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재현

책임기획_고충환   2001_0222 ▶︎ 2001_0415 / 월요일 휴관

홍지연_페스티발_실물설치_1500×300cm_2001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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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강홍구_김재웅_김창겸_박혜성_배준성 서상아_우중근_이동기_정주영_홍지연

성곡미술관 별관 1,2,3층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www.sungkokmuseum.com

영향사, 이미지의 미궁

1. 이미지 ● 이미지는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그 자체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 장 보드리야르의 '이미지의 연속적인 단계에 대해'- ● 나무를 깎아서 조립해 만든 조악한 총을 가지고 놀던 시절이 있었다. 나무 총은 언젠가 플라스틱 모조 총으로 바뀌었으며, 제법 실제 소리를 그럴 듯하게 흉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모니터 상에서 화상으로 만나게 된 총은 실제 총을 거의 완벽하게 닮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현실감을 갖게 한다. 꼬마들의 놀이를 대변해주는 장난감 총의 이러한 역사는 물신주의로부터 탈물신주의로, 감각주의로부터 개념주의(모든 감각적 경험이 뇌의 생물학적 성질에 한정되는, 일종의 '환영'의 허구적 경로를 통해 감각적 경험이 이루어지는)에로의 변화를 말해준다. 감각의 점진적인 탈각으로부터 마침내 순수 이미지에 이어진 이런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학생이 인터넷에 폭탄 제조 유료 사이트를 운영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접속한 것으로 알려진 중학생이 자살한데 이어 초등학생이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요즈음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반사회적(?) 사이트에 관련한 한 일간지 기사다. 뜬금없이 이런 기사를 '인용'한 이유는 물론 일부 사이트가 끼칠 수 있는 반사회적 해악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며, 그런 성격의 지면도 아니다. 윤리적인 문제와 미학적인 문제가 구분되지 않은 하나이긴 하지만, 편의상 이 둘을 분리시켜서 최근의 이런 일련의 현상과 미학적인 측면이 갖는 관계를 따져보자는 것이 이 글을 인용한 의도이다. ● 사이트는 무엇보다도 소통 수단이며 통로이다. 사이트는 엄청난 이미지와 정보가 들고나는 정류장이다. 사이트는 엄청난 사실(최초 입력된 사실 역시 일차로 가공/재현된 것이긴 하지만)이 익명의 이미지로서, 정보로서 조작되고 왜곡되고 유포되는 공장이다. 이미지는 정보이고, 정보는 곧 이미지다. 인터넷을 신경망에 비유하는 것에서 보듯이 인터넷은 그 자체 유기체이며 신체이며 몸이다. 그리고 삶 자체이며 사회이고, 물론 정신이기도 하다. 삶 자체인 인터넷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흔히 그렇듯 혈관 속을 경유하는 피에 비유해도 그 의미는 다를 것이 없다)는 이미지이고 정보이다. 문제는 몸의 세포가 다름 아닌 이미지이고 정보라는 사실에 있다. 이미지는, 정보는 사실일까, 혹은 그렇지 않으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환영의 허구적 경로를 통한 감각적 경험에 길들여진) 우리의 몸은 사실로 구조화된 것인가, 아니면 한낱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 여기서 우리는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그리고 '미디어는 마사지'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아마도 미디어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넘어 인간의 몸, 정신, 감각과 동일시되는 어떤 경지를 일컫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신체를 흉내낸 미디어의 몸의 유비(喩比)가 아닌, 인간이 미디어고 미디어가 인간인, 몸이 미디어고 미디어가 몸인 어떤 경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미디어 즉 이미지가 인간이고 몸이고 삶이고 세계인 셈이다. 어느덧 이미지는 삶에 대해, 그리고 세계에 대해 사고할 요량으로 인간이 자기로부터 분리시켜 대상화할 수 있는 경계를 떠났다. 이런 인식은 논리의 해방도, 한낱 추상도 아닌 현실이다. 사이트를 운영한 학생이나 접속한 학생이나 사이트로부터 제공받은 정보를 실천에 옮긴 학생이나 그 모두에게 정보는 허구가 아닌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정보는 이미 나로부터 분리시켜 대상화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니터 상의 사이트에 젖줄을 대고 있는 세대에게 정보는, 이미지는, 재현은 '사실'이다. 자기 외부로부터 단절된, 비교할 수 있는 그 무엇도 가지지 않은. 이들 세대에게 미술이란, 작업이란 어떤 형태로 다가올 것인가.

우중근_아담과 이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 에나멜_250×125cm×2_2001

2. 재현 ● 언젠가는 이미지 자체와 그것에 붙들린 이름이 함께, 긴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미끄러지는) 상사(相似, similitude)에 의해, 탈(비)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 미셀 푸코- ● 이미지는 원래 허구, 환영, 귀신 등의 실재하지 않은 것들을 뜻했다. 주로 죽음과 관련한 영적인 경험/실체에 그 맥이 닿아 있는 말이었다. 이런 이미지의 어원은 진작부터 예술이 비현실과 초현실, 상상력, 예술의 자율성과 추상 등의 실재하지 않은 것들과 관련을 갖는 것임을 말해준다. 나아가 아무리 현실에 기초한 사실주의나 현실주의의 실천 역시 이런 '허구'의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술 특유의 '재현'의 속성 탓이다. 예술 을 제외한 여타의 삶의 양상이 나름의 자기 목적성을 갖는 것임에 반해 예술은 언제나 세계/삶 자체가 아닌, 세계/삶의 어떤 양상을 '재현'하는 것으로서 존재해왔다. 모방이니 일루전이니 환영이니 프리즘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예술의 이런 재현의 성질을 겨냥한 것이다. ● 이렇듯이 허구에 기초한 예술의 재현이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향해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주관정신과 객관정신, 그리고 절대정신을 경유한 정신이 맞닥트린 지점에서 예술을 장사지낸 헤겔이나, 예술과 죽음과의 운명적인 관계를 어원적으로 파헤친 레지스 드브레, 자기 논리의 벼랑 끝에서 예술의 죽음을 발견한 클레멘테 그린버그, 그리고 니체와 아르토, 사드와 바타이유가 각자 경우와 입장은 약간씩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같이 이런 예술과 죽음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물질적인 세계를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 속에 풀어놓는 바슐라르 역시 이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이는 물질적인 세계를 넘어선(부정) 연후에 만난 어떤 경계일 것이다. ● 이렇듯이 예술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다름 아닌 허구 탓이다. 예술에서의 허구는 회화의 기원을 언급한 나르시스의 신화에서, 그리고 조각의 기원에 대해 언급한 피그말리온의 신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허구는 너무나 공허한(삶/실제에 이어진 최소한의 근거마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행위 자체로부터 의미를 생산하지 못할 때 맞닥트리는 어떤 것이다. 원래 무의미한 것을 의미로, 그나마 외부로부터 단절된 불구의 의미로 탈바꿈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다. 아마도 창백한 하얀 캔버스는 이런 예술가의 하릴없이 부유하는 사념의, 관념의, 권태의 바다를 은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일단 예술이 허구이자 재현임을 인정한다면 예술에서의 임의성과 자의성 역시 인정해야만 한다. 허구나 재현은 여하한 기준에도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기준이 없다는 말이다. 예술에 대한 모든 기준은 예술 자체와 마찬가지로 임의적이거나 자의적이며, 최소한 어떤 한정된 문맥/맥락/콘텍스트의 전제 하에서만 의미를 갖는 불구의 어떤 것이다. 재차, 예술의 임의성과 자의성을, 그리고 예술에 대한 기준의 임의성과 자의성을 인정한다면, 예술은 아무 것도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예술의 열려진 개념이란 말은, 그리고 실현된 어떤 것이기보다는 언제나 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예술에 대한, 그리고 예술의 기준에 대한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이 적지 않게 제기되었지만, 언제나 당대적으로, 분파적으로 재정의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 역시 이런 예술의 열려진 개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실현된(물질적인, 감각적인 조건을 갖춘) 어떤 것이기보다는 어떤 충동을 자극하는 현재진행형의 심리적 계기일 따름이다. 여타의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물질적인 형태에 기울어진(의미를 풀어놓기보다는 고착화하는) 조형예술은 자신의 이런 물질적인 성질로 인해 오히려 더 불구의 예술이 된다.

이동기_가상 정신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1

3. 재현의 재현, 유산(遺産) ● 모든 화가들은 그의 머리 속에 회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즉 회화의 전통이 그림의 진정한 대상이 된다. 그가 그리는 모든 것은 회화의 전통에 대한 경의와 비평이다. - 로버트 마더웰 - ● 이번 전시는 미술을 단순히 미적 향수를 자극하는 감각적 대상으로서보다는 어떤 의미론적인 정체를 함축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그래서 읽어내야 할(쓰여져야 할) 텍스트로서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미술사를 그 자체 완결되어진 어떤 정적인 구조로서보다는 분파적인 맥락 속에서 다시 읽혀져야 할 동적인 대상으로 재맥락화한다. 미술사를 그 자체 폐역적인 죽은 형식의 저장고로부터 언제고 차용할 수 있는 한낱 소재적 차원으로 풀어놓는다. 기존의 미술사에 대한 재독서와 재구조화, 그리고 재기술의 실천으로써 기왕의 미술사를 보편사로, 그리고 개별사로 재생시키는 것이다. ● 전시가 겨냥한 차용/재현의 재현/메타 재현의 대상으로서 미술사는 물론이거니와, 동시대의 보편적인 삶을 대변하는 철학, 정치, 사회, 경제의 반영인 미디어들, 이를테면 신문이나 잡지 등의 인쇄 매체, 다큐멘터리 기록물이나 영화 등의 영상물을 비롯한 모든 소통을 위한 매개체를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한마디로 모든 정형화된 텍스트가 그 대상이다. 정형화된 텍스트를 열려진 텍스트로, 굳어진 의미를 연성(軟性)의 유기적인 의미로 탈바꿈시킨다. 더러는 미술(예술)의 정체를 변질시키기도 하고, 최초의 재현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의외의 지평을 열어 놓기도 한다. 이렇듯 변질에 따른 의외의 지평의 개시는 모든 텍스트가 내재한 궁극적인 의미에의 의구심과 이에 따른 끊임없는 의미의 유보(留保), 의미들의 수평적인 나열에 그 맥이 닿아있다. ● 전시는 무엇보다도 미술이 '재현'이라는 전제 하에, 이미 이렇게 내려진 답에 대해 논평하는 형식을 띤다. 재현의 재현 곧 메타 재현의 전제로써 미술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재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재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또 다른 재현일 수밖에 없는, 이중, 삼중, 사중...재현인 점을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답에 대한 기대를 배반한다. 전시는 재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기초함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스스로 비켜 가는 모순을 인정함으로써 재현을 끊임없는 자기 복제와 반복과 나열과 열거의 미궁 속에 빠트린다. 결국 전시는 재현에 대한 답을 구하지 않는다. 대신 미술은, 미술사는 그저 재현의 자기 복제와 반복과 나열과 열거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미술사를 영향사로, 논평과 주석(註釋)의 역사로, 쌍방 소통의 역사로 전이시키며, 반복 덧칠된 영향사를 사(史)적 맥락으로부터 한낱 소재적 차원으로 풀어놓는다. 이렇듯 덧입혀진 메타 재현의 열거로써 동시대에 영향사가 존재하고 가동하는 방식이 더 이상 생산이 아닌, 재맥락화를 위한 소비가 되고 있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 합성으로써 조작된 이미지를 다룬 강홍구, 김홍도와 신윤복으로 대변되는 전통 풍속화와 독일의 풍속화랄 수 있는 표현주의 계열의 작업을 오버랩한 것으로써 리얼리티의 의미를 묻는 김재웅, 김홍도와 정선의 회화를 부분 차용해 해체적 방식으로 재맥락화한 정주영,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명화 이미지들을 발췌해서 이를 실연(實演)한 박혜성, 미술사 이미지에서 나르시스의 자기 반영성을 보는 우중근, 주문 제작된 조상(彫像)에 대해 이미지의 저작권을 묻는 김창겸, 사진 이미지와 유리판에 그려진 이중 그림으로써 그 '차이'에 주목한 배준성, 미술사의 알레고리와 개인사의 알레고리를 혼성한 것으로써 알레고리화의 복원을 시도한 서상아,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혼성한 아토마우스로써 혼성 캐릭터를 다룬 이동기, 그리고 홍지연이 종교화의 이콘을 상품의 논리와 겹치게 함으로써 혼성 모방을 실현한다. 이들 참여작가들의 좀더 밀착된 작품론을 통해서 '재현의 재현'전에 대한 다양한 양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고충환

Vol.20010305a | 재현의 재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