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그리고 달 : 비디오그라피2001 ②

the sun and the moon: Videography2001   2001_0309 ▶︎ 2001_0410

김준_'낙지'_단채널 영상 스틸컷_2001

책임기획_박삼철

참여작가 김세진_양성윤+박정훈_김지현_이강우_이중재 안상준_이형주_김준_배영환_전성호

일주아트하우스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226번지 흥국생명빌딩 Tel. 02_2002_7777

'또 다른' 시각을 위하여: 단수/복수, 선형/비선형 ● 우리 삶이 그려지는 수직적, 수평적 축인 시간과 공간은 단수(單數)의 성향에 지독스럽게 묶여있다. 역사의 기술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수많은 개체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들은 그 본래의 복수적(複數的) 의미를 상실한 채 끊임없이 '중심'의 시간과 공간으로 환원된다. 중심의 시간은 기록을 전제 하기에 항상 '연속적인'(linear) 것으로 인식되며 그 공간 역시 중심과 주변, 앞마당과 뒷마당, 양지와 음지 등 이분법의 분류에 따라 단선적인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 위에 그려지는 삶의 복잡다단한 내용, 즉 다층(multi-layer)적인, 복수적인 시공의 의미는 너무 일상적이고 애매하며 번잡하다는 이유로 곧잘 쉽게 폐기되고, 기술하기에 적합한 연속적인 시간과 공간 속의 삶이 역사나 언론매체 뉴스의 전면을 차지한다. 복수적인 시간과 공간은 새로운 것, 유일한 것, 인과(因果)가 확실한 것―연속적인 것, 논리적인 것, 선악이 분명한 것 등―을 좇는 뉴스의 선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 단선적이고 연속적인 단수의 시공은, 의미나 도덕, 권위, 예술을 동원해 스스로의 시공을 고급화(gentrification)하 고 나아가 그것이 모두의 보편적 가치인 것처럼 일반화함으로써 중층적이고 비선형적인(non-linear) 복수의 시공을 축출시킨다. 그래서 일방적 가치의 시간과 공간이 남게 되고 그러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잡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삶이 기술되거나 무시된다. ●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선형적으로, 단수 개념으로 제한된다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넘어선다. 이미 비선형이 거대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디지털시대에서도 오히려 문제는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권력과 부, 권위라는 중심에 절대적 속성으로 환원시켰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대중문화, 매체의 맹위를 활용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세계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O시에 일어나 지하철 O호선을 타고 출근해 빠듯한 근무일정표를 채우고는 OO클럽에서 OO맥주를 한 잔 걸치거나 아니면 퇴근해 거의 비슷한 영상의 OO뉴스, OO토크쇼를 보고 웹사이트의 OO.com을 들어갔다가 하루를 끝마친다. 사용하는 물건, 즐기는 쇼나 프로그램은 점점 더 비슷해져간다. 디지털시대에도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열려지고 확장되기보다는 폐쇄되고 획일화되고 있다. ● 단선적이고 선형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아주 쉽게 지배/중심, 피지배/주변이라는 '수직 위계'의 선을 만들어 버린다. 아주 냉정한 폐쇄와 획일화이다. 그 선은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아주 쉽게 그 차이를 차별하는 양분법의 기준이 된다. 인간 vs 자연, 남성 vs 여성, 정상 vs 장애, 미 vs 추, 부자 vs 가난한 자, 중앙 vs 지방…. 위계에 의한 지배는 '차이'나는 것들을 차별하고 치워야할 어떤 것들로 인식하는 반면, 차이나는 것들은 생활 곳곳에서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주변으로 내몰리고 중앙에 예속된다. 그 작은 중앙은, 마치 태양을 향해 생의 모든 조건을 걸고 한쪽으로만 몸을 뻗는 해바라기처럼 수많은 주변을 거느리게 되고 주변은 중앙의 시간과 공간에 의탁해 자신의 시계와 나침반을 조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공간은 바로 지체(肢體)이자 낙오, 불행으로 규정된다. ● 양(陽)_역사_진보_문명_과학/기술_정치/경제_이성_도덕 ● 음(陰)_정지_노스탤지어 자연_느림_일상_몸_감성 ● 중앙의 시간 축과 공간 축 위의 삶이 양지 바른 앞마당에 끄집어내는 가치가 양(陽, the strong)이라면, 엄습한 뒷마당에 걸맞은 것이라고 내던진 것이 바로 음(陰, the week)의 분류에 해당하는 것들이리라. 이렇게 단선적인 중앙의 시각은 자신의 독주를 정당화하기 위해 음(陰)적인 내용을 수직적 위계로 짓눌러 복수의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역사를 늘 기술해온 중앙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악화시켜왔다는 점에서 보면, 단수의 시간과 공간은 삶의 매끈한 외형, 형식 속에서 삶의 속살, 즉 내용을 황폐화시켜가고 있다는 의심을 지워낼 수 없으리라. ● 양의 절대적 우위가 아니라 양과 음의 반려(伴侶)에 대한 관심은 황폐화된 삶의 내용에 대한 검토이다. 한쪽이 너무 비대해져 더 이상 앞으로 굴러가지 못하는 수레의 다른 한쪽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자 왜곡된 전체에 대한 처방이다. 복수(複數, plurality)는 공존(co-existence)을 향한 여정(旅程)의 출발점이며, 그 여정은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온전하게 체험함으로써 삶의 내용과 세상을 향한 눈길, 또 다른 시각들을 획득할 것이다. ●음과 양, 즉 '차이'는 긴장과 대립의 관계에 있으나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반려(伴侶)의 관계를 유지한다. 차이, 복수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는 '음과 양'이 단수의 시간과 공간에 좌절하고 상처받은 개체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다. 동양적인 음양은 사물 생성에 대한 추상적 인식론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뿐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시간, 사람과 장소로 확장해 어우러져 사는 지혜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끈다. 차이의 어울림을 '관계'의 핵심으로 파악했고 이에 따라 인(人)의 처신(處身)과 물(物)의 조처(措處)를 절제한 것이다. 절대화된 양의 시각에 음과 양의 어울림을 중시했던 동양적 자연관, 처세는 차이나는 것들의 위상회복에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중재_''_단채널 영상 스틸컷_2001

비디오아트를 위하여 : 빛과 어두움의 매체, 일상/소통의 매체 ● 빛과 어두움의 생성원리를 통해 현실을 탁월하게 재현하거나 재구성, 비평하는 능력을 가진 비디오아트를 국내 예술계가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모습은 형식적 측면에 치우쳐 매우 '단선적인' 양태를 보여준다. 주류의 시각이 사회 전반의 시간과 공간을 옥죄듯이 비디오아트가 담을 수 있는 많은 예술적 시도와 비평적 역할이 비디오-조각, 비디오-설치 등 형태적 측면에 편중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 비디오아트의 경우는 백남준, 박현기 등 비디오아트 1세대의 조각적 비디오아트로 시작되었고 이후 많은 후배 작가들이 비디오-조각(Video-Sculpture)이나 비디오-설치(Video-installation)에 참여해 이런 작업들이 비디오아트의 주류인 것처럼 만들 었다. 요즘 들어 영상표현 자체를 중시한 비디오-설치 작업들이 많이 늘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장관(壯觀, Spectacles)이나 기술적 과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비디오아트가 많아 매체의 기능을 인문적으로 확장하는데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비디오아트뿐만 아니라 예술의 생명은 매체가 갖는 기능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표현과 소통의 힘이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영상표현 자체만을 다루는 전시회가 거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비디오아트 편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기술적 매체에 대한 예술적 관심은 새로운 표현력의 개발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러한 매체의 기술적 속성을 인문적, 심리적, 문화적 매개체로 확장하는 역할 역시 예술가에게는 당연히 요구된다.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형식적 소비를 양산하는 비디오아트, 눈을 현혹하는 이미지로서의 비디오아트가 아니라 상상력을 여는 영상 이미지들을 통해 현실, 예술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하는 비디오아트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이다. ● 비디오그라피에 대한 또 하나의 관심은 컨텐츠(contents)로서의 가능성이다. 비디오-조각, 비디오-설치가 미술관이나 화랑이라는 전통적 미술공간을 전제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지만 비디오그라피는 공간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예술적 비전(vision)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창작과 수용의 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전통적 미술공간이 미술적 권위로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학/일상의 수직적 위계에서 일상을 계몽시켜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는 속성이 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갖는 일시점(一視點), 1인 내러티브(narrative)의 속성에 비해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그 내용으로 예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비디오그라피는 일상 속의 다시점(多視點), 다중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예술의 민주적 가치를 고양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 열려 있다는 점은 일상과 예술의 상호 참여 및 연대를 보다 원활하게 함으로써 예술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게 한다. 이는 예술의 표현적 성과를 통해 동시대의 민주적 가치를 확장하는데 도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 매체와 매체의 접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매체 적 속성은 비디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디지털기술의 발달은 매체와 매체를 원하는 대로 묶어내고 있다. 컴퓨터+통신=인터넷, 인터넷+TV=디지털방송, 인터넷+영상 콘텐츠=IMT2000(영상이동통신) 등 매체간의 상호접목은 일상과 예술, 매체와 예술의 접목을 활성화할 것이 확실하다. 1인 기술의 KBS, MBC가 다 못채워주니 SBS가 나왔고 그것도 안되니까 수많은 케이블TV, 위성방송이 나와 다중의 내러티브를 구축했다.(물론 공급자의 상품확대논리도 큰 역할을 했지만.) 현재 인터넷을 근간으로 한 정보통신이 일, 섹스/오락, 쇼핑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용도로만 쓰여지고 있지만, 매체와 매체의 놀라운 접목은 삶, 일상과 관련한 콘텐츠를 구조적으로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가장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예술영역은 매체의 속성을 공유하면서도 매체가 가지고 있지 않는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일 것이리라.

이형주_'+·-'_단채널 영상 스틸컷_2001

출품작에 대한 관심 : 비디오그라피의 여러 시각들 ● 「해, 그리고 달: 비디오그라피2001」에 출품된 비디오작품들은 위에서 언급한 '차이'를 삶의 또 다른 내용으로 인식하는 시각, 그리고 비디오아트의 기술적 특성을 통해 예술과 일상의 관계를 확장시켜줄 수 있는 작품들을 모았지만, 우선적인 관심은 그동안 예술계의 관심을 덜 받아온 비디오그라피를 한데 모아 창작 현황을 살피고 앞날을 조망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일주아트하우스의 물리적 공간 여건, 그리고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하면서 일상과 쉽게 조우할 수 있는 퍼블릭 억세스(public access) 개념―예술이 일상 속으로 개입하는 창작의 측면과 일반인이 예술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용의 측면을 아우른다―으로 비디오아트의 편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획의 관심 탓이었다. ● 요즘 적지않은 미술가들이 비디오-설치, 비디오-조각을 하면서도 비디오그라피를 진행하고 있지만, 기록적인 성격의 비디오그라피 보다는 앞서 얘기한 영상 콘텐츠 자체로 예술적 정체를 확인하고 이를 인문적 매개체로 확장하는 실험을 펼치는 작품들을 주로 선정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작가는 ▶︎김세진 ▶︎김준 ▶︎김지현 ▶︎배영환 ▶︎안상준 ▶︎양성윤+박정훈 ▶︎이강우 ▶︎이중재 ▶︎이형주 ▶︎전성호 등 모두 10명(1개팀 포함)이다. 일상의 소외된 시간과 공간을 되살리려는 작은 시도로 출품작들은 매우 일상적인 관심과 사건에서 출발할 것으로 요청받았다. ● 10인 10색의 차이를 보여주는 출품작들은 사물이나 현상을 모두 중층적으로 재구성하거나 비평하는, 삶의 비연속적인(non-linear) 연속극을 만든다. 지배적인 시간과 공간의 기술이 아니라 비연속적인(non-linear) 시간과 공간을 찾아내고 그런 시도가 삶과 예술의 내용으로 언제 어디서건 불 려나올 수 있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 역할을 수행하기에 '비연속적'이며, 차별받아온 삶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끌어 모아 퍼즐 맞추기를 진행하기에 연속적이다.(단수의 시간과 공간이 '전문적'으로 퍼즐 조각을 만들어내는 행위로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면, 복수의 시간과 공간은 퍼즐 맞추기로 삶의 파편들을 끌어 모은다.) ● 출품작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서 출발해(김세진, 양성윤) ▷비평적 매체로 위상이 회복된 일상(김지현, 이강우, 이중재), ▷사물(物性)에 대한 재인식(안상준, 이형주), ▷관계의 파편에 대한 관심(김준, 배영환) 등을 기행하며 '그랜드 비스타'(Grand Vista)의 위세에 숨죽여왔던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어루만진다. ● 김세진의 '되돌려진 시간'(R.e.v.e.r.s.e) 속의 시간은 지배적인 시간 개념의 역류를 통해 물리적 시간의 개념을 심리적, 비평적으로 되살린다. 일상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되돌리는 행위에 의한 이미지들은 주류가 강박적으로 만들어내는 흐름(flow)의 가치와 현재에 대한 강조를 뒤집어버린다. 그래서 심리적이며 비평적인 시공간이 만들어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관계, 시간과 일상의 관계가 재조정된다. ● 양성윤, 박정훈의 공간 역시 매우 비평적이다. 크고 밝은 공간과 대비되는 어둡고 좁은 지하공간에 대한 탐험을 통해 공간의 중층적인 매트릭스를 구성함으로써 무의식(無意識), 혼돈, 약자(弱子)를 의식, 질서, 주류의 관계 속에서 재활시킨다. 밝은 세계가 축출하는 혼돈과 무질서이지만, 그들의 공간은 마치 촛불을 들고 지하실을 내려가는 것처럼 불안하면서도 경건하게 삶의 속살에 재활의 불빛을 던지고 있다. ● 안상준은 물성과 인식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식의 틀을 확장하는 작업내용을 보여준다. 동양화 '고사관수도'에서 물에 대한 완상(玩賞)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고사처럼 물의 물성(物性)을 탐구하면서 물성과 인식이 상호 교차되는 장을 만들고 있다. 물(物)을 절대 개념의 틀에서 인식하기보다는 비교 개념으로 대하는 작가는 물(水)의 물질적 특질과 그것에 작가의 경험과 인식을 교차시켜 주체와 객체, 실재와 허상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탐구한다. ● 이형주의 작업 「+」(플러스), 「-」(마이너스)는 불확실성이란 틀 위에서 존재의 생멸(生滅), 있음과 없음의 의미를 탐구한다. 물에 잉크를 떨어트려 그 번짐과 모임의 전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은 결과에 짓눌려온 '과정'을 회복시키고, 인식의 스 펙트럼을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수평적 편재로 보여준다. low-technology의 매체를 인문적 매체로 확장시킨 작업들은 물과 잉크가 만드는 관계의 갖가지 양태들에 삶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교차시켜 삶의 내용이 갖는 모호성, 평면성을 신비롭고도 따듯하게 위로해준다. 자본주의적 체제 내의 이미지의 흐름에 관심을 집중시킨 김지현은 집단적 이미지 생성 방식의 문제를 건드린다. 남성, 자본이라는 주류가 만드는 성적 이미지, 상품적 이미지의 무차별적 유포, 유통에 대해 김지현은 쓴웃음을 자아내는 패러디로 대응한다. 입, 가슴, 다리 등 집단적으로 편식하는 성적 이미지의 이면을 순발력있게 뒤집거나 쇼핑채널을 통해 유통 가능한 예술개념을 역설적으로 실험하는 등 재구성된 이미지들은 집단적인 이미지의 일방 독주를 제지시킨다. ● 이강우의 이미지는 실재와 매체의 밀착 문제를 탐구한다. 이미지가 실제 위에 군림하고 가상이 실재보다 더 리얼한 이미지 시대의 흐름에 매체의 신체화로 역류하면서 일상의 바다를 항해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 역시 매우 정치적이다. 실재 위의 가상이 애써 본질을 던져버리지만, 그는 인식과 매체가 물질화된 것(사진)과 신호화된 것(비디오)을 교차시켜가며 이미지의 알리바이(본질 부재)를 심문한다. ● 이중재는 헤게모니(hegemony)에 역으로 헤게모니 게임을 시도한다. 현재의 상태(status quo)에 동의하도록 강요하는 헤게모니는 그 속성상 힘, 더 나아가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중재는 미국의 스크린쿼터 철폐 요구, 일상의 폭력 등 보다 시사적인 이슈를 통해 그런 속성을 까발리고 더 나아가 기존의 지배를 허물고 조롱하는 그람시의 역(逆)헤게모니게임을 도입, 표현의 비평적 기능을 활성화한다. 그의 작업에 실제 게임형식이 도입된 점도 흥미롭다. ● 관계가 상 대적이기보다는 절대적이고 그래서 상처받는 다른 한쪽이 생긴다. 김준의 영상작업은 관계 속에서 파편화된 대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온 몸에 물감을 바르고는 나른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그림을 그리는 낙지의 실상은 물감의 독성 때문에 처절한 생의 몸부림임을 기습적으로 알려준다. 문신을 새기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 역시 몸-정신의 강박적 관계의 파편을 보여준다. 파편의 위상 회복은 전체, 관계 항들의 공생을 위한 출발이다. ● 배영환의 작업은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들을 서사적 구조 속에 드러낸다. 그랜드 비스타(grand vista)에 포착되지 않는 사소한 것(trivial)은 곧잘 지저분한 것, 일상적인 것과 동일 부류로 취급되어 축출(exclusion)의 대상이 된다. 배영환은 서사와 서정의 구조 속에 사소함과 일상성을 배치시켜 그들의 위상을 강화(empowerment)한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익명적이지만, 조감도식으로 내려다보고 엿보는 그랜드 비스타의 장중함과 거룩하게 대비된다. ● 전성호는 영상을 통해 독특한 풍경의 일상을 재구성한다. 구성의 재료는 일상의 파편들이다. 화면을 꽉 채우는 헬스클럽의 신체 이미지, 하반신으로 축약시킨 도시의 거리 풍경, 틈 사이로 드러난 발들이 존재를 대신하는 화장실 풍경 등 그의 이미지들은 분절되고, 더 나아가 분열증적인 방사구조 속을 순환한다. 그러한 순환은 이내 전체에 대한 심문, 습관에 대한 비판 등 일상과 제도에 대한 비평적 상상력에 불을 지른다.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 파편화된 일상의 의미를 모자이크하는 치유의 제의를 보여준다. ■ 박삼철

Vol.20010302a | 해, 그리고 달 : 비디오그라피2001 ②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