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_肉·聲

노승복 영상展   2001_0620 ▶︎ 2001_0703

노승복_육·성 #8_3대의 빔프로젝트_00:04:01_2001

초대일시_2001_0620_수요일_06: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몸과 눈 ● 학생들과 같이 리지아 클락(Lygia Clark)이 70년대 초에 했던 퍼포먼스를 재연해본 적이 있다. 이 퍼포먼스는 의례 생각하듯이 퍼포머가 있고 관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퍼포먼스에 참여해야만 한다. 한 사람에게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히고 그 안에 바나나, 토마토, 오렌지 등을 집어넣는다. 눈을 가린 참여자들은 과일을 하나씩 꺼내 만지작거리고 터트리고 먹고 먹여주는 것이 이 행위의 전부이다. 눈을 가리면 마치 세계가 우리 앞에서 송두리채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시각의 억압은 만지는 대상과 만지는 나 사이에 살아있는 구체적인 느낌을 일깨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타인의 몸에서 마치 내장을 꺼내는 듯한 촉감은 시각적으로 명확한 윤곽을 갖고 있는 신체 대신, 과일의 안쪽처럼 흐물거리고 흩어지는 비정형의 신체를 체험하게 한다. 대상과 나, 남과 나 사이의 경계가 침범당하면서, 나는 외부에 있는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몸에 의해 충족되고 채워지는 '주체'의 느낌을 갖게된다. 클락은 이러한 퍼포먼스를 '몸의 건축'이라고 불렀다. ● 노승복의 비디오 작업은 눈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것으로, 방금 설명한 클락의 작업과 비교하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이 작업에서 우리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과일을 내장의 감각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체 기관 일부의 확대된 이미지를 일정하게 주어진 공간 속에서 바라본다. 여기에서는 신체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무매개적, 직접적인 접촉 대신에, 그 사이에 관찰자로서의 절대적 거리가 있으며, 가까이 다가가서 본다고 해도 좁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러한 절대적 거리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물리적 거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봄과 보임의 분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내가 스크린을 보는 것이지만, 은유적으로는 모니터의 눈이 나를 보는 관계가 되는데, 어느 쪽이건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이 명백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 이것은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이 구경꾼이 이미지를 바라 봐야하는 조건에서는 모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승복의 이미지들은 특정한 신체기관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조직의 시각적 디테일들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움직임이 내러티브를 대신한다. 또는 여기서 내러티브는 하나의 과학적, 혹은 임상적, 신경생리학적 담론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경꾼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의 위치에 서게 되며, 관찰자는 스펙타클 소비자, 즉 이미지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구경꾼보다는 현미경이나 천체망원경, 혹은 임상적이거나 범죄학적인 카테고리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의사, 과학자, 경찰의 냉정한 시선은 세부의 특징을 분리하고, 범위를 좁혀나가며, 섬세한 변화를 찾아내고, 그것을 일정한 데이터 속에 편입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눈을 보기 ● 노승복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바라보는 기관인 눈이다. 하나의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혹은 수학적이고 계량적인 이미지가 그 이미지를 인식하는 기관인 눈의 이미지일 때, 우리는 이 봄-보임의 기묘한 단절 앞에서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내가 보는 이미지는 보는 기관이고, 내가 보듯이 저 눈도 본다는 것을 본다. 작가는 정면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눈이 아니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눈, 즉 무언가에 반응하거나 관찰하는 눈으로 보이도록 촬영했다. 즉 스크린의 눈 이미지는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 자신의 눈과 아마도 비슷할 것이고, 관객은 그런 생각에 미쳐서야 이 작업이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시작하게된다. 우선 우리는, 눈이 다치기 쉬운 매우 미세한 조직들로 되어 있으며, 놀랍도록 민감하게 움직이는 기관이고, 투명한 표면으로 연약한 내부를 비치고 있어서 빛의 굴절에 의해 신비로운 색채를 띄게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관찰할 때 이렇게 우리 자신의 눈을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거울로 자신의 눈과 마주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 이미지 속의 눈과 관객의 눈 사이의 상동성은 이렇게 보는 행위에 대한 반성을 거쳐야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눈들이 이미 그렇게 움직인다. 양쪽 눈 모두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이기 때문에 실제로 비디오 이미지 속의 눈이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순간 그 빛에 반응하는 것과 같은 순간에 관객의 눈도 비슷하게 반응할 것이다. (첫번째 비디오에서는 카메라 스트로보를 터트려서 동공의 수축 확장을 반복해 보여준다.) 또 어둠 속에서 동공이 열린 눈(두번째 비디오는 어둠 속에서 자외선 촬영을 한 것이어서 동공이 활짝 열려있는 모습을 보여준다.)을 보는, 전시장의 관객의 눈도 이에 못지 않게 열려있지 않으면 안된다. 영상에 등장하는 눈은 카메라 스트로보의 빛에 반응하며, 관객은 비디오 프로젝터를 통해 전달되는 스트로보의 빛에 반응한다. 따라서 최초의 빛은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매개로 일종의 순환을 하게되고, 보여지는 눈이나 보는 눈이나 눈들은 이 빛을 나누어 받고 있다. 눈은 빛에 노출된 기관이며, 시신경은 즉각 이 빛을 받아들인다. 언어와 같은 문명적 상징체계가 개입하기도 전에 눈은 보이는 세계의 빛을 일단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노승복_육·성 #9_3대의 빔프로젝트_00:03:01_2001

눈과 야만 ● 관찰자로서의 절대적 거리 속에서 눈을 관찰하면서도, 우리의 눈은 생물학적으로 외부에 심하게 노출되어있으면서 동시에 뇌 세포와 곧바로 연결되어있다. 눈은 오히려 촉각보다도 대상을 아주 빨리 받아들이며, 그만큼 눈앞의 세계를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앙드레 부르통은 눈의 이러한 원시성을 야만적 눈(Savage Eye)으로 표현했는데, 그렇게 보면 시각은 문명, 재현, 기호보다는 마치 성기와 같이 자연, 실재, 지각에 더 가까운 기관으로 보인다.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다른 감각기관들, 이를테면 혀나 귀를 잘라내는 것 보다는 눈을 뽑는 것이 더 많은 두려움을 줄 것이며, 더 참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을 줄 것이다. 이 고통은 물론, 눈이 신경이 특별히 예민한 기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혹은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욕망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잔인한 심판이나 자학의 묘사들은 거세와 적출을 동일한 것으로 다루기를 좋아하고, 성기와 눈의 등가성을 기술한 역사도 외디푸스 신화에서 바타이으의 '눈 이야기'까지 지겹도록 길게 이어져왔다. ● 시각이론이나 시각 자체의 고유한 모순은, 시각을 이렇게 촉각적이고 지각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과, 촉각이나 지각의 직접성과는 다른 매우 이성적으로 매개된, 고도로 문명적인 것으로 보는 것 사이에서 발생한다. 바타이으적 눈, 눈멈을 향한 절망적인 갈구와 데카르트적 눈, 세계를 하나의 체계 속에 배치하는 이성의 기관으로서의 눈은 상반된다. 눈 앞의 혼란스러운 세계와 시각에 의한 구획 사이에는 적당한 타협이 없어보인다. 공중에서 보는 도시의 모습이 하나의 추상적이고 무관심한 그림들이라면, 도시 속을 거니는 사람의 눈에 같은 공간은 아주 혼란스럽게 비쳐질 것이다. 데이터를 내기 위한 관찰은 우리의 눈을 피곤하게 하지만, 우리의 눈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지친다고 해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볼' 것이다. ● 노승복의 작업이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시각의 이중성 때문이 아닐까한다. 왜냐하면 내러티브를 대신하는 눈의 해부학적 디테일들이 그 눈의 직접적이고 촉각적인 특징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동안, 우리는 동시에 사이보그같은 기계적 눈, 혹은 다소간 병적인 문명이 집중된 장소로서의 눈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의 거울 속에서 매우 촉각적인 대상을 절대적 거리를 두고 '관찰'하지만, 동시에 문명이 퇴적된 장소를 야만적인 상태로 '지각'한다. 눈의 거울 ● 노승복이 시각에 관해, 독수리의 시력보다는 바타이으처럼 눈먼 두더지가 되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각에 대한 장구한 비판적 전통 속에서 어떤 모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전에 했던 '자화상'이란 작업은, 자신의 얼굴 앞에 카메라를 놓고 장시간 노출을 주어서, 얼굴 이미지가 점차 없어지는 효과를 얻은 것이었다. '시선'이라는 작업은, 두꺼운 투명아크릴 어딘가에 (눈의 사진을 비롯한) 신체의 부분 사진을 삽입해서 사방에서 비쳐나오게 한 것이었다. 마치 사방에 편재하는 시선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눈은 숨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설계한 작업이다. 이번 작업에서 눈의 비디오 이미지가 크고 자세하게 드러난 것은 그러므로 일정한 단계를 거쳐 나온 셈이다. ● 노승복의 작업에서 눈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눈의 이미지들이 점차적으로 늘어가도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요즈음 우리는 어디서나 복제된 눈의 이미지들과 마주친다. 대개는 감시의 눈이거나 욕망하는 응시의 눈이거나 욕망 당하는 눈이다. 그렇게 무의식을 식민화하는 광고의 전략들과 노승복의 작업은 언듯 보면 비슷하게 보일지 모른다. 노승복의 비디오 눈은 적어도 그만큼 '센세이셔널'하며, 눈을 그런 면에서 스펙타클이 찾아간 마지막 장소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내게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센세이셔널한'이라든가 '마지막'과 같은 말들과 노승복의 비디오-눈과의 관계이다. ● 글 머리에 소개했던 리지아 클락의 퍼포먼스는 매우 이상주의적인 세계, 거의 육체적 코뮨(몸들의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작업이다. 보는 것 이외에 어떤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유희, 주어진 몸을 리얼하게 느끼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현대 생활에서 거의 종교적 수련 정도에서나 남아 있는 것 같다. 시선의 배반을 통해 '순수한 눈'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이 충격자체를 진부하게 만드는데 기여한 것으로 판가름난 시기에, 육체적 코뮨의 이상은 더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눈이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스펙타클의 시작이자 마지막 장소에 머물러, 센세이셔날하게 센세이션을 느껴보는 것이 더욱 이 막가는 시각 중심의 세계를 현실감있게 환기하는 것은 아닐까? ■ 박찬경

Vol.20010617a | 노승복 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