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없는" 세상

책임기획_강수미   2001_0328 ▶︎ 2001_0408

홍경택_서재3_캔버스에 유채_2001_부분

참여작가 김미형_홍경택_강수미_유승호_함연주_정용훈

인사미술공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60_4722

시각의 생태계 ● 우리가 현재 미술이라고 부르는 문화는 빛과 어두운 심연의 거친 대립만이 존재하는 사물들, 존재들의 처녀림에서 나와 시각적인 것, 미적인 것, 문화적인 것들로 그 모양새와 성격이 변이한 것들의 퇴적물, 집적물이다. 아니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미술가들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한 곰브리치의 말을 따른다면, 형식화되고 유형화된 미술은 존재하지 않고, 당대의 작가와 작품(업), 작품(업)과 그것의 향수자(관람자), 작가와 그 시대의 환경 등이 역학관계를 형성해낼 때 만들어진 새로운 어떤 것, 그리하여 미술로 이름 붙여진 것 변형물, 가시성의 결과물일 것이다. ● "당대의∼"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영향 관계에서 형성되는 어떤 것이다. 한 작가가 속해 있는 역사적 시간대와 공간적 특수성은 그 작가의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고, 그렇게 형성된 작가의 고유한 정체성은 그가 무엇인가 미적인 것, 시각적인 것-적어도 우리가 작품(업)이라고 그것을 명명할 때-을 생산해낼 때 자연스럽게 스며져 나온다. ● 그렇다면 "당대의 미술", 혹은 "동시대의 미술동향"에 대한 지형을 그리고자 할 경우 필연적으로 소환되어지는 것은 시대적 상황, 그 상황에 위치한 작가, 그 작가의 세계관 혹은 현실인식, 그에 따라 형성되는 작가의 정체성,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작품(업)일 것이다. ● 인류가 비인식의 사물, 존재에 대한 추상성을 인식 가능한 것,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 표현-재현의 미디엄은 크게 세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레지스 드브레의 구분을 따르자면, 우상, 문자의 시대(로고스페르,logosphere), 인쇄, 예술의 시대(그라포스페르,graphosphere), 시청각, 영상의 시대(비데오스페르, videosphere)가 그것이다. 우리는 영상, 비데오스페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계, 미디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우리의 생활과 사고에 섞여 있으며, 시각생산물에도 마찬가지이다. 21세기의 우리는 여전히 문자 매체를 사용하며, 그것을 인쇄하고 복제하여 유통하고, DVD, HDTV 등의 영상기기를 통하여 고선명, 고화질의 이미지를 즐기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미술, 작가, 작품(업)에 대한 논의는 어떠한 매체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동시대 환경, 지형 안에서 작가 자신이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정체성의 문제일 것이다. ● 다시, 시각의 생태계 ● 비데오스페르(videosphere)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그럼 모두 호모 비데오쿠스(Homo videocus:이런 용어가 가능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영상 시대의 인간이란 의미로 조어한다.)인가? ● 과거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지우지 못했고, 영화의 발명이 사진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고, 가정용 비디오의 발명이 우리의 발길을 영화관으로부터 돌려놓지 못했듯이, 모든 매체와 그 시대는 내속하고 겹쳐진다. 그 속에는 완충지대가 있고, 불분명하지만 접촉하고 있는 부분과 성격이 있으며, 연대기적으로 완전하게 단절되지 않는 시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시대와 공간 속에서 시각의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미술가, 작가들 또한 완전히 고립되거나 혹은 완전히 시대에 용해되어 작업해 나갈 수는 없다. ● 영상과 디지털 혁명의 시대, 멀티 미디어 초고속 통신망의 시대에도, 그 영상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빛과 색이며, 인터넷의 정보는 그 컨텐츠의 질에 달려있다. 결국 이러한 매체가 문제가 아니라 매체를 다루는 주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 김미형, 홍경택, 강수미, 유승호, 함연주, 정용훈 이들 6명의 작가들은 어찌 보면, 현대의 비데오스페르적인 매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전통적 개념의 미술에 가까운 의미의 작업을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매체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들을 이미 논의가 끝난 미술의 담론 속에 위치 지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나 "밖의" 세상과 나 "안의" 세상이라는 그 지점을 왕복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립되어 사물들, 존재들의 처녀성을 경험하고 가지 않은 길을 가려하고, 한편으로는 동시대적 현실인식을 공유하면서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존재하는 타인의 효과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 이들이 보여주는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여러 이미지에 혹은 여러 사물에 덧씌어져 있지만, 그래서 작품(업)들은 어느 면에서는 폐쇄적이고 편집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가볍고, 모방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이기 보다는 보수적인 면에 가까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의 정체성과 작품의 정체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끊임없이 자기 완성에의 지점을 모색해 가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이 내면성으로의 귀착이든, 그림의 원체험으로의 복귀이든, 호모 비데오쿠스로의 진화이든... ● 마지막으로 이들 작가들에게 우스운 질문이 있다. ● 왜 홍경택, 유승호는 컴퓨터 상에서 라면 간단히 '복사하기', '붙여넣기'로 해결될 그 사물들, 문자들을 육체적 고생으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그리는가? 그리고 왜 강수미는 컴퓨터에 연결된 스캐너라면 10초 정도의 시간으로 간단히, 더 분석적으로 읽어낼 세잔느나 마네의 그림을 불완전한 손(手) 기술로 재현하는가? ■ 강수미

Vol.20010327a | 타인 "없는" 세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