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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0_0617_토요일_03:00pm
서남미술전시관(폐관) Tel. 02_3770-3870
원래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것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지'는 늘 죽음과 함께 한다. '이미지'의 초기에는 존재를 기리기 위한 도구로 기능했었지만 때로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독립되어 '이미지' 그 자체로 보여지기도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시기적時期的 주술呪術이 필요할 것이다. ● 세월이 흘러 원래 무덤의 주인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지만 무덤에 함께 매장되었던 '이미지'들은 시간을 응고시키며 당시의 영예를 붙잡으려 한다. 그 응고된 시간이 무덤의 주인과 확연히 분리되면서 '이미지'는 다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과거에는 단순히 부장품으로 제작되었던 부차적인 것들이 이제는 당당히 자신만의 힘을 과시하며 어두운 진혼곡에서 벗어나 전혀 색다른 주문을 읊조리곤 하는 것이다. 죽음을 이겨낸 이미지들 ● 주술의 시기를 벗어난 '이미지'들은 묘한 시간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단순한 역사 또는 기록의 차원을 너머 꼭 과거와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이미지' 스스로 발휘하는 힘들이 있다. 결국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지는 시간의 구분과 상관없이 통시적通時的으로 공유共有되는 인간人間의 이상理想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이상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의 벽을 함께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미지'는 모든 인간의 공동자산共同資産으로 축적蓄積될 것이다. ● 과거 어느 지점으로부터 출발하였던 간에 현재에도 유효한 '이미지'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최초에 인간들을 매료魅了시켰던 주술이 그 어떤 초월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 힘은 인간의 상상력想像力에 의존한다. 직접 겪었던 과거가 아니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힘들이 주술을 돕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인간의 이상과 관련된 주술과 상상의 문제이다. 역사歷史 또는 과거過去로부터 벗어나기 ● 거칠게 깎여진 나무토막에 우주를 의미하는 오방색五方色을 칠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과거 강용면의 인물 조각품(대부분「역사원년歷史元年」이라는 제목이 붙는다.)들은 전통傳統이라는 과거의 굴레를 그대로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그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둔탁함만큼이나 과거 또는 역사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여러 사연들이 몸에 잔뜩 붙어있다. 이 군더더기들은 마치 오래된 신앙信仰의 징표徵表럼 우리의 과거를 계속해서 돌이키게 만든다. ● 모니터가 출력해내는 현란한 네온색에 비하면 강용면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오방색은 다소 원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강용면의 오방색은 형광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모니터에서 볼 수 있는 기호화되고 표준화된 플라스틱 채색이 아니라 적당히 안료를 개어서 거칠은 나무에 정성 들여 칠하는 강용면의 채색법은 계산된 매끈함이라기 보다는 어눌한 요란함이다. 그리고 간혹 애써 깎아 논 덩어리를 둘러싸는 보색의 드로잉 선들 또한 음양陰陽 또는 상극相剋의 의미가 더해져 후미진 곳들에도 힘을 주고 때로는 생경할 정도로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 양量에 색色을 더하는 것이 조각가에게 그리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강용면의 색 입히기는 화가들보다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화가들에게 바탕이라는 것은 이미 잘 다져진 상태를 의미하지만 조각가 강용면의 바탕은 아직도 상당히 거칠고 생경한 공간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자우튼 「역사원년」 연작들에서 강용면이 잡고자 했던 것은 단절된 우리의 전통과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삶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였다. 아마도 이 둘을 다 잡겠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욕심인지를 강용면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쉽게 미련은 떨쳐버리기는 어려운 법. 그래서 강용면은 과거로부터 출발하는 딱딱한 전통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호출呼出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시각 이미지 생산자로서 강용면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이지 과거가 아닌 까닭이다.
떠나는 것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들 ● 애써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떠나보내야 할 필요야 없겠지만 시효時效가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추장스럽게 버티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방치放置한다는 것은 확실히 편치 않은 일이다. 강용면의 이번 전시에서 새로이 시도되는 설치작품들은 이런 묘한 시대감성時代感性의 교차交差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언젠가는 잊혀질 고리타분한 것들을 굳이 다시 살려내어 되새기고 낯설은 것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무언가 배울 것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넉자로된 고사성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온고지신 또한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막상 실천實踐하기에는 버거운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 강용면의 이번 작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조왕신의 누우런 밥그릇이다. 놋으로 만들어진 이 그릇에는 앞으로 닥칠 일들을 대비한 한끼의 밥이 담겨진다. 식사를 하지 않고 불시에 찾아올 어떤 손님들을 위해 끼니때마다 밥이 지어지면 솥에서 제일 먼저 이 그릇에 밥이 담겨지고, 곧바로 조왕신에게 바쳐졌다. 막연하지만 머지 않은 앞날에 누군가에게 기운이 될 수 있는 따스한 정성을 미리 부엌 한켠에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전시를 앞두고 강용면은 주물鑄物로 뜬 커다란 조왕신의 놋그릇 두개를 제작했다. 그리고 수백개의 작은 놋그릇을 준비했다. 그 놋그릇에 구수한 내음과 함께 김이 모락 오르는 뜨근한 정성들이 채워진다. 커다란 놋그릇 하나에는 상여喪輿를 장식하는데 쓰이는 노오란 상여꽃들이 채워졌으며, 다른 쪽에는 십장생十長生을 비롯한 생명을 의미하는 알록달록한 동식물들이 그득히 담겨졌다. 알록달록한 것들은 이미 강용면의 「온고지신」 연작에서 보여졌던 샤먼이즘 또는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한 도상들이다. 하나하나의 도상들에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담겨지며 좀더 안락한 삶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반면에 노오란 상여꽃은 민족특유의 애상哀想 또는 덧없음을 보여준다. 꽃상여라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죽은자 보다는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오히려 죽음보다는 살아있는 자들의 아름다운 살림들이 더 크게 읽혀진다. 이는 죽음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가 오히려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데 쓰여지고 있는 실례이기도 하다. ● 장엄한 죽음을 기리는 상여꽃과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밥그릇의 만남. 그리고 거기에 시간時間이 함께 흐르고 있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홀로 독불장군처럼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이야기들이 이번 강용면의 전시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조각과 회화, 전통과 현대, 죽음과 삶, 가짐과 베풂 등 몇 갈래 코드로 이번 작품들을 읽어 낼 수 있다. 시간時間에 대한 반성反省 ● '이미지'라는 것이 워낙 떠도는 것들이라 노출露出시간이 길어지면 십상해지거나 낡을 가능성이 있다. 노출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파장력이 커질 수도 있지만 그 우발적偶發的인 상황狀況들을 '이미지'가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할 경우 오히려 원래의 의미가 희석稀釋되거나 훼손毁損되기 십상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아직도 그나마 전통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 의미로 되살리려는 것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왜곡歪曲 또는 소멸消滅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영상시대 '이미지'의 포화상태 속에서 과거 '이미지'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 과거의 맥락을 벗어나 변형變形되면서 창출해내는 또 다른 상상력의 힘은 오히려 더 당당하고 오랜 생명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 마흔을 갓 넘은 강용면 세대世代에 있어서 바로 이 전통과 새로움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특히 민족사民族史의 질곡桎梏을 그대로 딛고 있는 이 세대들은 남한南韓 현대사現代史에 있어서 전통이 얼마나 버거웠는지에 대해 몸으로 직접 느껴던 세대들인 것이다. 19세기적 사고로 20세기를 살며 두려운 마음으로 21세기를 맞이해야 했던 세대가 바로 강용면 세대였다. 어찌보면 강용면의 작업에서 읽혀지는 농격문화적農耕文化的 형식形式 그리고 지역주의적地域主義的 태도態度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바로 이점이 「온고지신」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최금수
Vol.20000613a | 강용면展 / KANGYONGMYEON / 姜用冕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