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을 키우다

김월식_김남훈_상국규_류한길_이승연   2001_1114 ▶︎ 2001_1120

상국규_2001

초대일시_2001_1114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3층 Tel. 02_733_6469

어느날 그(녀)는 동네 시장 어귀를 산책하다 꽃집 앞에 진열되어 있는 화분을 발견한다. 평소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화분이 그날따라 신기하게도 그(녀)의 시선을 묶어두는데, 아마 그 이유는 하교시간에 발맞추어 나오는 여중생들의 재잘대는 수다 와 웃음소리에 또는 시장통의 낮거리와 어수선함에 유일하게도 조용히 살아있는 생명체를 느꼈음이라 이는 그(녀)가 때를 잘못 골라 산책을 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튼간 그(녀)의 시선을 묶는 화분이라는 게 익숙한 거리의 익숙한 풍경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평일 오후의 시장통이라는 환경은 그(녀)의 시선에 상상력 개입의 개연성을 주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사실 그런 사실의 인지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화분을 직시하다가 벽면을 날아오르는 '매트릭스'의 주인공처럼 짧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유기적 느낌을 만끽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반복되는 어수선함에 반하는 유치한 서정이 들끓는 순간이다. ● 어느날 그(녀)는 작업실 창틀에 무심히 서있는 화분을 발견한다. 마침 창틀에는 가을 오후 햇살이 내리쬐고 화분은 작업실내부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운다. 화분의 존재감이 아련한 어떤 날의 길게 누운 그림자는 유독 존재감이 깊다. 먼지투성이의 작업실 한켠에 고목같이 서있는 화분과 일상을 가로지르는 화분의 그림자는 기억으로 통용되는 인식의 창구를 차단하고 그 자체의 풍경만으로 생경함을 자아낸다. 바람이 불어 그림자를 흔든다.

류한길_2001

어느날 그(녀)는 화분에 꽃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상식 밖의 일이다. 누가 물이라도 준 것일까? 아님 취중에 먹다 남은 소주라도 한잔 주었단 말인가? 그(녀)는 이 새로운 사실이 흥미롭다. 일상의 이미지들이 스스로 살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화분에 생명을 불어넣은,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처음 화분을 보았던 그 순간부터 화분에서 꽃이 핀 이 순간까지의 시간을 다시 한번 반추해본다. 물론 기억이 정확할 리 없다. 고주망태가 돼서 필름이 끊긴 것처럼 화분은 그(녀)가 살아가는 물리적 시간과는 상관없이 드문드문 그의 시선에 존재했기 때문에 요즈음 빈번히 등장하는 싱글채널 비디오의 분절된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것처럼 화분의 성장을 기억해내기란 순간과 순간의 시선, 이미지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상상력의 필요를 전제로 하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기억과 현실에 존재하는 화분은 그(녀)의 시선 속에서 존재하고 그(녀)의 상상력이라는 자양분속에서 성장하고 그(녀)가 길어온 일상의 낯익은 이미지 속에서 꽃을 피운다. 일상의 낯익은 이미지에서 꽃피운 낯선 화분의 꽃,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화분을 키우고 있었다.

김월식_2001

물론 시선을 먹고 상상력을 마시며 일상에서 길어온 풍경에서 성장하는 화분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본 화분이 그(녀)가 시선과 상상력에서 키운 화분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그(녀)의 작업이다. 그(녀)처럼 화분을 키운다는 것은 다소 게으른 태도와 방관적인 자세로 방치와 방목에 가까운 자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녀)가 바라보는 일산의 시선이 완결되어지지 않은 가능태로써 유연하고 열려있고 독립적이라는데 화분의 성장에 자양분이 작용한다.

이승연_2001

'화분을 키우다'는 그(녀)의 사적인 작업들에 대한 전시이다. 흙을 고르고 화분을 사다가 꽃씨를 심고 물을 주며 정성을 들여 꽃을 피우는 만족감에 대한 전시는 물론 아니다. 때로는 성장의 순서가 바뀌거나, 꽃이라는 결과물에 대한 가치를 유예하면서 화분을 키우는 작업인 셈이다. 그(녀)의 시선에 의해 분리된 화분은 그(녀)의 방식대로 성장한다. 때문에 그(녀)의 화분은 모두 그(녀)를 닮아있다. 두평짜리 월세 방을 전전하던 그의 화분은 언제건 떠나기 쉽게 단촐하지만 세상의 물리적 무게에 맞서는 가벼운 진지함으로 가득하고, 시절을 한탄하는 서출처럼 현명한 가난으로 연명하는 그의 화분은 선비의 향기와 노동의 땀냄새가 진동하고, 그 외의 그와 그녀들의 작업 역시 그와 그녀들의 생태적인 모습과 닮아 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언더에서 인디음악을 연주하거나 테크노 디제이로도 활약하는 그의 화분은 독립적 성향이 매우 강하여 지하의 냄새가 나고 동네 백수 건달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는 그의 화분은 나이브하면서도 트롯의 비트가 있다.

김남훈_2001

공교롭게도 그 또는 그녀의 전시형태는 모두 드로잉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가 드로잉의 형식적 측면을 앞세우거나 드로잉의 가능성 내지는 그 확장을 모색하자는 전시 또한 아니다. 그 또는 그녀의 작업이 일상에 대한 작가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 또한 그녀가 고민하는 삶의 유기적인 형태와 열려있는 형식, 과정에 대한 모호함, 완성에 집착하지 않는 가능태로의 모습이 드로잉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또는 그녀가 직접적인 작업의 행위로 들어섰을 때 가장 빈번히 조우하는 미술 형식적 맥락이 드로잉이라면 많은 부분 드로잉이 그 또는 그녀가 사는 동네에 삼삼오오 모여 그 또는 그녀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작업과 드로잉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하지만 그 또는 그녀는 모두 알고 있다. 지나치리 만큼 형식적 굴레를 싫어하는 그 또는 그녀의 머리를 맑게 해주고 시선을 밝게 해주며 가슴을 채워주며 손과 발을 즐겁게 해주는 대부분의 작업으로 그 또는 그녀는 드로잉을 하고 있음을. ● 새삼 '시는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다.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온몸으로 동시에 쓰는 것이다'란 하이데거의 말이 생각난다. ■

Vol.20011112a | 화분을 키우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