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획으로부터

이순종 드로잉展   2001_0314 ▶︎ 2001_0323

이순종_미인도_인조머리카락_20×7cm_2001

조성희화랑(폐관)

5년전 이순종은 미군부대와 관련된 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남성문화의 상징적 기호들을 여성의 주관적이고 해체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해낸 바 있다. 그녀의 과거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드로잉 전시의 인스톨레이션에서 여전히 감지되는 일관된 관심사, 즉 여성의 해체적 감수성, 세계에 대한 다중적 인식, 감추어지고 억압된 성에 대한 은유 등을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여전히 여성적 경험과 관련된 '신체-머리카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5년전, 혹은 그 이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번 전시가 이전 전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해왔던 '사물에 대한 여성적이고 주관적인 인식의 표현작업'을 동양적 전통의 화두話頭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화두란 다름아닌 '일획'인데, 만물의 시작이자 표상의 근원이면서 협소하게는 말 그대로 그림을 시작하는 처음의 획을 의미한다. 이순종이 차용한 이 일획 개념은 이 전시의 주된 소재가 된 머리카락 한올로도 나타난다. 머리카락 한올은 여성의 신체적 인식과정을 상징적으로 표상한다고 볼 수 있으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무의식의 혼란스러운 표출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 화선지 위에 먹과 세필로 그린 동양 여인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들이 조각가로서의 그녀의 경력과 대비되어 이채롭게 다가온다.동양화의 기본 필법과 묵법을 무시하듯 꼼꼼히 그려낸 여인의 얼굴과, 화선지 위에서 잘 조절되지 않은 수묵의 어설픔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들은 그 소박한 기법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인해 동양화가의 작업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특히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등장하는 함초롬한 여인의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꿈틀거리는 머리카락들에서는 억압된 조선여인을 해방시키는 열정과 힘을 느낄 수 있다. ● 한편 수묵 드로잉의 연장작업으로 인조머리카락을 이용하여 전시공간을 드로잉하는 설치작업들에서 인조머리카락 한올 한올은 화선지 작업을 채우고 있는 세필의 머리카락을 대체한다. 특히 흰색 바로크풍 액자앞에 팽팽하게 당겨진 한올의 검은 머리카락은 서구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정작 내용은 텅 비어있는 우리네 무국적 문화 앞에 들이미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한올의 머리카락이야말로 앞으로 이순종이 풀어가야 할 작업의 방향을 포괄하는 '일획'이 아닐까? ● 전시장 중앙의 천장과 바닥을 연결하고 있는 '네 기둥' 작업은 예리한 네가닥 머리카락을 각각 기둥으로 설정하고, 이로부터 부피가 느껴지는 사각의 입방체 기둥을 만들려고 하는 점에서 작가의 사물에 대한 상대주의적 접근태도를 확인시켜 준다. 또 주의 깊은 관람자는 이 네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허의 공간이 『네 기둥』들의 장력에 의해 실의 공간으로 지각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취하게 될 것이다. ● 전시장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또 하나의 작업으로『산』을 들 수 있다.전시장 구석의 네가티브 모서리에 붙여진 잘게 부순 머리카락 조각들은 흰색의 바탕과 이질적인 교접을 이루면서 기묘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단순히 더럽혀진 벽으로, 혹은 점들의 추상적 드로잉으로, 혹은 신체의 일부같은 구체적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징그러울 수도 있는 머리카락 조각들은 세개의 선이 만나는 움푹한 공간에 수북히 뿌려 놓았다는 점에서 섹슈얼하다. 그러나 이순종은 짐짓 그러한 이미지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그 앞에 '산'이라는 제목을 갖다 붙이는 트릭을 구사한다. ● 그밖의 과거의 그릇이나 전구 작업들과도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는 『꿈 꾸는 사람』은 작가가 무의식 중에 추구하는 성적性的 일치의 세계, 곧 상호이해가 결코 불가능할 것 같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아득한 괴리를 무화無和시키는 무성無性의 세계를 표상하는 듯이 보인다. 『무제』의 타이틀을 단 오브제 작업들, 곧 벌레가 꾄 다래머리와 김 처럼 납작하게 눌려진 머리카락 판으로 만든 주머니 작업 모두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이율배반적 욕망을 표출한다. ● 전시공간을 드로잉하는 형식을 취한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또 다른 산등성이를 넘고있는 이순종에게 이 전시가 의미있는 전기로 작용할 것을 기원하며 글을 맺는다. ■ 김혜경

Vol.20010312a | 이순종 드로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