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김성연 회화展   2001_0417 ▶︎ 2001_0426

김성연_천에 감광유제_150×100cm_2001

한전프라자갤러리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5번지 Tel. 02_758_3494

1. 어렸을 때, 목욕탕 굴뚝은 제의적(祭儀的)인 상징물처럼 보여졌다. 그 형태와 크기가 가지고 있는 기념비적 구조이외에도 목욕을 하는 것이 정기적인 행위였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목욕탕이 제의적이란 느낌을 가지게 되는 또 다른 하나였다. ●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씻김'이었고 평온과 안락 그리고 가족의 유대와 관계된 생활의 요소이며 조금은 엄숙한(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벗겨진)행위가 늘 내가 사는 동네에 존재한다는 것을 목욕탕 굴뚝은 보여준다. 그래서 동네마다 예배당처럼 목욕탕이 있었고 예배당의 십자가 보다 높은 굴뚝이 있었다. 동네 목욕탕은 동네 예배당보다는 덜 엄숙하지만, 최소한 놀이터는 아니었다. 예배당과 목욕탕은 정기적인 행위라는 것 외에도 행위의 진지함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시된다는 것에서 닮아있다. ● 김성연의 이번 전시에서, 그가 보여주는 내용들은 동네 목욕탕이 보여주는 일상이지만 조금은 낮선, 그리고 제의적인-그래서 조금은 치외법권 지역인 듯한- 동네 목욕탕들이다. 나는 가끔 목욕탕이 무엇인가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서적 무엇인가 덜어내는 것이 가능한 곳이며 그 덜어냄을 통해서 활력같은 것이 생성되는 곳. ● 2. 김성연이 지속하고 있는 형식적 실험들, 말하자면 3차원의 실재(reality)를 2차원의 평면에 옮기는 행위로서의 '그린다'는 방식에 대한 반성적 행위들은 회화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린다는 방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회화 고유한 특성들, 예컨테 원작의 단품성(originality)와 관련된 아우라(靈氣)같은 회화적이라고 말하는 특성들의 일부를 포기하고 수작업의 인화라는 과정(process)을 통해서 생성되는 효과들과 기계장치를 통해서 모사된 '사진'을 옮겨내면서 변화하는 상(像)을 통해서 '회화'라는 개념을 비틀어 보는 것이 김성연 작업의 본령인 듯 하다. ● 김성연의 화면은 인화를 위해서 발려지는 화학약품이 가지고 있는 유동적인 행위의 흔적이라든가 인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의 효과들이 회화적인 효과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그의 화면에서 회화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요소는 극히 제한적이며 그래서 그런 요소들의 효과를 잘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김성연은 그런 회화적인 효과들을 활용하지 않는 쪽으로 작업의 가닥을 잡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흔히- 발명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것에 관한 콤플렉스 혹은 목마름들이 가지는 결여된 진정성에 대한 반성적 측면이 회화적 효과들을 제한하는 쪽으로 작업을 진행케 했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 기실, 삶이 가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관련하여, 형식실험이라는 미술내적인 문제들은 때때로 공허할 수 있는 일이다. 무엇을 담아내는 도구로써의 평면이라는 일견 고리타분한 견해가 여전히 진실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고 그 사실과의 괴리가 작가를 괴롭힐 수도 있다. 김성연의 이번 전시는 그가 화면에 담아내고 있는 '무엇'의 생경함과 그 생경함이 우리 삶의 밀접한 -혹은 자체인- 요소라는 호소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 3. 신라시댄가? 소도(蘇塗)라는 것이 있었다고 배웠다. 소도는 종교적 신성지역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 된 후, 제정일치 시대의 산물로 남아있는 법의 지배를 받지 않은 지역이라 한다. 김성연의 작품들을 갤러리에 펼쳐 놓고 보면서 그의 화면에 삐쭉하게 솟아있는 굴뚝을 소도를 생각했다. 우리의 일상이 견고한 체계 속으로 편입되고 시간이 공간을 지배하는 시대에, 목욕탕 굴뚝은 잃어버린 것의 향수를 자아내기보다는 혹시 아직도 남아있음직한 재정일치시대의 치외법권적 행위의 장이 되는 곳일 수 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착각이 '진짜'처럼 다가왔다. 그려지지 않은 화면이 오히려 다양한 정서적 반응들을 자아내기도 한다. ■ 김영민

Vol.20010423a | 김성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