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송영규展 / SONGYOUNGKYU / 宋英圭 / painting   2001_0912 ▶ 2001_0923

송영규_고백록_판넬에 아크릴채색_180×70cm_2001

인사미술공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60_4720

은폐된 내향성(內向性)이 꿈꾸는 소통 - 송영규의 『고백록』 연작에 대한 단상 ● 1. 작년 겨울 즈음에, 잠깐이나마 스티븐 엘리옷의 영화 『아이 오브 비홀더(Eye of the Beholder)』를 화제에 올렸던 사람은, 내 기억이 맞다면, 송영규였다.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물론이고 간략한 시놉시스 격의 설명도 덧붙임이 없이 그는 그저, "그 영화 재미있어요", "괜찮아요"라고만 말했던 것 같다. 특정 영화제목을 굳이 언급하고 거기에 자신의 호의적인 감회마저 덧붙인다는 것은 은근히 그 영화를 권하는 한 방법일 거다. 그러나 내가 『아이 오브…』를 보는 데는 그로부터 꽤나 시간이 지난 뒤였는데, 남(들)이 좋다고 평하는 영화에 대해선 일종의 거리감부터 갖게 되는 내 습벽이 주(主) 원인으로 작용한 탓이다. 황지우 식으로 말해서 '방점은 내가 찍는'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를 플레이어에 걸게 되기까지 '보는 사람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을 영화의 제목만큼은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은 송영규라는 인물과 그가 그려 내는 작품들을 묘하게 떠올리게 하곤 했었다. 그리고 막상 『이창(R- ear Window)』을 비롯한 히치콕의 영상에 관한 오마쥬가 즐비한 그 영화를 보면서 '영규가 좋아할 만도 하지'란 생각을 가졌었다. 그것은 개인적 내상(內傷)으로 인해 고립된 주체가 등장하고, 마찬가지로 상처를 지닌 타자(他者)가 설정되며, 타자를 주시하는 시선이 존재하고, 그 타자와의 소통이 거듭 유보되는 안타까운 내러티브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송영규적 인물과 관심에 호응하는 영화라고 수긍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아이 오브…』는 타자와의 소통의 순간에 바로 그 타자에게 죽음이 들이닥침으로써, 그 소통의 내용과 성격이 애매하고 의심스러운 어떤 비극성을 더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영화적 상황의 작위적이고 과장된 성격을 걷어 낸다면, 타자와 소통하고 그에 따라 주체를 인식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송영규의 고심과도 닮아 있다. 오히려 송영규가 꿈꾸는 소통과 발견은 그 역시 관음증적 코드에 기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Love)』의 정황에 좀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사랑에…』의 여주인공 막다가 그녀를 훔쳐 보던 청년의 존재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고독과 상처를 여실히 목도하는 최소한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또 어렵게 다다른 그 소통과 자기 인식이 불안정할지언정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과 기대 등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2. 모든 고백은 타자를 전제하고 의식하는 행위일 것이다. 말의 바른 의미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과 심경을 솔직히 들려주지 않으려는 고백의 형식을 상정하기란 불가능하다. ● 그러나 송영규의 고백은 타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연이은 작품들이 『고백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그의 그림에서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술회를 발견하는 건 수월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 어둠 속에서 얼굴과 손, 발 등만을 간신히 드러낸 인물 하나가 덩그러니 등장하고 마는 그의 간명한 화면은, 타인이 그 속내를 읽어 내거나 상상하는 일에 영 무관심하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일곱 번에 걸쳐 얼굴을 내미는 한 인물을 그의 자화상 쯤으로 오인할 수도 있을 법하다. 더욱이 그가 노모(老母)를 그린 경우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작품 상의 한 소녀가 그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학생이라는 사실과 같이, 그가 대상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눈치채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 그런 연유로 송영규가 취하는 고백이란 개인의 소사를 지리하게 늘어놓는 그것은 분명 아닐 뿐만 아니라, 타인을 내세워 스스로를 감춤으로써 차라리 타자의 현형(現形)이 그의 고백을 대신하는 방식이 아닐까라는 짐작을 낳는다. 다시말해서 타인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까닭에 개인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이해를 넌지시 동반하고 있다고 보는 게, 그가 택한 고백의 입장과 성격에 근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타자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주체의 규명과 존재에 절실하다는 그의 적절한 이해가, 자신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사적인 공간 안에 타인들을 선뜻 불러들이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고백(의 방식)은 어쩌면 반드시 송영규적 자아의 그것에 일치되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주체의 문제를 새삼 상기시켜 줄 우리들 개개인의 토로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그렇지만 송영규가 그려 보이는 타자에 의한 주체의 풍경은 - 그 상호주체성의 맥락은 그다지 유연하고 화해로운 관계를 시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를 드러내는 타자의 현형들마다에 그늘진 정서가 짙게 드리워 있다는 걸 무심히 지나치긴 힘들다. 그의 분신에 다름아닌 타자들은 인색한 광원에 노출된 창백한 살빛을 띈 채, 지상에 두 발을 디디지 못한 상태로 어둠 속에 떠 있거나 종종 신체의 일부를 잃어 가고 있다. 또한 몇몇 인물은 그들의 맞대어 눌린 손가락으로 보아 투명한 유리벽에 갇혀 있기도 하다. 검은 색으로 채색된 기름한 사각의 틀 안에 자리하는 관계로, 이미 폐쇄적인 감정을 전하는 인물들에 이처럼 답답하고 유폐된 정서를 재차 포개려 함은 왜일까? 가깝게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에 곤란을 겪고 있는 송영규적 자아의 사정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공감과 교류에 있어 단절과 실패가 되풀이 되고 오해와 곡해가 빈번히 발생하기 쉬운, 현실의 한 측면을 솔직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의 그림들은 혹,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의 흔적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송영규_고백록_판넬에 아크릴채색_180×70cm_2001

3. 타인의 존재를 중요하게 간주함에도 불구하고 송영규가 보여 주는 세계가갑갑한 상황과 안쓰러운 실존의 계속되는 확인이라면, 필경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과연 그러한 존재와 상황을 야기하는 근원이 무엇인지 묻는 건 가능한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좋은 텍스트가 그러하듯 송영규의 작품은 답변의 한 실마리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타인의 모습들로 자신의 얘기를 개진하려는 개연성 있는 고백의 장(場)에서, 주체의 모습이 은연중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체를 철저히 숨기고 감추려 함으로써 타인들로 채워진 화면과 상황 안에서, 우리는 존재의 규명과 자기 보존의 욕구가 실종되는 역설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타자의 시선과 그들과의 차이를 의식하고, 또 그들의 영향을 흡수하는 자아가 부재(不在)를 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주체의 은폐에 그 혐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된다. 또한 숨어버린 그 주체는 타자와의 소통을 꿈꾸지만, 어딘가 타자의 접근을 선선히 허락하지 않는 성향을 지닌 것 같다는 예측이 꼬리를 문다. 그러한 마음의 움직임 때문일까, 송영규의 『고백록』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다시금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연극적 성격이다. 그의 타자들은 빛의 폭이 좁고 명과 암을 확연히 가르는 강렬한 조명 아래의 배경 속에서, 배우의 정형화된 제스츄어와 흡사한 자세들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극성은 여러명이 손을 이어잡고 늘어선 그림에서 좀더 두드러진다. ● 연기(演技)하는 그 타자들이 묘사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주체이다. 그것은 위장(僞裝)의 몸짓들이자 위장하는 자아이다. 이 연기와 위장이 굳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송영규가 제시한 고백이라는 말을 빌미삼아 그의 내향성에 눈을 돌린다. 그의 성격이 그러하건 아니면 그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그러하건, 타인과 소통하려는욕망을 지닌 내향적 인간은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상처받는 경험을 두려워 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심한 단자적 개인들 간의 형식적인 혹은 기만적인 관계(황종연)'를 깊이 회의하고 그 단절의 상황을 완곡하게 일깨운다. ■ 황재연

Vol.20010915a | 송영규展 / SONGYOUNGKYU / 宋英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