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속의 시간

김덕용 단청회화展   2001_0411 ▶︎ 2001_0417

김덕용_결 38-15_나무에 단청기법_82.5×48cm_2001

초대일시_2001_0411_수요일_05:00pm

분당 삼성플라자 갤러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263번지 Tel. 031_779_3835

결 (結) - 영속의 시간 ● 김덕용의 작품은 주제의 일상성과 표현방식의 소박함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먼저 주제의 일상성이란 그의 작품이 보편적인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로 향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작가가 일상 속에서 언젠가 만났거나 혹은 경험의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인물로서 그 불특정성 속에서 관계의 인과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따라서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일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의미로 자리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고재(古材)나 혹은 비교적 마모가 덜한 판자를 서로 연결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그 위에 익명의 인물들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옛것과 새것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런 점은 물성 자체를 회고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으로 융화 시키고자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언젠가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옛것이 된 판자에 드러난 인물들은 그가 '시간'과 '존재'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사실 시간과 존재의 문제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지속적인 사색과 반성을 통해 풀어야할 화두(話頭)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도 존재와 시간의 문제는『형이상학』에서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고찰하고『자연학』에서 시간에 대해 '앞뒤에 관한 운동의 수'라고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형이상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존재를 '시간·공간 속에 있는 지각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실체'로 보느냐, 심리학의 연구대상인 욕구, 감정 등도 존재로 볼 수 있는가,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실재를 존재로 파악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듯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존재와 시간』에서 이 문제의 해명을 시도한 바 있다. 시간이란 공간과 더불어 사물의 존재변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기존 조건인데, 전통적으로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시간의 초월성, 신을 초시간적 실재로 설정하여 신의 피조물인 세계의 출현과 함께 시간이 시작된다고 주장하여 왔다. 사실 시간에 관한 한 어떤 관점을 지니느냐에 따라 주관적인 것이거나 혹은 객관적인 것으로 인식되는데 영원을 추구하는 종교적 맥락의 시간관은 주관적 특징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시간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인간이란 유한한 생명체이므로 시간의 제약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결부될 수밖에 없으며, 시간은 또한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이 말했던 것처럼 공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 김덕용의 작품에 있어서 시간과 존재란 문제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과 결부되고 있으나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평범한 진실로부터 비롯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어머니이거나 혹은 주변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설지만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과거에 실존했던 특정 대상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삼대의 인물들을 그려놓은 작품도 작가 자신의 가족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거나 아니면 이런 상징적인 인물들은 각개의 세대를 사는 감상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건 의도하지 않는 것이건 작가와 감상자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결(結)이기도 하다. ● 그의 작품 속에는 나무판을 자르는 톱질 소리며, 끌을 치거나 조각된 판재를 맞추는 행위가 주는 성찰의 시간들을 그는 작업과정을 통해 누리고 있으며 잘 맞춰진 하나된 판재 위에 채색은 그간의 모든 노동의 수고를 목판 위에 재우고 있다. ● 그의 작업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혹은 과거로의 여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낡은 판자와 여전히 새것인 상태의 판자를 서로 연결하여 그 위에 과거와 현재의 인물을 그려놓은 것으로 보아 그는 시간을 단절이 아닌 연속적인 것으로, 또 그 연속성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현실 속에서 종종 망각하는 문제에 대해 환기하고 있다. 이런 점은 재료의 수용에 있어서도 드러나는데 그의 화면에 나타나는 낡은 듯한 색채는 한때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나 시간에 의해 그 원색의 향연은 사라지고 마침내 건축물과 일체가 되는 단청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화면 위의 조각칼로 먼저 새기고 채색한 판재를 다시 바래게 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불어넣음으로서 현재에 이루어지는 행위는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는 또한 현재에 실재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 속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의 배경들은 고서의 문자나 민화의 문양을 해체한 것으로써 경우에 따라 그의 작품이 기호처럼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이런 소재는 인물의 영속된 살아있음을 의미할 뿐 어떤 서술적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고서의 기록을 해체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의 느림의 행위와 상통하는 특징이 있다. 말하자면 고서의 의미를 해독해 나갈 때 동원해야 하는 집중, 어떤 때는 수없이 반복하여 독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한 자 한 자 재구성해 나갈 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같은 것을 그는 손의 작업행위를 통해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방법들은 그가 그려낸 형상들과 맞물리며 나무의 결처럼 일정한 질서를 구성해 나간다. 결국 그 행위 속에 자신이 존재하고, 타자도 늘 고정된 정형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조명될 수 있음을 그는 웅변이 아닌 조용한 대화의 제안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잘 숙성된 음식처럼 편안하고 낯설지가 않다. 너그러운 천성을 지닌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긴장보다는 포용을, 격렬한 정서의 돌출보다 심리적 안정을, 혼돈보다는 질서의 미덕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 지닌 보편적 휴머니티가 때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울림으로 자리할 수도 있으나 소박함에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는 척도인 양 용인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무한질주 속에서 이러한 작업경향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시간과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여지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철학적 언설을 대신한 자기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최태만

Vol.20010411a | 김덕용 단청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