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정 조각展   2001_0530 ▶︎ 2001_0605

백인정_섬_석고, 철_각 50×200×70cm_2001

초대일시_2001_0530_수요일_05:00pm

나무화랑(폐관)

섬, 그'비워짐'의 언어_ 백인정은 사물을 통해 그것들이 지니는 왜소함 이상의 것들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일까? 그는 정말 말하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사물 이상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단어에 미치지 못하고, 문장에 도달하지 않는다. 문법보다는 문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보라! 섬은 차라리 불쑥 솟은 칙칙한 부표(浮漂)에 가깝다. 그 조각들은 중성의 입방체고, 여기선 수직과 수평의 단조로운 질서들이 다이다. 자극도 긴장감도 없는 무미(無味)한 풍경이다. 그 풍경이 텍스트라면 잉크에 해당될 질료는 회색의 무거운 콘크리트다. (달조차 경화의 열기가 가신 차가운 무채색의 석고덩어리들이다.) ● 섬의 표면에 그려진 수직의 붉은 띠 처럼 경미한 변주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그 섬은 도무지 "여름 태양이 바다 한가운데 피워낸 돌의 장미"거나, "발 밑에 수많은 청어들을 기르는" 그런 섬이 아니다. 우리를 인생의 순례자로 만들곤 하는, 예컨대 장 그르니에(Jean Grniere)의 잠재적 흥분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섬'도 아니다. 거기에는 시련도 영광도 사랑도 배신도 없다. 긍정이나 부정에도, 희망과 절망에도, 그리고 투쟁이나 체념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느낌은 이미 거기 없고, 이미 정돈된(?) 심정의 부재가 소통될뿐이다. 여기서 섬은 부재의 물화된 상징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서술의 결핍으로 충만한, 비워짐으로서. ● 백인정의 섬은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다. 그것은 나사로처럼 방금 전에 수의(壽衣)를 제치고 몸을 일으킨 상태인지, 아니면 곧 티끌 하나 남김 없이 사라져 갈 것인지에 관해 어떤 단서도 지니고 있지 않다. 섬은 매몰과 솟아오름의 점진조차 없이, 즉 과거의 암시, 미래의 예시 밖에 있다. 돌연히 그곳에 있음. 그리고도 또 섬은 그것을 불러내, 거기에 그렇게 있게 했던 작가의 슬픔과 갈망도 기억하지 않는다. 백인정은 그 파편같은 섬들을 후사없이 그저 던져놓았을 뿐이다! 표정의 부재, 혹 증발! 이 문맥없는, 다소간 돌발적인 풍경은 갤러리의 그토록 무표정한 바닥으로 확장되 나간다. 표지판도 없고, 그렇다고 표류도 아닌 그 중성이 순간 공간 전체로 퍼져나간다. 민감한 관객이라면, 공간은 그것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로부터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 그렇더라도 잿빛의 밋밋함, 면과 모서리들의 중성적인 만남들, 기하학적 분위기, 일체의 서술과 장식이 생략된 격리의 차원이 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마치 실수인 것처럼, 드문 감정의 흔적이 목격된다. 때론 불안하게 지탱되는 수직에서, 행위의 격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한 두 개의 페인팅 흔적으로부터. 섬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드로잉들은 그의 섬이 고백과 침묵, 감정과 감정의 은폐 사이의 갈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보석상자, '접촉'으로부터 비켜서 있는 세계_ 백인정의 보석상자들은 가지런이 바닥에 놓여 있다. 바스티유의 옥탑같이 삐죽 솟은 섬들과는 상반된 양상이다. 다듬어진 형태와 잘 연마된 표면을 지닌 그것들은 수평적 질서를 따르면서 사뭇 안정되 있고, 각각 상자들의 크기와 배열을 따라 따듯한 리듬을 동반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감정의 흐름은 내면의 문제일뿐, 외부로의 노출을 꺼린다. 상자들은 모서리와 면들에 얼핏 내비치는 암시들만 제외하면 결코 열릴 리 만무하고, 보석들을 손에 쥐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사람들은 안을 궁금해할 것이지만, 그럴수록 실명(失明)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문맥은 여전히 은폐와 격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보석상자」는 '접촉'으로부터 비켜서 있는 세계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만 짐작이나 추리로만 접근이 가능한 어떤 차원,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경우)진정으로 중요한 것인 감추어진 측면에 관해 생각하도록 권장한다. ● 사실, 접촉할 수 없더라도 만날 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시선과 그 욕망의 체계 안으로 끌여들이려는 집착만 아니라면, 대상을 언제나 정확하게 규명하려는 인식의 목적주의를 슬쩍 뒤로 물리 수만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대상과 더 잘 만날 수도 있다. 만나기 위해 반드시 인식의 연결망을 깔고, 서술의 도로를 개통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시선의 접촉이 불가하다고, 지식과 사색의 길이 막히는 것은 아니다. 눈은 우리에게 풍부한 소재들을 제공해 줄 것이지만, 때로 소재의 과다는 도리어 사색의 탄력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그저 알 수 없는 상태를 인정하면서, 그리고 충족되지 않는 호기심과 더 많은 의혹들의 인도를 따라, 종종 근시안적인 확신들 때문에 눈이 먼 사람들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 섬과 보석상자, 갈망(渴望)_ 백인정은 우리에게 섬과 보석상자로 된, 갈 수 없는 세계와 손에 쥘 수 없는 세계를 소개한다. 여기서 섬은 다다를 수 없는-적어도 당분간은- 어떤 곳으로서, 그리고 보석은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그 둘 모두는 구체적인 갈망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갈망! 따라서 그것들은 상징계에 소속된 것도, 상상으로부터 도래한 것도 아니다. 갈망을 자유나 해방과 같은 관념적인 이상과 혼돈해서도 안될 것이다. "갈망은 부재로부터가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어떤 충만과의 대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탈로 칼비노, Italo Calvino) 이를테면 작가의 섬은 그가 (현재와는 대조적으로) 한 때 충만하게 소유했었던 어떤 것이고,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곳이다. '가고 싶은' 곳이기 보단 행복하게 머물렀던 곳. 마찬가지로, 그가 상자 안에 집어넣고 밀봉한 그것 역시 한 때 그가 소유했었던, 즉 상자 밖의 경험이었다. 섬과 보석상자는 미래가 아니라 그의 과거의 진술인 셈이다. 과거로부터 날아와 언뜻언뜻 현재와 겹쳐지는 기억, 시간의 낮설지 않은 자취, 현재까지 지속되지만 결코 현재는 아닌 것들에 관한 진술. ● 그러나 여기서 지나간 시간과 기억들은 미래까지 끌어안는다. 그것들은 지나간 것이면서 지나가는 것이고, 또 미래를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갈망을 지속적으로 부추기면서 미래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그가 현재 만들어내는 그 섬에 언젠가 있었고, 또 있게 될 것이다. 언젠가 소유됐었던 보석들을 담고있는 현재의 상자들이 언젠간 다시 열릴 것이듯이. ● 이렇듯, 백인정의 섬과 보석은 기억과 기억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그리고 갈망과 갈망을 연장시키는 것으로서,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순간들과 존재를 하나로 합쳐주는 것으로서 거기에 있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과 그로부터의 지식을 진정으로 마음 속에 담는 과정이거나, (달리 말하자면)사색의 경지로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사실, 마음에 담지 않은 기억과 사색되지 않은 지식은 그 가치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쇼펜하워, Arthur Schopenhauer) ■ 심상용

Vol.20010603a | 백인정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