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

최소연 회화展   2001_0414 ▶︎ 2001_0507

최소연_얍 6. 물_종이에 잉크_22×29cm_2000

장흥 토탈미술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10-2번지 Tel. 031_840_5791

이 스펙터클 세상에서 물수제비 뜨기 ● 최소연의 그림은 온갖 볼거리들이 넘쳐나 눈이 빠질 지경인 요즘 세상에 아직도 여전히 본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라고 증언한다. 아니 그가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플레이그라운드는 극사실적인 이미지들에 물릴 대로 물려있는 지금 상황을 배경으로 할 때 더욱 의미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마치 물수제비처럼 가볍게 이 스펙터클 세상의 수면 위를 떠내면서 또 다른 시각장視覺場 하나를 연결해 내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각장은 유희적인 동시에 성찰적이다. 혹은 재미있기 때문에 생각하게 하고 반추함으로 흥미를 더하게 된다.

최소연_길들여진 것들 속에서의 분노_여러개의 공, 건전지_2001~2001

우선 이번 전시에 등장한 공이라는 모티브는 동시대 사회의 속도를 아우르는 일종의 미술적 시어詩語로 보인다. 전시장 2층 한 켠에서 이리저리 구르고 있는 최소연의 공(「길들여진 것들 속에서의 분노」)에, 가령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박찬호를 승리투수로 만들어준 시속 153km의 야구공을 콜라주해서 보면 어떨까. 미디어와 스포츠산업과 애국심이 추동하고 있는 박찬호 선수의 공은 속도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그 방향성의 차원에서 매우 울트라모던하다. 바깥 풍경들을 간단히 생략해버리고 오로지 승리를 향해서만 한껏 가속도가 붙은 이 공에 비해, 최소연의 공들은 방향을 예측할 수 없으며 주위의 저지물에 부딪혀 감속하곤 하는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보는 사람들의 일탈 욕망을 슬쩍 찌르는 이 미술의 공들은 메이저리그의 공과 달리 결코 자기 자신마저 지워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얍!」 시리즈 중 풍경을 가로지르는 공을 그린 그림에서처럼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그 공의 모양새와 회전경로를 추적할 수 있으며 심지어 「모네의 연못에 던지는 공」처럼 별도의 미술사적 미션을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박찬호의 공과 달리 최소연의 공들은 전시장 곳곳을 날아다니며 보는 사람의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주 특별한 사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화가 최소연은 세상의 속도에 항상 이런 식으로 대적한다. 더 빠른 속도로 경주하려거나 반대로 한껏 느림으로 도통한 척하기보다는 잔뜩 긴장해서 속력을 내고 있는 주자 - 또는 속도 그 자체? - 곁에 슬쩍 비켜서서 발 걸기. 비록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제스츄어는 다분히 위협적이다.

최소연_스펀지_종이에 과슈_190×147.5cm_2000

사실 눈여겨본다는 것은 특정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동의어이다. 카메라 셔터 도움 없이도 우리는 특별한 애착의 대상을 무심한 배경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모네의 연못」). 어지간하면 망원렌즈 없이도 멀리 있는 대상을 가까이 끌어당길 수 있으며 반대로 성능 좋은 현미경 없이도 대상을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다. 또 보는 각도와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시시 각각의 모습들을 사진적 아카이브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여러 개의 스펀지」). 이처럼 신체의 확장에 준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해당 대상에 대한 애정이 대신하고 있는 상황을 부각시킴으로써, 일상적인 시체험들이 곧 미술의 시작이었음을 그리고 난삽해진 현대미술이 그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음을 최소연은 환기시킨다. 한편으로 이렇듯 오랫동안 요모조모로 뜯어보는 시선의 숙련과정을 통해 재현되는 대상들은 으레 보통의 육안에는 기이하고 낯설게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 낯설음은 드물게 나마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기에 친숙한 것이기도 하다. 설거지를 하다가 한참 동안 집중해서 스펀지를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성장하는 세포나 이름 모를 해초처럼 보이는 때가 있듯이 말이다.(「스펀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최소연이 드로잉 연작에서 끌어들이고 있는 변신이라는 주제를 맥락화 할 수 있게 된다. 「얍!」 시리즈에서 반복되는 회오리나 연기 또는 소용돌이는 다양한 주체인 사물, 동물, 사람이 변신·이동한 흔적을 지시해 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여기서 그 흔적의 기호들은 자본의 시간을 모조 하는 마술의 시간, 미디어의 공간을 재편하는 미술의 공간 또는 세상의 속도를 대체하는 가상의 속도로 긴 꼬리를 남기게 된다.

최소연_병_캔버스에 아크릴_69.5×130cm_2001

그러나 시각성visuality에 대한 최소연의 탐색은 시각환경에 대한 언질 - 저항적인 제스츄어로서 - 이나 그것의 순간대체 가능성 - 마술적 변신행위로서 - 을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보는 것 자체를 의심하고 회의하는 시선들을 별도로 마련해 둔다. 병 속에 든 병인지 병 뒤에 있는 다른 병인지 구별하기 힘든 두 개의 병을 그린 그림 「병」은 교양 심리학책에 나올 법한 게슈탈트 이론의 사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실종」 연작은 자기 눈을 신뢰할 수 없게 하는 시각의 헤게모니적 조건을 노출함으로써 이 이론 틀의 컨텐츠를 채워준다. 노랗게 그려진 한쪽 팔이 없는 아이나 개구리 소년, 유령 그림은 모두 빨간 투명 막·미디어를 통과할 경우 보아도 보이지 않게 된다. 개구리 소년들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무수히 대량생산되지만 막상 그 실재는 실종되어 버린 상황 자체를 이 작품은 '재연'한다. 따라서 여기서 진짜 사건은 개구리 소년의 실종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그렇게 실종된 소년들이 TV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심지어 성장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예컨대 TV는 잊을 만하면 개구리소년의 얼굴들을 기억 저 편에서 불러내는가 하면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해서 나이가 들어 변한 소년의 모습들과 마주치게도 한다.

최소연_실종_종이에 아크릴_각 130×130cm_2001

「병」과 「실종」, 이 두 가지 설정의 공통점은 하나를 보면서 다른 하나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시지각 방식의 한계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병이 나란히 서있는 것으로 볼 때는 병 안의 병을 볼 수 없고, 개구리 소년의 실종사건을 볼 때는 그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 시간성을 도입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주체의 시선에 시간 축을 부여하면 모순은 병존 가능해지며 바로 그 모순의 각성을 통해서 도리어 시각에 대한 성찰적 지평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구리 소년에 대한 앞 문단의 해석은 그런 반성적 거리를 추적한 한 사례에 불과하다. 나아가 최소연은 「짝사랑」 연작에서 원시적 형태의 쏘마트로프thaumatrope를 동원하여 시간의 구체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양 쪽 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 틀을 고무줄로 돌려서 떨어져 있던 두 그림이 합쳐지게 하는 이 장치를 통해, 여자는 남자와 입맞추게 되고 소년은 집에서 잠자게 되며 고독한 아줌마는 친구를 갖게 된다. 작은 기념비들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이 「짝사랑」 연작에서 소박한 이야기의 회복이나 오락용 광학기구의 복원만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간단한 장치들을 반복해 돌리는 과정 속에서 우리 눈에 일어나는 잔상현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하게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미 오래 전에 "잔상은 자극이 부재한 가운데 현존하는 감각작용이므로 감각적 지각은 외부의 준거체가 없어도 가능하다는 생각과 시각의 자율성 및 주관적인 성격을 개념화하도록 했다"지 않은가(「현대성의 시각체계에 대한 연구」, 주은우, p260). 결국 잔상은 시각적인 기만이나 착시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광학적 진실이며, 관찰과 지각의 불가분한 구성요소로서 신체와 결부된 시간성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구 모더니즘 회화사를 거치면서 점차 소멸되어 온 시간성은 최소연의 그림에서 잠시 원기를 회복한다. ● 최소연의 그림은 시간과 연루된 잔상현상을 주제화할 뿐 아니라 그렇게 주제화하는 프로세스를 통해 그림이 세상과 맺는 관계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은 그림이야말로 하나의 리얼리티와 생성중인 리얼리티 혹은 기성의 게슈탈트와 또 다른 게슈탈트의 그 간극 사이에서 발생하게되는 하나의 '잔상'에 다름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림은 현실세계의 반영이나 지표 혹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현실들을 매개하는 메타·광학적 진실로서 그 위상을 갖게 된다. 한편으로 시간의 담지체라 할 만한 지각주체로서의 신체가 부상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리얼리티의 매개자로서 회화의 역할 및 입장이 부각된다는 차원에서, 최소연의 작업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이른바 인터페이스의 개발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비유컨대 「짝사랑」이 문자명령어 대신 그래픽 화면을 통해 수행명령을 내리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활용하고 있다면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연필」은 일종의 커맨드 라인 인터페이스를 설정하고 있다. 참고로 이 커맨드 라인 인터페이스는 어떤 커맨드도 입력할 수 있으며 - 종이 위에 쓸 수 있기 때문에 -, 동시에 어떤 것도 무효화한다 - 물로 쓴 것은 모두 증발해 버리므로 - 는 특징을 갖고 있다. 휘 돌아보면 전시장 전체는 이런 다양한 유저빌러티를 구현하려는 또 다른 연습장처럼 다가온다.

최소연_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연필_연필, 종이, 책상, 초_2001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연필」은 물이 들어있는 연필로 글을 쓴 흰 종이들을 파일링 해놓은 작품이다. 종이 위에 글씨는 구겨진 주름으로 그 긴장의 흔적을 남기고는 있지만 막상 내용을 명확히 알아 볼 수는 없다. 혹시 촉각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이 있다면 작품에 숨겨져 있는 세세한 비밀들을 손으로 읽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엿보는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종이 위에 뭉쳐져 있는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최소연의 그림은 시각성과 연관된 다양한 메커니즘을 제시하는 것을 지나쳐 이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본격적으로 겨냥한다. 겹겹의 비닐 위에 매직으로 찍은 점을 모아놓은 그림들은 이런 지향성을 갖는 연작들이다. 비닐 그림들은 때로는 「에취」처럼 소리 혹은 그 소리에 대한 심상을 그려내거나,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보여도 믿기지 않는」처럼 사물과 사물 또는 사람과 사람 혹은 사물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 하는 에너지·매트릭스를 형상화하거나, 「장난꾸러기 신」처럼 인간의 형상을 닮지 않은 신의 가변적인 모습을 재구성해내기도 한다. 비닐연작에서 최소연은 시각의 불완전함을 폭로함으로써 신체기관으로서의 눈이 만들어 냈던 앞서의 내러티브들과 단절하고 마음의 눈이 제시하는 시야와 절합하려 한다. 서로 연결되어 두루마리로 끝이 말려 있는 비닐 그림 연작이 총체적으로 대변하듯 이번 전시에서 최소연은 눈을 통한, 그러나 동시에 눈을 넘어서는 포스트 비주얼 리터러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있는 셈이다.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돌아서고 있는 그 마지막 터닝포인트에서 막상 최소연이 어떤 도약을 도모하고 있는 지 궁금하다. 그것이 순진한 유아적 퇴행인지 아니면 거룩한 종교적 승화인지 그도 아니면 지난한 일상의 도닦기인지.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다른 것인지. 다만 그가 기대고 있는 이 도약대의 종류와 탄성彈性에 따라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준 속칭 물수제비 뜨기 식 접근이 잠수하기나 수착水着 또는 또 다른 비상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 백지숙

Vol.20010503a | 최소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