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기대는 당신의 그림

박진화 회화展   2000_1103 ▶︎ 2000_1128

박진화_어둠으로 가는 나무들_캔버스에 유채_218×290cm_2000

초대일시_2000_1103_금요일_05:00pm

서남미술전시관(폐관) Tel. 02_3770_3870

그리운 당신. 전시글을 이유로 당신을 향하는 것은 편한 맘으로 자연스럽게 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화가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몸을 뒤지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만 처절한 것인지 그 부담을 안아 본 사람은 안다. 물론 피할 수 있을 때는 피해야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을 때는? 그래서인데, 이 글은 붓과 부대끼면서 찌꺼기로 가라앉은 두서없는 것들이다. 여전히 홀가분해 질 수 없는 내 곁에, 가을 햇살이 유난히 맑다. 나는 먼저 시인이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림. 나는,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좋으니 곁에 맴돌고, 스며, 속을 달래는 위로의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픔을 달래고, 상처들을 씻고, 눌린 마음들을 풀고, 위무할 수 있는 그림이 주변에 별로 없다. 아파하는 그림이 드물다. 왜 많은 화가들은 슬픔을 가리고 눈물이 없는지, 왜 쓰림이 없고 아픔을 외면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림이 뭐고 어떤 가치가 있는가는 나중이다. 우리의 마음이 왜 애달프고 쓸쓸한지, 왜 몸과 손이 찬지, 왜 정상적인 것이 어려운지가 중요하다. 예술이니 문화니 하는 말은 미뤄 두자. 많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이 위축 됐다. 멀쩡한데도 아픈 육체, 애탄 숨결, 짠한 모습들이 화가의 눈 밖으로 멀어지고 있다. 왜 그런가? 무엇 때문일까? 그것에 신경 쓰자. 매달리자. 그리운 당신. 화가의 눈이 자신을 넘어 우리로 향할 때, 많은 이들의 눈은 어디를 향할까. 나는 사람을 믿고 사람 눈을 믿는다. 사는 긍지이고 그림함의 긍지이다.

박진화_밤의 붉은 나무_캔버스에 유채_218×290cm_2000

붓을 들고 뭔가를 그려낸다는 일이 요즈음 같이 빠른 세상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 정상이라고 믿으니 차라리 다행이고 맘이 편하다. 내 붓을 단단히 다지는 데는 지금이 훨씬 용이하다. 무엇보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같이 바쁜 세상이야말로 오히려 한적하고 한가하다. 그만큼 찬찬히 살필 수가 있다. 아픔에 대해, 나에 대해, 우리 삶들에 대해 한층 더 헤아릴 수 있고 집중할 수 있다. 나는 한가한 들판처럼 여유롭다. 그래서 더욱 거스르고 싶고, 때문에 더 절실하다. 근원을 향해 근본을 추스리는 일, 내 속을 헤집고 내 속을 다지는 일은 다 그 여유의 필연이며 결과이다. 근본주의자의 유유자적한 태도, 지금 세상에는 마땅히 따를 일이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림을 하기 위해서다. 그림의 믿음 때문이라도 더 눈을 감는다. 그리운 당신. 그러면서 반성한다. 역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모함, 쉬지 않음, 많은 그리움, 그것이 좋다. 여름 태풍에 나무들이 군데군데 넘어졌다. 작업실 창을 통해 북쪽을 본다. ● 그림의 시작과 같이한 80년대는 내 끓는 젊음과 일치한다. 잡혀 가둬져 있을 때는 물론이고, 최루탄 거리를 쏘다닐 때에도 내 속은 가만히 있질 않았다. 뭔가 제대로가 필요했다. 기왕의 것들에 질렸을 것이다. 나까지도 차라리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을 얼마나 했던가. 그리운 당신. 시간이 흘렀다. 가장 활기찼던 내 시절, 그 땐 많이 아팠지만 가슴 벅찬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80년대가 내게 추억으로 남길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순간의 의식이 자신을 크게 지배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지금 내 생각의 많은 바탕이 그 80년대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사는 문제들에 대한 관심. 그 지지부진한 삶을 어찌할 수 없는자의 마땅치 않음… 결국, 나는 민중미술을 왜 따르는가. 필요가 아니다. 민중미술 화가가 아니어도 좋다. 설사 민중미술이 없어져도 좋다. 다만 그 민중미술 만큼, 80년대 미술운동 만큼의 사유를 포괄한 미술 사조가 이 땅에 있나? 당신을, 우리를, 민족 전체의 삶을 자신과 겹치려는 미술사조는 어디 있나? ● 그림이 매력이 있는 것은 그 부피가 적나라하다는 것이다. 자기 삶이나 생각의 부피에 에누리가 없다. 딱 그만큼, 모질게도 딱 그만큼 그림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본질적인 입장으로서의 그림을 따른다. 난을 친 것을 두고 난을 넘어 삶과 사유를 헤아릴 수 있는 그 정도의 그림. 그런 그림을 탐한다. 그리운 당신. 이 밝은 세상에 예술적 신비가 가능한가. 영혼의 외침이 가능하고, 초월의 웅변이 가능한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 가능성은 자신의 가림막을 벗는 쪽에서, 영혼과 초월의 신비를 벗기는 쪽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이다. 그림함의 절망함이다. 역시 그림이다. ● 백년 전의 그림들을 눈여겨본다고 해서, 그 식으로 그린다 해서 부끄러울 필요가 없다. 우려할 필요도 없다. 새롭단 말에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절실함만 있으면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선택이 아니다, 절박함이다. 나는 이것이 좋다가 아니라, 나는 이것일 수밖에 없다가 내 문제의식이다. 이렇다가 아니라, 이럴 수밖에 없다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이 땅에서 지금 붓을 드는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편으로 그래서 홀가분하다. 끌리는 그림은 좋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쩔쩔매는 그림은 예사롭지 않은 그림이다. 지금 이 땅은 예사롭지 않다. 왜 예사롭지 않은가. 그건 화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예사롭지 않은 이 무언가를 더 부추기는 일밖에 할 게 없다. 흔한, 별 볼일 없는 삶이라도 자꾸 충동질해서 씻고, 달래고, 풀어야 한다. 그것이 내 일이다. 그리운 당신. 작업실이 십여 리 길이라 걸으면 한 시간 걸린다. 찬찬히 걸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진다. 많은 생각을 생각만으로 두지 않으려는 생각, 그 생각 또한 많아진다. 그렇다. 생각에 더 살을 입히는 것, 사실화시키는 것, 그것도 내 일이다.

박진화_붉은나무 꿈을 꾸다_캔버스에 유채_218×290cm_2000

내 그림에 나무가 많아졌다. 그리고 또다시 어두워졌다. 나무에 기대 나를 스스로 다독거리고 싶은지, 유난히 나무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몇 년 전에 강, 바다, 하늘이 많이 그려지던 때와 같은 문제다. 대상이 나무로 바뀌었을 뿐 속은 변함이 없다. 어떻든, 내게 나무라는 대상은 무엇인가. 무얼 담고, 뭘 의미하나? 물론 나다. 어쩌면 당신이기도 하다. 당연히 나무를 통해 나를 심으려는 것이다. 나무를 그리는 한, 나는 나무다. 내가 나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림에 나도 있고 대상도 있어야 한다고 늘 얘기했다. 같이 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상이 나무일 때 나는 어디 있는가? 나무에 있다. 아니다, 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 주위에 있다. 아니다. 정확히 하자면 그림을 떠나 있다. 그림에 없다. 그렇게, 내가… 나는 그림을 떠나 있어야 한다. 역설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대상과 내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래서 이 문제에 나는 집착한다. 그리운 당신. 올 들어 내가 나무와 함께 어둠으로 가려는 이유, 내가 밤으로 스며드는 이유는 이 떠남과 흩어짐을 천착하면서 생긴 징후 때문이다. 어둠의 무차별, 밤의 무분별을 받아야 한다. 나는 이 징후를 중시한다. 더 반성한다. ● 그리운 당신. 이번 전시는 나를, 내 그림을 반성하는 계기이다. 반성함, 반성할 수밖에 없음. 나는 내내 그 내용으로 붓을 들었고, 올해는 더더욱 그 반성의 필요로 나무에 기댔다. 나를 이 땅에 다시 더 심고, 나무처럼 짱짱하게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나무처럼, 그 흔한 나무처럼, 그렇게 열심일 수 있을까. 그 길을 생각했다. 그 긍지를 생각했다. 그 기운을 생각했다. 그렇다. 그림을 그리려면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숱한 반성의, 그 흔들림 때문에라도 눈감고 더 더듬어야 한다. 그리운 당신. 내 경우 그림은 더듬는 생각의 결정(決定)으로 보면 맞다. 반성이 결정(結晶)된 영원한 습작이다. 습작, 에스키스. 그렇다. 나는 늘 결정(決定)의 에스키스를 하는 중이다. 그림은 사유의 결정(結晶)이므로 전체를 전체적으로 해야 맞다. 내가 걷는 이유도 그 전체를 낱낱이, 찬찬하게 하기 위함이다. 걸으면서 차분히 전체를 그리는 중이다. 계속해서 걸음, 그 걸음의 이유가 그림이 될 것이다. ● 착각이 없는 것은 판단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 쩔쩔매는 상황이다. 특출한 예술성 운운해서는 안된다. 그림이란 내용이 때에 따라 바르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은, 착각이라도 떳떳이 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단히 공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을 낮춰 줄이는 일이기도 하다. 또 향취 대신 쩔쩔매는 초라함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나는 우선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일 자체가 자신의 세계를 그때그때 제한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자신을 분명히 축소 해 내는 것, 해 가는 것, 그것이 생각의 필요성 아닌가. 정확히 보아 고정시킬 줄 알아야 화가라면, 이 또한 눈에 든다고 될 일이 아니다. 때에 따라 눈감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보고, 그리워하고, 사무치고, 스스로를 지울 수 있다. 또 제대로 시작하고. 제대로 간다. 그리운 당신, 망형(忘形)이라는 말. 아주 소름 돋는 말이다. 형을 잊는다가 아닌가? 형을 잊는다. 형을 잊는다… 열심이어서 자신을 회복하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고, 추스리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열심, 열심히 함으로써… 참으로 겁나지만, 힘나는 말이다. ● 그리운 당신. 나는, 앞으로도 눈감아도 들리는, 들리는 노래를 부를 생각이다. 못다한 노래가 있어서가 아니라, 쉼 없이 들리는 노래들을 제쳐 외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눈을 파고 들리는, 따라 들리는, 그 노래를 할 것이다. 눈감아도 들리는, 눈 없이도 들리는, 당신의 노래를 계속 그릴 것이다. 사무치는, 부추기는, 달겨드는 노래. 달래지고, 씻기고, 풀리는, 그런 노래를 계속 그릴 것이다. 그리운 당신, 여기서 접자. 그러면서 그림 놓을 곳을 생각한다. 내 그림은 당신은 물론이고, 쩔쩔매며 열심히 사는 이들, 아픔과 눈물을 함께 하는 착한 이들, 사람답게 살려고 열망하고 애쓰는 사람들의, 이 땅의 그림이길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그리운 당신의 그림이 될 것이다. 그리운 당신, 건강하시라. 언젠가 다시 찾아 뵙게 될 것이다. ■ 박진화

Vol.20001105a | 박진화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