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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1_0328_수요일_06:30pm
경인미술관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Tel. 02_733_4448
민중 심성의 소박미 ● 1. 송만규와의 만남은 80년대의 초반의 기억으로부터 올라간다. 나는 민족주의 예술론을 주창하면서 기성화단을 공격했던 유신시대에 의기투합한 작가와 평론가들이 모여 1979년에 '현실과 발언'을 창립하고 그 여파가 번질 무렵 1981년부터 목포대학 전임강사로 내려오자 5월광주항쟁의 현장에 참여했던 홍성담을 자주 만나 운동의 조직모의를 은밀히 하였고 내 삶의 전환적 계기를 주려하였는지 1983년도 재임용에 탈락하였다. 살얼음판 같은 대학 풍토에서 운동권의 벌판으로 내몰린 나는 오히려 의기 충천하여 투쟁의 매체로써 강력한 시민판화운동을 주장하면서 모임의 조직을 가지려는 곳에 격려 차 여기저기 뛰어다니었다. 광주에서 불붙은 판화운동은 홍성담, 최열, 김경주 등이 움직이었고 익산에서는 송만규와 윤양금 내외가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고군분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북상한 서울에서는 김봉준, 홍선웅, 유연복, 김준권 등의 가세가 전국 대학으로 번지는 들불이 되었다. ● 여기에 1984년도의 '해방 40년 역사 전'이라는 전국순회 전은 주로 대학, 백화점, 성당의 공간을 맴돌았으나 낯선 관객에게 민중미술의 인지도를 높이는 폭발력을 더욱 발휘하였다. 이때 지역으로 작품을 운송하고 전시 배열하는데 최열, 송만규의 노고가 컸던 것을 고맙게 기억한다. ● 유달리 눈이 크고 곱슬머리 미남형인 송만규는 항상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며 조직모임의 논의에서 주로 경청하는 쪽인데도 내게 손을 들어주는 일이 많았다. 운동에도 주도세력이 있다면 서울세와 지방세가 있고 급진파와 신중파가 정국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립하기 마련인데 나는 조직의 통합을 중시한 중도적 태도 탓이었는지 양쪽에서 내몰리는 '꼰대' 취급을 받는 세대 교체론의 표적이 되곤 하였다. 나는 지금도 지도자를 키우지 못하는 이 같은 풍토가 구심력이 없고 원심력만 작용하여 운동권의 조직이 풍지박산하게 되었던 원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 민중미술 판에도 갈등이 터져 나와 마침내 지방세와 급진파가 어울린 '민미련'이 결성되어 홍성담, 최열, 송만규가 '민미협' 에서 떨어져나갔을 때 적극 만류한 나는 이들과 동고동락하였던 만큼 가슴이 쓰라렸다. 분열을 틈탄 노태우 정권은 이들을 표적 삼아 사냥몰이에 나셨다. ● 민미련이 벌인 민중미술운동의 최대 행사이었던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전의 슬라이드가 평양에 감으로써 홍성담, 최열은 감옥에 가고 송만규는 도피하는 수난의 세월이 더욱 민중작가들 사이에 연대의식을 깨는 깊은 상처와 앙금을 남겼으리라고 본다. 그 후 민미련의 해체선언으로 사실상 운동의 대단원은 막이 내린 셈이었다. ● 나는 좀더 적극적으로 이들을 돕지 못한 것이 아쉬웠어도, 신의와 정리마저 변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 20년이 지난 세월의 감회이다. ● 그리고 지금 운동으로서 무기력한 민중미술이 조직의 파산선고 직전에 왔을 때 내가 붙들어 매는 일에 몸소 다시 나선 것은, 예술의 정체성 상실과 혼돈의 극한 오늘의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의 생명 뿌리는 민중미술일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자각, 이전에 갖지 못한 확신이 운동바람이 지난 세월의 깊어짐에서 저절로 도달하였기 때문이며 서구의 어떤 예술사상이나 신진이론에도 맞설 수 있는 내 사고 뿌리의 자생적 토대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겨울의 언 땅이 메말라 비워있는 것 같아도 봄이오면 초록의 새싹이 나는 것은 땅 속의 숨은 뿌리의 자생력이 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의 뿌리도 이와 같음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지? ● 그래서 조직의 껍데기만 남아 갈팡질팡하는 작가들에게 민중예술의 뿌리, 그 미학적 구심력을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나이 들어 자연이 가르쳐주는 이치를 이제야 나는 터득하고 있다.
2. 그간의 만남이 적조하였던 송만규가 자신의 사경산수화를 들고서 내게 글을 부탁하려 왔다. 지금껏 그가 그려왔던 민중소재의 그림을 보아왔던 참에 이번 전시의 산수화들은 의외스런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생각의 모든 것을 저 산과 강물 속에 모두 흘러버리고 씻어내기 위해서 돌아다니며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 그렇게 말한 동기가 지친 삶의 피로에 대한 세상적 도피인가 아니면 자연을 통하여 새로운 개안의 세계를 얻고자함인가 그가 돌아간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시 삶의 현실을 열심히 변혁적으로 파헤쳤던 대다수 작가들이 서울의 변두리로 떠나 있고 또한 탈출을 꿈꾸고 있다. 나 역시 목포에서 해남 구석으로 둥지를 틀었지만, 세상을 도피한 것은 아니다. 온갖 첨단적인 것을 새로움의 미학으로 치장하는, 서울이라는 도시예술의 현주소에 희망을 걸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예술은 문명의 속도에 따라 변화하고 변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지만, 그 변화의 외피 속에 숨은 불변함의 생명, 항존성의 실체를 체득하는 곳은 서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존한 문명, 예술보다 크고 항구적인 자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술의 위기, 그 정체성의 혼란이 왔을 때 밭을 갈아엎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은 자연만이 주는 것이며 자생력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는 자각은 서양적 사고방식으로 체득할 수 없다. 서양이 이룩한 자본문명의 패러다임 속에서 수정이나 혁신론을 제기함으로써 새로움의 진보 신화를 재생산해 내는 사상, 개념의 틀 가지고 해득할 수 없는 것이다. ● 자연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송만규의 생각은 더 큰 것을 얻으려는 갱신의 재생 감정, 누천년 지속한 한국인의 사유감정, 그 태생의 예술로 돌아감이다. 이같은 송만규의 사경산수화 선택은 아무런 자각 없이 취미적으로 출발한 산수작가와 다르다. ● 노자가 최상의 지식은 무지이다고 할 때 아무런 자각 없는 태생적 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지식을 섭렵한 다음에 모두 버리는 경지로서의 지혜임을 상기한다면, 송만규의 선택은 민중미술 운동의 한복판에서 온갖 풍랑을 겪은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소재의 버림과 취함에 다른 기법이나 감회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 송만규의 초기 민중그림에 보인 기법은 서투르고 어수룩함을 강조하는 못난 그림-처음 그림에 입문하는 초년생의 솜씨 같은 것이었다. 대개 민중작가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저마다 데생 솜씨를 발휘하는 개성적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래서 몇몇 뛰어난 작가들이 화단의 주목과 평가를 받았던 것이라면 송만규, 김봉준, 이상호 등을 비롯한 일단의 작가들은 못난 그림을 내보임으로써 미술교육의 관성과 개인적 세련성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소박한 민중 심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라 생각한 것이다. 미술사에 소외된 민화와 같은 익명성과 집단성의 표출은 못난 그림-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의 공유는 시민판화의 맥락과 같은 발상이었다. 시민과 작가 사이의 경계 허물기는 민중운동의 첫발인 셈이다. ● 잘난 그림에 익숙한 평가 관성 때문에 나 역시 한때 오해하였으나 곧 잘못임을 알았다. 노자가 말한 자연의 졸박, 소박미가 한국미의 핵심임을 깨달을 때 이들 못난 그림의 출현은 중국과 북한에서 보는 농민화, 인민화 등의 공동체 그림처럼 전문적 잘난 그림과 짝을 이루는 민중미학의 두 축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운동 진영에서는 이를 미학적으로 심화시키는 이론적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정치적 외풍과 미술풍토의 관성에 밀려 못난 그림의 유행은 사라졌다. 사실 작가들이 잘난 그림을 지향하는 것은 쉬워도 못난 그림을 그리기가 더욱 어렵다는 술회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광주의 박문종이 개인적으로 이를 끈기 있게 스타일화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데생력이 약해서 못난 그림을 절로 택한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는 송만규의 경우도 생길 수 있으나 사실 얼마나 섬세하고 유연한 기법의 소유자인지 그의 '93년 개인전이 이를 모두 보여준다. 자기 이웃에 사는 서민들의 초상과 삶의 소박한 풍정이며 역사 현장을 담담하고 온화한 색채 분위기로 표현하는데 팔목과 손등의 동맥핏줄까지도 선연하게 드러내는 치밀한 묘법을 구사한다. 흔히 주제 접근의 극적 구성력과 과장된 연출력이 없음으로써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 드문 편인데, 이는 어디서나 잘난 척 않으려는 송만규의 성격, 겸허하고 소박한 심성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 어찌보면 그의 못난 그림에 대한 오해를 작가적 전문성으로 돌려보려는 과도적 모습이겠는데 그의 심성은 변함 없이 그림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년간 공식 개인전 활동을 중단한 긴 휴식을 취하더니 돌연 전통적 필묵법을 이용한 사경산수전을 들고 나왔다. 그간에 사귄 벗들 중에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의 모습도 보인다.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전주에 살면서 그는 김용택 시인을 만나 급속하게 서울식으로 변화하는 도시의 속성에 빠지지 않고 자연과의 교감하는 예술의 큰 의미를 깨운 것 같다. ● 그래서 스케치북이나 사진기 들고 사경의 소재를 찾아 들락거리는 작가들과 달리, 바랑 메고 구름 따라 물 따라 가는 학승처럼, 남도의 산천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정작 버릴 것과 얻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이 드는 것을 화폭 속에 담아내고 있다. 주로 그의 사경산수 속에 일관된 구성의 흐름은 강을 중심에 두고 전후 좌우로 전개되는 산과 들녘, 그 안에 묻혀 사는 농가의 점경들이다. 개개의 작품 편린으로 감이 잡히지 않더니 전체의 모습을 편람하니 파노라마적 연속성이 보인다. 그의 말로는 전주, 남원 인근의 하천과, 지리산을 끼고 흐르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여행하면서 잡은 사경이라는데, 기행산수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 산세 따라 강의 흐름은 유장하고 급박하며 돌연한 물굽이와 깊고 얕음의 변화가 무진한 흥취를 자아내는데 우리네 강- 특히 남도쪽 강은 중국의 강처럼 넓고 긴 유장함도 아니고 일본의 강처럼 깊고 빠른 것도 아니 여서 얕고 느림이 호수 같아서 강변으로 모인 논밭과 마을이 많으며 어머니의 젖줄 같은 느낌이 든다. 이같은 어머니의 젖줄이 우리의 오순도순한 삶과 예술을 길러내었음을 시와 노래로써 잘 알려있는데 송만규의 섬진강 기행 산수는 이를 확인하듯 담담히 겸허하게 보여준다. ● 섬진강을 따라 가보면 잘난 산세, 풍광명미한 명소도 많은데 송만규는 이를 피하여 못나고 평범한 산과 강변, 그런 곳에 모여 사는 마을의 점경만을 애정의 눈길로 잡아내고 있다. 역시 민중 심성의 수맥이 20년 세월 속에서도 흐르고 있음을 어찌할 것인가? 모든 것을 다 흘려보내도 버릴 수 없는 마지막 심성의 뿌리가 산수의 자연과 함께 있음을 송만규는 늦게 자각하였던 것인가? ● 내가 보고 싶고 원하여 쓰고 싶은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 그러함에도 낙동강과 영산강은 상류의 큰 도시와 공업지대 에서 흘려보낸 오염물질로 죽어버린 강, 허울만 남은 강이 되 버렸고 그나마 개발바람이 늦은 탓에 아직도 살아있는 섬진강은 우리 생명의 희망처럼 남아있는데 죽어간다는 징후의 목소리가 높다. 자본바람에 눈먼 갖가지개발의 질병이 섬진강 쪽으로 몰려들고 있다. 어찌해야하는가, 21세기의 문턱에서 예술은 답을 찾아내야 한다. ■ 원동석
Vol.20010322a | 송만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