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탐구

정혜령 조각展   2001_0111 ▶︎ 2001_0120

정혜령_둥근 방에 들어가다 I_혼합재료_ø350×45cm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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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갤러리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67-120번지 코디센 3층 Tel. 02_2212_7670

앨리스의 세상에서 ● 컴퓨터가 생활 속에 들어오기 전, 회화는 평면예술이며 기능을 강조한 건축을 제외하면 오로지 조각만이 공간을 점유하는 3차원의 시각예술이라는 명제는 참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 가운데 공간을 건축이 형성하거나 조각을 둘러싼 것에 한정짓지 않는다. 자판기 위의 손가락을 잠시라도 멈추면 분명 평면인 모니터 안에서 화면보호기라는 이름으로 2차원이었던 형태가 나타난 현란한 색으로 몸을 바꾸다가 이내 3차원의 형상이 되어 우주 공간을 떠돌다 무한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보편화된 3차원 입체영상은 우리의 시각을 적절히 조절하여 이 세상에 불가능한 형태는 없다고 생각케 만들었다. 우리는 물체의 모든 면을 파편화시켜 관찰할 수 있고, 이의 조합이 전체를 이루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원근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지점을 향한 사물의 정열은 시각적인 상호성을 배제한 견고한 인간성의 발견과도 일치한다. 세상의 중심에 선 인간 안구는 인간 내부에서 생성된 신적 질서를 의미한다. ● 세계관을 바꾼 보는 방식의 변화, 공간에 대한 인지는 유감스럽게도 정체성의 혼란을 동반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혼란은 때론 위트와 풍자로 나타나는데 어린애를 위한 동화로 보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러한 다를 수 있는 공간과 상황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당시 영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풍자라는 점을 접고 접근한 앨리스의 세계에는 성인식을 치루기 위한 고달픈 현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앨리스가 처한 공간의 부조리함과 빠른 변모에 있다. 흰토끼를 따라가기만 하면 나타나는 아주 다른 세상은 이상한 공기로 얽혀 있으며 때에 따라 앨리스는 자신의 크기를 조절함에 의해 다른 등장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우세해질 수도 있다. 작은 벌레의 입을 통해 진실을 보듯 왜곡된 형태 속에서 한 조각 진실을 그리워하는 어린애 같은 천진성으로 날카로운 현실의 끔직함을 숨기는 이 동화를 통해 인식과 시각의 필연성을 또한 본다. ● 젊은 작가 정혜령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의 독서 세상을 의문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던 이 석연치 않은 동화책을 새삼스레 펼친 느낌을 받은 것은 이 작가의 세계가 온통 거울 속 저편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놀이공원에 설치된 요술거울에 비친 물체 같기도 한 이들은 기억 저편의 세계에서 부조리한 공간의 모습으로 자리했던, 갑자기 앨리스가 맞을 수밖에 없던 그 세계와 깊은 연관성을 보이고 있었다. 아동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공간적 이동이라는 앨리스적 개념은 자신의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청년의 모습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 공간에의 탐구 ● 주변공간을 포함한 많은 말 가운데 미술비평사의 고전인 레싱의 '라오콘'은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아주 고전적이지만 거역할 수는 없는 답변을 주고 있다. "실체들을 공간 속에 배열하는 예술"로 정의된 조각은 시각예술의 특징인 정적인 상태에서 동시에 각 부분들의 조합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조각을 설명하는 말로 인용되는 이 글은 물론 '각 부분의 조합'이라는 전통적으로 조각을 설명하는 데 쓰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르네상스시대의 첼리니가 어느 한 면이 다른 면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때론 이미 완성된 면의 우아함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이미 완성된 면이 엄청나게 많게 되므로 모든 방향에서 옳게 관찰되어 제작된 조각이란 실재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부분의 조합이라는 개념 아래 생성된 관념이었다. 이제 더이상 부분과 본질의 문제에 묶이지 않은 현대에 공간을 점유하는 시각예술로서 조각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쩌면 무게가 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벽에 걸린 조각, 공간 속에 드로잉이라는 말로 묘사된 조각을 지나 지금 우리는 조각의 정체성 찾기에 나서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퓨전의 세상에서, 탈 장르의 예술적 경향 아래서 굳이 조각의 속성을 확인코자 하는 태도는 시대에 역행하는 복고의 감정에서가 아닌,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닿아 있는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속 삼차원의 조각적 형태는 조각인가, 회화인가. 개념의 혼란기인 이 시대, 조각의 본질을 찾아 나서는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인간의 자아, 정체성 찾기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그런 면에서 정혜령의 작품이 앨리스라는 기억 저편의 인물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왜곡된 형태로 인지된 물체를 통해서 앨리스의 공간을 느끼게 하지만, 무엇보다 거기에는 향수(鄕愁)가 자리한다. 진지한 자세로, 어린애 같은 순수함으로 조각의 본질을 찾아 나선 작가의 타박타박 걷는 걸음걸이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공간'이란 개념으로 첫번째 개인전을 가진 지 1년만에 2회 작품전을 준비하는 숨가쁜 행보에는 이 작가가 골몰하는 '공간'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가 그의 행낭 속에 들어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나 사물만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은 "모든 것이 완벽히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확인되듯,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 저편에 대한 호기심이자 어린 시절 책상 밑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 동화책을 보던 세상의 모습,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책상의 모습에 대한 향수일 지도 모른다. 첫번째 작품전에서 "자 보세요, 정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여기 있잖아요!"라고 외치던 그의 작업은 이제 "이렇게 볼 수도 있지요?"라고 말을 건넨다. ● 둥근 방에 들어가다Ⅰ은 볼록거울에 드러나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으로 인식된다. 볼록 솟아오른 방바닥 위에 놓인 책상은 마치 우체통처럼 표면이 솟아 있고 의자의 네 다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견고한 실체가 물렁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듯한 느낌은 착시를 현실화시킨 것이다. 역시 같은 개념인 둥근 방에 들어가다Ⅱ는 책상 대신 욕조를, 의자 대신 변기를 배치하였다. 아주 일상적인 공간, 특히나 젊은이가 반드시 만나는 두 개의 공간은 마치 지구를 우주에서 본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작품이 젊은이다운 순수성으로 보여지는 것은 바로 왜곡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사실적인 세계의 재현에 마음쓰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루바닥의 치밀한 재현, 욕실 타일의 꼼꼼한 공정이 이 작가의 치밀한 준비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면은 분명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먼 길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작은 준비들, 차의 기름을 채우고 식량을 준비하고 냉각수를 채우는 일이 바로 길 떠나는 준비의 시작이자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위한 필수사항인 것이다. 때로 원대하고 장기적인 여행에 사소한 것을 빠뜨리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가는 경험을 통해 노련해진 기성세대의 노파심을 이루는 골자이기도 한데, 젊은이가 스스로 챙긴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 이 작가의 공간이 단단한 현실을 담고 있음은 사각의 캔버스 위에서 물체의 진실을 탐구하는 일련의 시리즈에서도 드러난다. 공간에 의해 물체가 분절되며 작가의 의도로 그려진 백색 그림자 효과로 그 물체의 완벽한 형상을 보게 되는 이 시리즈에는 사물의 해체를 통하여 실체를 추구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한정적 공간에 의해 완형을 보이지 못하는 물체도 그림자의 완벽성을 통해 그 본질을 볼 수 있는 이러한 트릭은, 한정적인 면과 선 그리고 벽에 의해 갇힌 공간이 실제로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에 의해 완성됨을 보인다. ● 모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일부분만 인식하는 우리 시각을 사물의 본질에 투영하여 인간의 소외의식을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의자는 반쪽만 있어도 의자고, 등부분이 왜곡되어도 의자이다. 엉덩이를 붙이는 면과 네 다리가 인간의 하중을 안전하게 바닥면에 전달하면 그만인 것이 의자인 것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 묘하게도 의자는 인격성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지위는 분명 의자에 비유되어 왔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소유한 규격화된 의자도 그들의 인격을, 그들의 세계관을 담은 상징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 동일해 보이지만 실상 아주 다른 인격성이 의자를 통해 투사되고 있음은, 물체를 통해 세상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시도가 이번 작품전의 목표임을 드러낸다. ● 본질을 향하여 ●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수수께끼 같은 벽에 걸린 붉은 의자는 이 작가가 궁금해하는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 보인다. 다리는 네 개인데 등은 두 개인 의자….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차지해야 할 자리의 모자람으로 보일 것이요, 친구 좋아하는 청소년이라면 우정으로,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그들의 실체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벽에 걸린 의자는 의자인가 사회적 상징물인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념 속에서 사물을 통하여 이 작가가 찾는 것은 그것의 본질임을 알겠다. 정사면체에는 많은 공간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물체 또한 네 면으로 형성되고 그 면에 안주한 둥근 구체는 안전하지만 조금이라도 모서리에 걸리면 가차없이 잘려져 버리는 현실, 공원의 기다란 의자가 파란 한 개의 점을 향해 사선에서 보여질 때는 소실점이라는 원칙성에 의해 네모는 삼각이 되고 같은 길이의 네 다리는 그 의의를 상실한다. ● 이 작가의 세계에 언뜻 비쳐난 현실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고정관념에 대한 거부로 보인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탄탄한 조형의식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음 또한 본다. 지극히 관념적인 작업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그의 작품이 실상은 조각의 조형언어라는 기초개념에 천착한 현상임 또한 본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의 틀을 설정한 것은 그가 지닌 세계관이 앨리스 같은 호기심으로 차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을 통해 빨려 들어간 세상에서 앨리스는 주체적으로 행동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금 꿈 같은 세상에서 깨어났을 때 어른들과 함께 하는 티타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열심히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원하는 세계를 향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도 하다. ● 관념적 작업이, 기계적 현학이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의 반영으로 현란한 젊은 작가들의 야망 앞에서 정혜령의 작업은 여타의 작업과는 차별될 수 있는 열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순수 조형의지에 대한 이 젊은 작가의 탐닉은 성실함으로 빛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자신이 설정한 '관념의 벽'을 헤쳐 나왔을 때 얻을 다른 세계를 기대해도 좋다. 그럼에도 한가지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경험의 소중함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의식의 확대이다. 노파심으로 당부하는 잔소리 속에는 세상을 보는 눈은 책을 통해서, 타자의 눈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내게 부딪친 현실은 분명 다른 종류의 것임을 아는 지혜가 숨어 있다. 남의 옴병도 내 손톱 밑 가시보다 못하다. 인간이 가진 다채로운 성향, 남성 속의 여성-여성 속의 남성이라는 인체공학적 이해가 모두 받아들여진 현실에서 우리 모두 추구할 것은 본질의 문제이며 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관념이든 우직한 탐구의 여정을 통해 밝혀질 것을 믿는다. 지엽적인 데에 눈을 주지 않고 순수 조형언어에 대한 관심을 타자화시켜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작가의 세계가 지금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으며, 그에서 한 걸음 나아간 또 다른 세계가 무한히 펼쳐질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작가를 주시한다. ■ 조은정

Vol.20010106a | 정혜령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