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간, 시간의 얼굴

책임기획_최봉림   2001_0330 ▶ 2001_0428

김옥선_방안에 선 혜정_컬러인화_125×160cm_2001

초대일시_2001_0330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최은화_이강우_이선민_조용준_김옥선_이경수_김현필_최광호

세미나 2001_0421_토요일_02:00pm_토탈미술관 삶의 기호로서의 신체 사회_최봉림 발제_최용호_이영준

토탈미술관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5-3번지 Tel. 02_379_3994

지나간 삶, 현재, 다가올 시간 ● 삶과 시간이라는 닳아빠진 추상명사를 어떻게 새롭게 볼 수 있을까? 삶과 시간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상투적 서술에 의존함 없이 어떻게 눈앞에 나타낼 수 있을까? 삶과 시간의 묘사에서 사랑과 인내의 궁극적 행복만을 선포하는 종교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떨굴 수는 없을까? 거짓 설교와 허튼 행복론이 설파하는 삶과 시간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속에서 느끼는 시간성의 에피파니 epiphany, 일상의 시간 속에서 체험하는 삶의 현현(顯現)을 드러낼 수는 없을까? 「삶의 시간, 시간의 얼굴」에 참여한 작가들이 다양한 사진적 방법을 통해 행한 질문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질문에 상투적으로 주어진 대답을 피하기 위해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얼굴과 몸, 복장과 제스처, 치장과 표정을 우리가 사는 시간에 기대어, 자기의 삶에 비추어 밝혀보고자 했다. 다시 말해 반복되고 반복되는 삶과 시간에 관한 정언적 말씀, 윤리적 가르침을 뿌리치고, '내가' 산 삶, '내가' 체험하는 시간을 지금, 이곳을 사는 사람들에게 투영하고자 했다.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혈연들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아 교육과 윤리, 시러베 예술이 주입시킨 삶과 시간에 대한 진부한 생각을 제거했다. 감정의 제 가치를 동반하는 피의 끈끈함 blood intimacy을 선택함으로써 소위 삶과 시간에 대한 보편적 진리, 따라서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진술을 반복하지 않았다. 피의 내밀함으로 묶여진 친족에 대해 작가들은 객관적인 평가, 시간과 삶에 대한 보편적 관념의 적용을 의도하지 않는다. 냉정함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때조차 작가는 그를 의식치 않는 모델에게서 과거의 '나', 자신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를 바라본다.

최은화_나를 닮은 아이_컬러인화_150×120cm_2000

최은화는 「나를 닮은 아이」의 은밀한 모습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그 잃어버린 시간 속에 침잠함으로써 현실에 시달리는 자신의 현재를 구원한다. 바야흐로 성(性)의 분화(分化)가 진행중인 남녀양성적 androgynous 아이에게서 최은화는 문득 과거의 그녀를 보고, 사내로 변모하는 자신의 분신에게서 자기성애 auto-eroticism를 느낀다. 과거에로의 회귀의 욕망, 나르시스적 자기애정을 충족시키는 「나를 닮은 아이」는 따라서 현실의 아들일 수만 없다. 그는 사라진 과거의 '나', 물 거울에 비친 사랑하는 '나의' 분신이다. 작가의 과거를 간직하고, 작가의 자기성애적 대상이며, 작가의 피붙이인 「나를 닮은 아이」는 따라서 현실의 양화상 positive image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양화상의 위와 아래에는 기억의 음화상 negative image, 무의식의 음화상, 욕망의 음화상이 포개져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작가가 포지티브 필름 전용의 E-6 현상 대신 네거티브 칼라필름 현상방식인 C-41 프로세스를 선택한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 이유이다.

이경수_아버지_컬러인화_380×220cm_2001_부분

이경수가 팔순을 넘긴 「아버지」를 위해 최은화와 같이 양화상 현상대신 음화상 현상방식을 택한 것도 아버지의 형상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보려는 무의식적 시선 때문이다. 과수원 농사로 삶을 가꾸다 시든 「아버지」의 양화상의 이면에는 존재의 뿌리를 탐구하려는 작가의 원초적 욕망이 깔려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육체의 기원을 들여다보려는 이경수의 욕망은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를 없애고 싶어했고, 아버지의 시든 몸을 오래 동안 지켜보고자 했다. 그러나 일반렌즈의 최단 초점거리, 40-50 cm로는 아버지의 면모를 제대로 담을 수 없었고, 거리감을 없애려는 욕망은 그의 눈과 아버지의 사이가 더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60분의 1초, 125분의 1초의 일반 사진기의 응시시간은 존재 근원의 깊이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보다 더 아버지의 늙은 몸에 다가가야 했고, 보다 더 오래 퇴색한 육체를 응시해야 했다. 사진기의 기원, 핀홀 카메라는 20cm의 접근, 10초 동안의 대면을 허용하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파인더 finder도 초점 스크린 focus screen도 없는 그의 핀홀 카메라는 아버지의 거친 육체를 직시하게 하는 유일한 도구였다. 작가의 몸이 비롯된 「아버지」의 육체는 삶의 경계선에서 노동의 상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고, 작가는 그 육체의 풍경에서 '삶의 시간', '시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김현필_어머니의 어머니_흑백인화_2000

김현필 역시 이경수와 비슷한 관점에서 「어머니의 어머니」를 3년여 동안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그는 외할머니의 육체성과 아울러 그녀와 피붙이의 관계성에 점차 주목해 나갔다. 다시 말해 그녀의 "시들어 가는 육체 그리고 나지막한 숨소리"를 클로즈-업하면서, 가족의 근원으로서의 그녀가 각 가족 구성원과 맺는 일상적 관계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파괴적인 시간이 업습하는 외할머니의 몸에 언제나 촉각을 세우면서, 그녀의 가족간에 일어나는 갈등, 화해, 무관심, 걱정의 일상사를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김현필이 인지하는 '삶의 시간'은 궁극적 화해와 사랑을 모색하지 않는다. 그의 가족 속에 흐르는 시간은 결코 합목적적이 아니라, 무작위적이며 어떠한 예정표도 없다. 갈등 뒤에 화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해 뒤에 갈등이 있고 무관심과 걱정은 갈마든다.

최광호_장인의 죽음_흑백인화_1994

파괴적 시간의 궁극적 양상은 죽음이다. 최광호는 1978년의 「할머니의 죽음」 이후 삶이 잉태하고 있는 죽음에 강박관념적으로 시달렸다. 1986년과 1987년, 일본 지하철에서 찍은 「얼굴」 시리즈는 무엇보다도 일상적 잠과 '영원한 잠' 사이의 유사성을 상정했다. 일상의 잠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예시이며,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모습이다. 1994년, "내 손에는 항상 카메라가 있는" 작가는 장인의 마지막 순간을 포착한다. 눈을 뜨고 있는 마지막 힘이 소진되며 영원한 잠에 빠지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셔터를 눌러댔다. 1996년은 작가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정신적 외상이 가해진 해였다. 동생의 익사는 작가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동생의 사진들을 거두어 정리하고, 전시하는 일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진혼제였다. 가족의 잦은 죽음이 그에게 남긴 정신적 외상으로 삶 속에 내재된 죽음을 집요하게 보았던 작가는 요즈음 정반대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제 그는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에 대한 신비주의적 탐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를 위한 작업방식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죽음, 주검의 이미지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생명의 빛을 투과하여 부활을 모색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살아있는 생명체 자체의 생명력을 포토그램 photogram을 통해 인화지에 인각하는 것이다. ● 삶과 시간에 대한 상투적 개념, 이념에서 자유롭지는 않을지라도, 그러나 그것에 결코 매몰되지 않는 또 다른 사진적 방법이 있다. 그것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적 삶을 비판적으로 조작하여, 그 일상 속에 내재된 삶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지나치는 일상적 삶을 다소간 연출함으로써 삶의 비극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다. 연출은 일상적 삶을 다소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이 부자연스러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상성을 낯설게 한다. 이 낯설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재현된 현실에 거리를 두게 한다. 이 거리두기 distanciation를 통해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이 일상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하찮게 여겨졌던 일상의 현실은 이 때 허구적 삶의 양태를, 일상 속에 은폐된 삶의 진실을 고지하기 시작한다.

이선민_준훈이네_컬러인화_120×120cm_2000

30대 주부와 가정을 소재로 한 이선민의 작업은 최소한의 연출을 통해 비판적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모범적 예다. 작가는 실제 30대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사에 조심스럽게 끼어 들어, 거리두기, 낯설음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상황을 조절한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개입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낯설게 변모한 일상적 현실 속에는 30대 가정의 권태와 무기력, 소통의 단절과 피로가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선민의 사진 속에서는 가히 두려워 할만한 진실의 입이 30대의 삶에 관한 어떤 상투적 담론과 공허한 행복론을 뒷걸음치게 하고야 만다. 이행되지 않는 사랑의 약속, 믿을 수 없는 행복의 기약, 쓰러져 가는 젊은 날의 꿈 등,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선민의 일상적 사진장면들은 따라서 비극적이다.

조용준_김완수 59세_컬러인화_100×100cm_2000

조용준 역시 연출을 통해 우리 시대를 사는 40-50대 남성의 하찮은 일상을 포착한다. 이선민과는 달리 그의 주인공은 조연들을 부르지 않는다. 즉 작가는 주인공들이 주변의 인물들과 맺는 관계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조용준의 관심은 한국의 중년남성이 공유하는 심리적 공황상태를 영화적 연출기법을 통해 드러내는데 있다. 그의 모델들은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매일 반복하는 일상사를 연기한다. 작가는 훈련되지 않은 이 배우들이 촬영을 위한 연기를 통해 그들의 일상을 심각하게 반추하기를,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심리적 내용을 제대로 연기하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조용준이 행하는 작업의 성공 여부는 결국 작가의 연출능력과 그의 서툰 배우들이 제 연기의 내용을 얼마만큼 통찰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성공하는 경우, 그의 모델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중년남성의 출구 없는 삶, 위로 받을 길 없는 불안을 서툴지만 강하게 드러낸다. 그 부자연스런 동작은 그들이 겪는 고독과 좌절이 '삶의 시간'에 따른 자연스런 심리현상이 아니라, 한국에 고유한 경제 사회구조의 산물임을 암시한다. ●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양태에 대해 여하한 판단을 보류하면서, 삶과 시간에 대한 윤리적, 정언적 사고를 회피하는 2명의 작가가 있다. 이 둘은 자신의 판단이 아무리 탈 상식적이고 탈 이데올로기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쨌든 시대의 어떤 주변적 담론으로 환원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언적 담론으로 탈바꿈하여 보편성, 객관성의 허울을 쓸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떠한 자기주장과 가치판단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촬영대상과 상황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상식적 진술과 보편적 믿음에 의거한 여하한 가치판단을 유예시키고, 확정된 의미, 명백한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뒤로 미룬다. 모순어법이 허용된다면, 그들은 판단하지 않는 능동적 관찰자로 남고자 한다. 그들의 사진에는 어떤 견해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작가는 없다. 오직 자신의 전모를 정면에서 내보이며 저 자신을 주장하는 이 시대의 신체만이 있다. 작가는 그들을 이상화시킴 없이 있는 그대로, 날 것 그대로 필름에 전사하는 기록자일 따름이다.

이강우_COLORFUL 遺傳. (反)遺傳 COLORFUL_컬러인화_250×304cm_2000_부분

20대 대학생의 전신을 3분할 형태로 정면에서 촬영한 「문화풍경, 시선 그리고 개념적 색채에 관하여」와 그들의 염색한 머리를 뒤에서 3분할하여 겹쳐 찍은 「COLORFUL 遺傳. (反)遺傳 COLORFUL」에서 이강우는 이미지의 기록자 역할에 모델의 자기주장과 사고를 요약, 기록하는 대필업자의 역할을 병행했다. 그는 모델들에게 포즈의 자발성을 허용한 다음, 복장의 색채와 표정, 파격적인 장신구와 물들인 머리가 저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면서, 그 요란한 시각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가 눈으로 들은 그것들은 그들의 색채처럼 수미일관성 coherence을 무시한 역설 paradox 들이었다. 이 궤변들은 모순의 진리이기는커녕 어불성설의 모순들이었다. 하나의 명제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이며, 부정을 위한 부정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색채풍경"이 떠드는 사고와 말들에 어떠한 감정의 여백, 비판의 관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극단적으로 그것들을 추상화시켰다. 그 결과 이강우의 대필작업에는 가치판단을 함축하는 형용사와 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 이강우가 대필한 20대의 사고는 신체의 색채들처럼 언제나 모순이고 부딪히므로 겉과 속의 동질성, 동일성을 드러낸다. 사실, 작가가 눈으로 본 그들의 사고, 말은 표리부동의 위선을 거부한다. 표리부동한 전통적인 '삶의 시간'에 대한 그들의 거부는 따라서 전통적인 육체성의 원칙에 대한 부인을 동반한다. 유전으로 물려받은 육체성을 거역하는 20대의 반유전, 신체를 인위적 칼라로 가득 채우려는 20대의 욕망은 유전자 조작 시대, 실체 없는 픽션을 양산하는 디지털 시대를 드러내는 '시간의 얼굴'이다. ● 작가, 김옥선은 가치판단행위를 결단코 사절하는 이미지의 기록자로 남고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치판단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처세한다. 작가의 말을 빌면, "그녀에게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발 뒤로 물러서 그녀를 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작가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벌거벗은 육체성의 현실과 그 육체가 거주하는 현실을 냉정히 기록하는 것을 작가의 제 임무로 삼는다. 그녀는 여성의 육체를, 여자들의 방을 있는 그대로 객관화, 대상화하는 관찰자일 뿐이다. 20대의 여성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거나, 50대 여성의 육체성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감정이입 empathy의 미학은 이제 시효를 상실한 시대의 산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자신의 거처에서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시대의 미학에 철저하게 합류한다. 김옥선이 애호하는 미학의 속사들은 객관적 초연함, 자료 document의 엄정성, 의학적 냉정함이다. 여기에서 남성의 관음적 시선, 성적 욕망은 무참히 줄행랑친다. 에로티시즘이 완벽하게 거세된 김옥선의 누드사진들은 분명 엄청난 사회학적 내포 connotation를 지닌다. 콤플렉스가 아닌 여성성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 육체성에 대한 금기의식의 쇠퇴, 성모적 여성상의 붕괴 등 오늘의 시대를 사는 한국 여성의 변화된 의식을 함축한다. ■ 최봉림

Vol.20010329a | 삶의 시간,시간의 얼굴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