도 그것들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양로원에서 내가 만난 이들은 70여 년의 세월 끝에 '혼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나의 카메라가 처음 그분들을 향했을 때에는, 그 명제들의 허무함이랄지,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고 가난이거나 외로움으로 억압하는 그것에 바쳐지는 인간의 노력과 세월이 억울하여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까지 거칠게 분노하기도 했었다. ● 그러나, 아니었다. 사진 찍으며 이야기하고 친해지고, 또 그분들 중 여남은 명은 병들어 숨을 거두어 한줌의 재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은 바뀌었다. 어찌 보면 바뀐 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 그분들의 양로원에서의 낮과 밤은 여느때와 똑같았고 바깥 세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에서도 사람 살아가는 즐거움, 기쁨, 슬픔, 외로움들은 다 있었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면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지만 자의든 타의든 (늙어 가는 것, 죽어 가는 것, 버려지는 것이 타의라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 (또는 죽어 가는 것) 이 그분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유일까? ● 양로원에서 본 것은, '세상'에서 '사람'이 이리저리 부대끼며 온갖 사연을 품고 '살아가다'가 가족으로부터 또는 돈이나 세상의 소유의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혼자 돌아온 사람들'이 되어 양로원에서 비슷비슷한 모습으로들 만나 죽음을 향해 가는, 또는 세상 모든 인연이나 소유에서 벗어나거나 버려져서 자기 자신만의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그 무엇으로부터도 '억압받거나 소외되지 않는 좋은 세상'으로 향해 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죽음 이전의 그들의 모습 언뜻언뜻 에서는 쓸쓸하거나 비참하기는커녕 그러한 좋은 세상의 표정일 것만 같은 것이 보였다. 그 세상의 표정은 우선 무엇보다도 평화로웠다. 아름다웠다. 무엇을 가지기 위해, 누리기 위해, 누군가를 어찌해 보기 위해 괴로워하는 집착이 없었으므로 더없이 외로와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진실,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것과 갈등을 일으키는 '세상'의 질서에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격리된 그 모습은 '해탈과 무소유'를 닮았다. 그것은 자아로 돌아가는 행로로 보였다. ● 왜 사람은 고통스런 소외 끝에야 그 과정을 거치고 죽음 앞에서야 해탈하여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시점이 되면 대개 치매에 걸리거나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 시간이 좀더 일찍 왔으면 한다. 자아로 돌아가는 행로에 소외와 늙음과 포기와 죽음을 앞세우기보다는 좀더 일찍, 마음과 몸의 건강을 가지고 있을 때에, '세상의 질서'와 '자아'의 갈등 앞에 치열하게 자신의 뜻대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 돈이라면, 가족이라면, 사회라면, 이데올로기라면, 그것들로부터 버려지기보다는 그것들을 바꾸기를. 아니면 버리기를. 아니면 그 억압 자체와 싸우느라 삶을 소진하기를. 그 시간이 좀더 일찍 왔더라면 '혼자 돌아온 사람들'의 모습은 외로움보다는 자유를 닮아있을 것이다. ● " 죽어가고 있을 때는, 사람은 모두 다 같다. 우리 모두 태어날 때 똑같이 시작하고 똑같이 끝난다. 갓 태어난 아기나, 죽어 가는 노인이나 누군가가 돌봐주어야만 올바로 살 수도 있고, 올바로 죽어갈 수도 있다. 아기 때나 죽을 때 이외에도 그 중간 시기에도 사실 우린 누군가가 필요하다. "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중에서 - ● '그 중간시기' 에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그 한 사람에게 조건없는 사랑, 나눔, 인간성의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여된 우리네 삶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양로원으로, 아니 양로원 담장 밖에서도 "혼자 돌아온 사람들' 이 되어 혼자 돌아간다. ● 암등 아래 현상액 속으로 떠오르는 인화지 상을 보면서 처음으로 세상과 나의 솔직한 의사소통의 경로를 만나 그것을 통해 나도 세상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인화지 속의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알고 있고 나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기쁨과, 내 사적인 일상에서의 존재의 외로움을 확인하는 슬픔을 느꼈다. 암실에서 작업하다가 문 밖으로 나와 멀리 건너편 아파트의 환한 거실 불빛을 보곤 했다. 몇 년 전 그 불빛은 물질과 명예를 소유하는 것, 진실과 본질에 대한 위선적이고 나태한 외면으로 모래성같은 존재 양식을 유지해 가는 삶에 대한 고통과 미움이었다가 이제 그 미움은 깨끗이 원점으로 돌아가 원인 무효가 되고 대신 내 가슴에 빼낼 수 없는 슬픔의 대못도 따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사랑, 모성애 같은 것들은 버릴 수 없는 것이지만, 비인간적인 것, 사람이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 물질이나 명예, 형식을 인간의 숭고한 진실보다 더 비싸게 치고, 진실을 찾는 방황이나 혼란은 그 비경제성과 비도덕성(때로는 세상의 룰을 어긴다는 이유로) 으로 인해 하등에 메리트가 없는 무가치한 패배자의 정서로 보는 세태에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동화되어 가는 내 주변 인간들의 삶에 나는 절대로, 절대로 동참하기 싫었다. 한데 어우러져 어찌어찌 살다보면 맛좋고 달콤한 안정을 향유하며 무뎌져 가겠지만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대가로 혹독한 슬픔의 대못을 안고(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살지만, 이 세상에 괴로운 댓가 없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운명으로 생각한다. 세상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무겁고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을 감사히,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 1997년부터 약 2년간 양로원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기간 동안은 나 개인적으로는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부터 가장 큰 괴로움과 슬픔까지 겪으면서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억압과 양면성을 벗어 던지려 애썼던 파괴와 방황의 시기였고, 그 후에 주로 인화 작업을 해온 현재까지의 기간은 삶의 새로운 모습들을 경험하면서 좀더 진지하게 나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시기이다. 그 속에서 내 최선의 노력으로 사진을 책으로 정리하고 전시회를 하게되었다. 명호에게 이 책으로 나의 가장 큰 사랑을 전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내 모습에 당당하게 열심히 살리라는, 나로선 힘들고 어려운 다짐을 한다. 항상 노력보다는 포기가 쉬운 법이다. 그리고 사진에 등장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평화로운 삶과 죽음을 기원한다. 나를 알고 아껴주신 분, 그리고 나를 몰라 비난할 수도 있었을 다른 분들께 내 마음을 사진을 통해 가감없이 읽어주길 부탁한다. ■ 전승아
Vol.20000609a | 전승아展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