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작가 조광현_정보영_김두진_홍수연_허구영 최우람_장태식_금중기_양만기_올리버 그림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500
Ⅰ.과학 기술이 자연적 생명체에 미친 가장 치명적인 징후를'불-임'이라고 봄으로써 이 전시는 기획되었다. 여기서'불-임'이란 자연적 생명체의 유기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도래한 총체적인 불임(不姙)의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불-임'이다. 이는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번식의 문제로서의 불임 현상을 의미하지만, 더 넓게는 과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기계 생명체, 유전자 공학이 생명체를 복제하거나 변형하여 탄생시키는 제3의 생명체가 초래할 존재론적 위기까지도 포괄한다. 그 탄생의 초기에 인류에게 유토피아(utopia)를 안겨 주리라던 과학 기술은 약속한대로 상상할 수 없는 편의와 이기(利器)를 가져다주었지만, 놀라운 진보의 배면에는 수많은 부작용 또한 양산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그 부작용은 제어할 수 없는 기류를 타고 증폭되면서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미래마저 위협하면서, 치명적인 과학 기술의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편의를 주는 수단으로서 여겨졌지만, 1960년경부터는 이미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엄청난 환경이 되고 있으며, 이제는 유사-생명체마저도 탄생시키고 있다. 이처럼 급변하는 상황에서 진보를 가로막는 시대착오적 영역이라고 오해받아왔던 윤리의 문제가 제 학문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는데, 기존의 윤리관으로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재의 상황을 수용할 수 없으며, 다가올 미래의 상황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일본의 저명한 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는 기술사회에서의 새로운 윤리학으로서 에코에티카(eco-ethica)를 제창하고 있다. 그는 과학 기술이 환경이 된 에콜로지칼한 변화의 상황에서 인간이 자기 행위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야 하는지를 모색하면서, 현 상황에서 윤리는 대인윤리(對人倫理)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연과 사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마저도 고려하는 대물윤리(對物倫理)로서 기능하여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기술공학의 폐해로부터 불-임의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에코에티카와 더불어 예술이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역시 기술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기술과 예술의 근원적인 동종성으로서의 제작 개념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궁극적으로 예술을 통해 현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모색한 것을 볼 때, 과학기술 시대에 예술의 역할은 진지하게 모색해 보아야할 과제로 남는다.
Ⅱ."...모든 사람은 육체로나 정신으로 임신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때가 이르면 우리의 본성은 자식 보기를 욕구 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추한 것 속에서 자식을 낳을 수는 없고 오직 아름다운 것 속에서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이에요..."(플라톤, 향연, 206 ,C) ● 소크라테스의 이 언설은 그 중층적인 해석가능성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인류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왔다. 그러나 2000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가 설파하려던 불멸을 향한 정신과 육체의 출산은 동일한 컨텍스트로 읽혀질 수 있는가. 과학 기술에 의한 작위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내적이고 외적인 삶을 속속들이 변화시키는 지금, 자연적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임신과 출산은 더 이상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삶의 지표로서 기능할 수 없다. 신적이고 불사적인 임신과 출산이라는 가치관은 모든 일들이 자연적인 질서 속에서 순환하던 때인 고전적인 그림 속에서나 가능했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1938년에 이미 하이데거는 기술의 발달이 인류를'세계사적 자살행위'로 몰고 있다며 경종을 울린바 있다. 그는 인류의 평화스러운 생존과 인간의 참 존재에의 길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기술과 인간존재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기술의 생성과정이 존재망각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간파했듯이,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속화되어 유사 생명체마저도 탄생시키기에 이르른 지금, 인간은 존재망각의 끝자락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규정되기 어려운 불안한 존재였지만, 규정하고자하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복제인간과 기계 생명체의 시대에는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인간존재'라는 개념마저도 그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자명하게 인식되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나'라는 개념이 흔들리면, 인간세계를 형성해왔던 모든 관계들의 단초인'너'와'나'의 관계정립마저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타자(他者)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갖는 대타적(對他的)인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미래의 인간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부상한다. ● 더불어 우리가 진리라고 믿어왔던 수많은 사실들 역시 자취를 감추어 갈 것이다. 기존의 가치관, 도덕, 윤리, 법령 등의 곳곳에 인간복제, 생명합성, 시험관 아이, 인공지능, 사이보그, 로봇 등의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 천년간 존재해온 기존의 인간관으로는 다가오는 새시대의 엄청난 변화를 감당하고 과학기술의 혜택을 쉽사리 향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 윤리, 의학 윤리, 정치 윤리, 환경윤리, 기술 윤리 등,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 모든 분야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적응해 나가야할 인간의 미래에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 혼란이 기다리고 있다.
Ⅲ. 과학 기술이 인간존재 및 세계를 구성하던 모든 기초 개념과, 그와 연관된 제 분야에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불안감은 9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에 지배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불안감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표현되는데, 과학기술에 의해서 야기된 현대의 인간상과 관련된 문제와 유사-생명체들의 탄생, 에콜로지칼한 문제가 주를 이룬다. 현대의 인간상과 관계되어서는 불임, 파편화된 신체, 분열된 자아, 혹은 성 정체성의 문제가 주종을 이루고, 유사-생명체에 관하여서는 유전자 복제 및 조작에 의해 탄생되는 생명체들, 사이보그, 사이버네틱스와 결합된 기계들의 문제가 두드러지며, 에콜로지칼한 접근으로는 생태 파괴에 따른 생명체의 위기상황을 전반적으로 담아내는 작품들과 생태윤리학적 입장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 이러한 현상은 특히 테크놀러지 미술의 세력확장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삶의 일부로서 더욱 친밀하게 다루어지던 테크놀러지는 설치공간의 효율적 이용, 시각 및 음향효과의 자유로운 사용, 영상이나 언어를 통한 내러티브 구조마저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서, 그 테크닉이나 내용 면에 있어서 날로 성숙해 가는 면모를 보인다. ● 기계문명이 탄생시킨 암울한 징후를 테크놀러지를 통해 담아내는 아이러닉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최우람은 현대인의 삶 곳곳에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기계 생명체의 존재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하게 그들의 꿈틀거림을 느끼며, 이미 통제할 수 없는 그들의 존재에 구체적인 형상과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사이버네틱한 기계는 이미 최우람의 삶 어디에고 함께 해온 부정할 수 없는 존재들로서, 그들의 존재는 그 형태나 기능에 있어서 단순한 기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자연적 생명체의 분류체계와 유사한 방법으로 그들의 종(種)을 구분하고, 학명을 만들어 공식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실제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벌레들처럼, 언제나 자신의 주변에 자그마한 기계 생명체들이 기생하며 번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강박증을 표출하고 있다. ● 양만기는 유전자 복제 및 조작에 의해서 탄생하는 생명체들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인류가 축적해온 과학적 지식의 결과물을 담아놓은 책들을 모아놓고, 그 한 권 한 권의 단면에 아기 이미지의 단편을 전사한다. 맞춤 아기는 마치 퍼즐처럼 적제적소에 책이 쌓이면 그 형태를 갖추고 탄생되는데, 맞춤 아기는 생명체의 근원인 모태와의 연결 없이도 과학 기술의 조작에 의해 인간과 똑같은 형상으로 탄생된다. 이는 홍수연이 자연적 신체를 갖춘 여성으로서 자기 신체에 대해 느끼는 결핍증을 표출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 홍수연은 신체의 생식 구조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투명한 세포 조직체를 만들어 하나씩 표본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세포 조직체에는 미처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멈추어버린 듯한 자그마한 생명체의 흔적이 담겨있다. 그녀는 자연적 잉태의 장소인 인간 신체내의 성스럽고 신비로운 공간을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장소로서 박제화 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불임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다. ● 홍수연이 여성 신체의 불임을 그 기능의 퇴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면, 장태식은 유사한 맥락에서 남성 신체의 생식기를 과감하게 제거해 버린다. 그는 거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임 없이 복제되는 자신의 신체를 즐비하게 늘어놓는다. 그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이 부여한 생식기가 갖는 의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생식기가 제거되었음에도 번식이 가능한 아이러닉한 상황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정신세계가 무성생식에 의해 잠식당하는 불안감 또한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불안감은 남성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김두진에 의해서 극대화되어 표현된다. 그의 작품은 그'자연성'만큼은 의심받을 수 없음이 명확한 자신의 성정체성이 언제나 외부에 의해서 규정되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결코 그 정당성을 담보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핍감을, 잔혹하게도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조각 조각 잘라냄으로써 표출하고 있다. 그는 잘라낸 사지를 각기 다른 접시에 담아 장식장에 놓여진 물건처럼 진열하는데, 정체성을 잃고 대상화된 그의 눈, 코, 입등과 성적상징물로 대상화된 조각난 신체들은, 그러나 각기 독립된 존재로서 꾸물거리며 발화한다. ● 금중기는 그들이 어떤 존재이건 간에 유사-생명체들의 탄생 때문에 겪게되는 총체적인 인간 정체성의 불안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동일하게 복제된 침묵하는 존재들의 군상을 만들어 내는데, 그들은 남성이기도 하면서 여성인, 자연적 형상인 듯 하면서도 기계적 형상인, 완전히 발육한 듯 하면서도 불완전한 변형체인 듯,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을 풍기는 제3의 존재들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인간형상을 제시하진 않지만, 그의 작품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 영화「에이리언」 시리즈의 한 장면은 복제된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이상과 같은 상황을 충격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죽은 여주인공 리플리의 혈액체취로부터 탄생된 복제인간 리플리가 겪게되는 정체성의 갈등은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되는 한 실험실에서 섬뜩하게 묘사된다. 그 실험실에는'나=완벽한 복제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쳤던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탄생된'나와 유사한 존재들=불완전한 복제인간들'이 시험관 안에 방치된 채 꾸물거리며 신음하고 있다. 완벽한 복제인간 리플리와 불완전한 변형체인 괴물 리플리들의 만남은 완벽한 복제인간 리플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순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과 사이보그의 외형적인 구분이 없어지는 미래의 시대에서 인간, 사이보그, 로봇 등이 동등한 생명체로서 대응하며 서로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해 겪게되는 혼란과 갈등은 예견할 수 있는 현실중의 하나로 다가온다. ●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적 글귀를 인용해가며 전통적인 존재론을 파고들던 정보영의 근작은 인간이 처한 위기상황을 반영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초현실주의적인 몽롱한 풍경으로 존재를 둘러싼 인위적 환경을 부각시킨 최근의 작품에는 존재의 막연한 익명성이나, 그 익명의 존재가 맞닥뜨리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극명하게 감돌고 있다. ● 올리버 그림은 수많은 인간의 죽음과 탄생에 대해 멈춰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영혼의 생명을 순환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과학 기술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종교적이리만치 신비로운 과정에 개입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는 때가되면 이루어지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이 세계가 유지되며, 나의 존재는 죽음을 통해 세계의 일부로 환원되어 새로운 생명체의 밑거름이 된다는 진리를 환기시킨다. ● 허구영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정복이 아니라 관리를 떠맡은 존재로서의'겸손'이 느껴진다. 그는 우리가 쉽사리 지나칠 수 있는 후미진 장소에서 아주 조그마한 인위의 잔재들을 찾아내고, 그들이 자연과 엉키어져 그 리듬을 타고 부유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잡아낸다. 그 영상은'묘한' 아름다움을 풍기는데, 그 묘한 감정은 인위의 흔적에 대한 복잡다단한 작가의 심정과, 자존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그것들을 감싸안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연민이 스며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주변 환경에 인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데, 일상에서 의미 있는 소소한 것들을 찾아내고, 조심스레 전시장에 옮겨놓는 그의 태도는 생태윤리학적 입장의'실천'이라는 점에서, 불-임적 상황에 대한 가능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 조광현의 작품에서는 습기차고 어두운 공간에서 꿈틀거리는 음산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의 그림은 원시의 밀림인 듯, 핵전쟁 이후의 폐허인 듯, 알 수 없는 모호한 공간에서 고통을 끌어안고 자존하는 생명체들을 그려내고 있다. 거대한 풍경 속 곳곳에 숨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얼핏'종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치유를 갈망하며 쉬임 없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Ⅳ.인간은 오랫동안 외적인 자연의 위협과, 자연적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고, 과학 기술이 그 해방의 열쇠이기를 기대해왔다. 그러나 해방의 순간은 기쁨과 환희만큼이나 쓰라린 부작용을 낳고 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과학 기술과 인간의 삶이 만나는 경계선상에서 야기된 수많은 암울한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인간의 시급한 과제이다. ● 지금 이 순간도 과학 기술은 단순한 도구로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서 자율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그들의 상호결속에 의한 증식에는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언제나 자연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존재하는 자연은 언제나 우리 삶의 든든한 바탕으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이제까지 과학 기술이 자연을 급속도로 지배하고 조절해왔다면, 이제는'자연으로서의 인간'이 과학 기술을 조절해야할 때이다.'불-임'전과 대중이 만나는 자리에서 과학 기술 시대에 인간의 행위의 지표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면 한다. ■ 이필
Vol.20000720a | 불-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