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동에서

조병철展 / painting   2000_0630 ▶ 2000_0705

조병철_노을지는 평화동_캔버스에 유채_230×400cm_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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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제2전시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8

1. 조병철의 이번 전시를 아우르는 제목은 "평화동에서"이다. 평화동은 전주시 완산구에 속해 있는 한 동리의 지명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모악산 서북 산자락 밑의 삼천천이 흐르는 넓은 평야 지대에 위치한 동리의 지명이다. 이 곳은 이제 막 개발이 진행되어 적지 않은 아파트들이 이미 들어서 있고 또 들어서는가 하면, 동시에 드넓은 들에 논과 밭이 펼쳐진 그리하여 실제 농사를 짓고 있는 일종의 도시와 농촌의 경계 지역이다. 사실 전주에 살고 있거나 전주를 방문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전주만 하더라도 아직 전통적인 농도(農都)로서의 외형과 속내를 적지 않이 간직하고 있다. 농도란 농업 곧 자연과 더불어 경작하는 사업이 삶의 기반을 이루는 곳이다. 전주가 이렇듯 농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고속도로나 기차로 전주에 진입하는 경우 넓게 펼쳐진 김만경 평야 저 안의 도시를 한 눈에 가늠해 볼 수 있을 때, 혹은 10분만 차를 타고 도시 밖을 나가면 펼쳐지는 자연의 수려한 풍광들과 만날 때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평화동은 아마도 바로 이렇듯 자연과 삶이 어울어지는 이 곳 전주의 변화와 지속을 현재 가장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곳 아닌가 한다. ● 2. 7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이 곳에 정착하기로 한 이래 조병철은 끈질기게 자신의 삶, 기쁨과 슬픔 그리고 좌절과 희망이 영위되는 터전인 이 지역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다. 그는 이 곳의 사람들, 자연 그리고 이 곳의 이러저러한 삶의 모습들, 또한 그것들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소회(所懷)들을 자신의 작업에 담아 왔다. 어찌 보면 인상주의 풍이 가미된 평범한 사실주의적인 일상 풍경화 정도로 치부될 수 있을 그 작업들은 그러나 처음부터 매우 특징적인 면을 내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 삶을 단순히 풍경으로 대면하지 않았던 점에서 찾아진다. ● 그가 처음 전주에 정착했을 무렵의 그림인 「봄손님」이라는 작업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그림은 봄이 되어 마당에 꽃이 만발한 한 집안으로 그 집 안주인의 친구들이라고 짐작되는 몇몇 아주머니들이 접어들면서 서로 반기는 장면, 그 장면을 부감俯瞰의 시각에서 잡아낸 그림이다. 뭐라고 할까? 그림의 포인트는 외관에 있지 않다. 긴 겨울을 지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봄, 그 봄이 만물에게 부여하는 생명감을 그야말로 일상적인 아주머니들의 봄나들이 장면에서 잡아낸 그 그림은 그야말로 소박한 소도시의 삶이 가질 수 있는 맛이랄까 분위기랄까 하는 것을 포착하여 그것을 화면 밖의 다른 세계에까지 펼쳐내는 느낌을 준다. ● 한마디로 이 그림은 단순한 사실적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처음부터 하나의 문화, 하나의 삶의 재현이 그 차이와 같음의 변증법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예술 특유의 결절점을 목표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접근하고 있었다. ● 3. '지역의 삶을 (긍정적 적극적으로) 재현'한다고 하는 것은 일견 소박하게 느껴지는 어의와는 달리 결코 만만한 기획이 아니다. 내 생각에 지역의 삶이 재현된 작업이란 그 지역의 삶 혹은 문화가 다른 모든 지역과의 차이(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에 의해 드러나는, 그리하여 그 차이로써 다른 모든 지역의 삶과 문화에 대해 하나의 표명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작업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다고 할 때 지역의 삶을 재현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방색을 드러내는 문제가 아니다. 또는 일정한 지역 출신 작가들의 작업에서는 나름대로 그 출신지의 지역적 특성이 어떤 식으로든 표출된다는 식의 문화적 보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도 다르다. 하긴 단순히 '표출되는 것'과 '지역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지역의 삶을 작가 자신이 적극적으로 자신과 그 곳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현재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식할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 자신과 이들의 미래를 형성하는 그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 사실 이러한 인식과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이미 오랜 동안 우리 개개인들의 삶과 문화는 이렇듯 지역의 삶과 문화를 토대로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인지 요사이는 그간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강제되어 온 중심-주변 체계가 어떻게 이러한 실상을 왜곡하고 우리의 눈을 가려왔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실정이다. 이러한 논의를 마치 새로운 것처럼 여기게 하는 까닭은, 단지 최근 지역의 삶의 중요성이 논의되는 문맥, 곧 전지구방화 Glocalization라는 개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소위 전지구적인 시공간 압축 현상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지역간의 삶과 문화의 차이가 줄어드는 한편으로 그런 만큼 지역간의 상호 연관이 활발해 지는 가운데 지역이 삶의 기초단위이자 문화적 표명 단위로서 더욱 부각되는 현상 때문일 것이다. ● 결국 지역의 삶을 재현한다는 것은 바로 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는 그리고 혼성화 되어 가는 삶의 실제 속에서 지역 그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각은 전지구적으로, 행위는 지역적으로'라는 구호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해당 지역의 특수한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자생(自生)적인 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조병철_봄손님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1991

4. 물론 좋은 그림 혹은 작업은 커다란 이야기를 그대로 내비치지 않는다. 그것들이 하는 일은 한 구체적인 지점, 우리의 일상의 미감과 직관이 그러하듯 한없이 미묘하거나 복합적인 어떤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 지점은 아침나절 들판에 비친 햇살의 적막한 무심함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고통의 순간 빛으로 다가온 밤하늘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 하나의 변기가 기존의 모든 미술 개념에 대한 충격적 파괴 행위로 제시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나(뒤샹), 흔하디 흔한 대중 스타의 광고 포스터가 이 표면일 뿐인 말할 수 없는 현실의 표상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포착하는 것(워홀)에서 드러날 수도 있다. (뒤샹과 워홀의 작업이 현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보편화된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역시 해당 시기 해당 지역 미술가들의 하위 문화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나름으로 구체적인 모티브에서 출발하지 않는 작업이 어디 있겠는가? 또 그렇게 자신이 작업을 출발시켰다고 주장하지 않을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차라리 의미망의 틈새를 뜷고 들어가 발견한 그 구체적 지점이 그리고 그것을 실현한 상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 5. 조병철의 이번 작업들은 이런 문맥에서 '지역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일정 정도 성취를 이루었음을 보여진다. 나는 무엇보다도 「두만강 푸른 물에」라는 작업을 주목하고 싶다. 노인들이 모여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 노인은 아코디온을 연주하고, 몇몇 노인은 약간은 겸연쩍은 듯 굳은 자세로 노래하며, 몇 사람은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다. 그리고 뒤편의 사람들, 또한 이들을 둘러 싼 나무숲과 멀리 보이는 돌담. 장소는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곳, 경기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 장면의 너무도 적확하게 잡혀진 구도와 통상의 유화에서 느낄 수 없는 개방된 화면의 분위기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퍼져 나가는 노래의 리듬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듯하다. 이 그림은 결코 풍경이 아니다. 아마도 여타 풍경화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그의 그림에는 거의 항상 사람이 등장한다) 어쩌면 생활 풍경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보다 훨씬 풍부한 해석이 있다. 노인들 그리고 이 장면 전체를 해석하는 작가의 따스하며 깊이 있는 시선, 결코 대상을 과장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지나친 거리감으로 대상을 냉각시켜 버리지도 않는 시선. 이 시선은 바로 이 곳의 삶을 그 가난함과 빈약함에 있어 희망을 보는 그리고 긍정하는 시선이다. 여기서 연민은 연민대로 공감은 공감대로 그리고 긍정과 희망은 그것대로 화면에 녹아들어 열린다. ● 6. 그러고 보면 "평화동에서"라는 전시 제목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마치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배경이 되는 공장지대의 호칭이 낙원동이었듯이, 이 경계에 위치한 지역의 호칭은 평화동이다. 그리하여 평화동은 실제의 평화동이지만, 또한 변화를 겪어 온, 동시에 현재에도 변화에 처해 있는, 그 변화로 인해 소외되고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아직은 평화로운, 그리하여 평화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 곳, 혹은 이 지역 전북을 상징하는 어떤 곳이기도 하다. ● 이번 전시에서 조병철은 이 평화동의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그려냈다. 그것은 우선 모악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 봄의 평화동 들녁의 모습을 그린 「모악춘절」이라든가, 여름 아침나절 들판에 비친 햇살의 적막한 무심함이 드러난 「평화동의 아침」, 그리고 가을 해질녁의 마을과 들판의 모습을 그린 「노을지는 평화동」과 같이 계절과 시간을 깊이 고려하여 일종의 인문지리적 혹은 지형학적 지도를 작성해낸 일련의 작업들로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그 평화동은 「소쇄추류」에서와 같이 그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평화의 장소 소쇄원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평촌가는 길」에서처럼 자연과 삶의 어우러짐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솔직히 나로서는 그의 이러한 해석의 시선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도시 생활, 인공 생활의 긴장이 막바지로 치닫을 때마다 마치 마지막 희망처럼 절실하게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어울어지는 삶을 꿈꾸곤 했던 나로서는 그것들에 현실적으로 설득 당한다. ● 7. 조병철의 이번 작업들에서 꼭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기법에 대한 것이다. 모든 작업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작업들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것은 그가 종이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의 이번 그림들이 통상 유화의 물질감에서 유래하는 둔중함으로부터 벗어나 어딘가 가볍게 열린 듯한 분위기를 내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종이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자연히 그것의 물질적 성질에 따라 다른 모든 재료들과 매체들, 그리고 작업 방식이 변해야 한다. 천연 재료로서의 종이는 그 물질적 특성에 맞게 물감을 빨리 흡수하며 덧칠을 반기지 않는다. 때문에 종이에서는 유화에서와 같이 물감을 바르는 방식이 별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따라서 자연히 물감을 머금은 모필로 화면에 선을 긋는 방식이 적절함을 얻는다. 다시 말해 붓이 바뀌어야 하고 또 종이의 흡수성에 걸맞게 물감이 바뀌어야 한다. 또 그에 따라 작업하는 방식 즉 선을 긋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변화에 적응하려면 작가 자신이 이미 어느 정도는 종이의 이러한 물질적 속성을 몸에 익히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든 변화와 더불어 그림의 구조, 좀더 정확히는 그림과 관객의 대면 방식 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이번의 몇몇 작업들에서 병풍 식의 제시 방식을 취한 것은 일종의 논리적 귀결로서 특기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 「소쇄추류」는 이런 문맥에서 주목에 값한다. 이 그림이 그려낸 것은 담양에 있는 전통 정원의 백미로 꼽히는 소쇄원의 가을 풍경이다. 첫 눈에 그림은 마치 전통 산수화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론 서양화의 원근법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마치 세잔의 그림이 그러하듯 공간을 감싸 안는 듯한 구도는 군데군데 화면의 여백과 더불어 통상의 풍경화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필획은 유화가 그러하듯 화면 위에 물감을 축적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 그림에서처럼 선 하나 하나가 그어져 생동하여 결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색은 겹쳐져 발색되기보다는 따복따복 병렬되어 있으며 그런 이유로 투명하다. 그리고 다시 공간의 미묘한 현실감. 그것은 들어가 노닐 수 있는 가상의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가 하면, 한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의 성격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가 새로이 발견하고 연구한 기법들 재료들 그리고 작업 방식들에 의해 하나의 성취를 이루고 있다. ● 조병철은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바라는 자연과 삶의 어울림, 자신이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지금 이곳의 삶의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태의 현실적 이상으로서의 소쇄원을, 그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시각 언어로 해석하고 재현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 나는 그의 새 걸음이 반갑고 놀랍다. ■ 이영욱

Vol.20000702a | 조병철展 / painting

Art Peace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