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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풍경을 보는가?―김영길의 사진을 보면서 던지는 질문풍경사진이 한번도 인간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풍경사진은 인간이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시각적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풍경사진에는 인간이 이 세계를 엮어내는 가치의 범주들이 다 끌려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자연의 순결성, 처녀성, 탐험, 여행, 관광, 여가, 숭고미, 신앙심, 외경심 등이 우리로 하여금 풍경사진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요소들인데, 이것들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내일의 노동을 위한 여가와 휴식을 필요로 하게 되고, 더 많은 자원을 위해 미지의 땅을 탐구해야 하고, 도시적, 속세적 삶의 반대급부로서 외경심과 신앙심을 가질 만 한 신성한 땅에 대한 갈망 때문에 대자연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의 문명사적 맥락 속에서 생겨나고 강화되는 것들이다. ● 풍경사진에 또 한가지 요소가 결부된다. 그것은 풍경과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기는 적절치 않지만, 풍경은 진공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숙련되고 개별적으로 습관화된 눈에 익숙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법이기 때문에, 저것이 누구의 풍경이냐가 중요한 요소로 대두된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다. 즉 한마디로, 나와 관계 있는 풍경이라고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선이 화성에서 찍어보낸 사진을 생각하면 된다. 화성은 우리가 사는 곳과 문화적, 역사적으로―사람이 만든 화성에 대한 문화, 역사 말고 화성 자체가 만든 문화와 역사. 만일 그런게 있다면―다른 곳이기 때문에, 미 항공우주국의 과학자들 이외에는 화성을 자신과 상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의 많은 학교, 사무실, 식당, 여관에 걸려 있는 백두산 사진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백두산 사진은 단순히 심미적인 이유만으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진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애국심'이라는 것이 풍경사진과 우리를 묶는 정체성의 끈이다. 만일 그런게 있다면. 따라서 풍경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내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나 자신의 문제를 찍는 것이다. ● 김영길이 찍은 흙더미 사진도 이런 문제들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사실 그가 사진 찍은 것을 흙더미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사진 속에 나오는 것은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라 히말라야 산을 닮은 어떤 지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을 아기와 아줌마라고 부르면 적절치 못한 것이 되듯이, 김영길의 사진이 단순한 흙더미를 보여주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진 속의 대상을 인지하는 일상적인 지평을 흐트려 놓아, 좀 더 다차원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진을 보자는 제안이다. 전에 김영길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평택 부근의 풍경사진을 찍어서 "아버지의 땅"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사진들은 단순히 자신의 성장기의 배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과 아주 먼 것에 잇는 것을 한 화면에 넣어서 극단적인 원근감의 차이를 나타내는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이 사진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일상적인 시지각의 지평을 흐트려 놓는 것이었다. ● 그런 점에서 보면 김영길의 사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가짜 풍경이다. 실제로 찍은 것은 공사장 부근에 쌓아놓은 흙더미나 자갈더미이지만 카메라의 요술 덕분에 기껏해야 높이가 수십미터 밖에 안 되는 흙더미가 마치 수천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처럼 보이는 것이다. 결국 눈속임인 것이다. 자연과 풍경에 대해서 근엄한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는데 단단히 길들여져 있는 우리로서는 흙더미를 찍을 때 그 표면적인 기표만 모방해도 히말라야라는 대자연의 외관으로서 우리의 눈을 속이기에 남음이 없다. 이런 사진들에는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인식할 수 있게 해줄 만한 아무런 지표가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추상화된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그 외관과는 반대로, 내가 나의 땅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땅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져 준다.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땅인데 왜 히말라야 같이 보이느냐는 물음은,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 하는데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던져 준다. ● 또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김영길 자신의 삶의 진정성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사진이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원주를 중심으로 한 강 유역의 풍경이다. 이 사진들에서는 땅과 나무 등이 이루는 경치들이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나와 있다. 우리는 이런 사진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아, 여기는 땅이구나, 이것은 나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사실은 위의 사진들만큼이나 비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사진의 기본적인 속성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 사이에 강력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물을 이리저리 만지고 조작할 수 있지만, 사진에 찍히는 순간의 사물은 우리 손으로 조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진 찍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종류의 조우(encounter)이다. 그것은 천생연분에 비견될 수 있는 종류의 조우이다. 더군다나,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기계의 조작을 통해 대상을 시각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지만, 대상은 그런 통제를 벗어나서, 아니면 통제를 거부하고 끝끝내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므로, 사진가와 대상 사이에 이루어지는 조우는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사진의 흥미가 생기는 것이다. 사진가가 대상의 거의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사진을 만들어내는 광고사진의 이미지가 별로 재미가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런 조우에 의례히 개입하게 마련인 우연성이 끼어 들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반면에, 김영길이 사진 찍은 풍경에는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우연히 끼어 들고 있는가? 그런데 필연성이 먼저고 우연성이 나중이라면 모르겠는데, 그것은 서양의 합리주의적 문명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이고, 그 반대가 사실이라면 어떨까? 즉 우리가 그의 사진을 보면서 이게 히말라야 같고 이게 고향 같다고 인지하는 것은 그런 우연성의 가장자리에서 펼치는 아슬아슬한 게임이라면? 인지의 확실성 저편에, 빙산의 일각 같은 그 확실성을 밑에서 받치고 있는 우연성이 정말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라면? 우리 인간은 그 때는 그저 얌전히 우연성을 따라야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 이영준
Vol.20000612a | 김영길展 / KIMYOUNGKIL / 金榮吉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