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secting knife_解剖刀

나현展   2001_1114 ▶︎ 2001_1120

나현_마녀사냥_여섯 개의 종이 상자와 설문지_2001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퓌지스physis의 이미테이션이라면 분명히 말해서 문화는 퓌지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문화는 불완전한 퓌지스(노모스nomos)인 것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구조는 불안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성을 극복하는 것이 문화의 최대과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완벽한 퓌지스여야 하니까... ● 문화文化가 글자그대로 " 글월화" 이라면 그 글 아니 광범위한 의미로 언어와 글역시 그 불안성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전시장의 입구에는 "갤러리 내에서는 지금 나현 개인전은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현 개인전은 지금 갤러리 내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어법에 맞지 않는 불쾌한 어구가 걸려 있다. 이게 무슨 개같은 소리인가! 당황스러운 관람자(정확히 표현하자면 관람하려 했던)는 곧바로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생길것이다. 물론 관람자님들을 놀리려고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 꾸~벅 그러나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해온 언어와 글의 불안전한 한계성를 작가는 나타내고자 하였다."전시가 진행된다"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완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말에는 "전시가 진행되지 않는다" 또는 "전시가 진행되는지 아닌지 모른다"라는 말이 함께 먼저 인식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미인"이라는 말에는 항상 "추녀","보통"등의 말이 항상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인, 추녀, 보통 등의 차이들의 체계에 의해 의미가 주어지려면 이 차이들의 체계가 공간적으로 단번에 주어져야 한다. 미인은 존재하는데 추녀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변별적 의미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요소들의 변별적 의미가 가능하려면 전체의 체계가 우선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세상 모든 사람이 미인이라면 우리가 알고있는 "미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미인","추녀","보통"이란 단어는 그 자체 혼자만으로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이 모든 단어가 모두 함께 어우러져 있을 때만이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즉, 하나의 언어는 고립적으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징적 총체로 되어있는 그 구조를 경유해야만 한다. 언어는 서로간의 공시적 관계속에서만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현_두개의상자_설치_2001
나현_어항속의 로봇_설치_2001

작품 "두개의 상자"는 각 각의 상자에 풍선과 벽돌을 담아 놓았다. 이것은 자연과 문화의 차이를 비교하고자 함으로서 벽돌이 들어있는 상자의 경우는 그 개체의 변화에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풍선들간의 척력으로서 공간을 메우고 있는 다른 하나의 상자는 어느 한 개의 풍선이라도, 평형성을 잃고 이탈하게 되면 이내 곧 그 상자 속의 풍선들의 구조는 변화를 일으켜 이전의 구조를 와해시킬 것이다. 즉 풍선들이 담겨져 있는 상자는 항상 그 불안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불안성이 문화 속에는 내재되어 있다. 문화의 불완전성 이것이 우리가 자연에 겸손해야하는 그 이유중 하나이다.

나현_설문지_A4용지_2001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물론 자칭이다. 아니 참칭이다. 인간종은 자신들이 영구불변의 주체가 되기 위해 민주주의 원칙으로 투표를 거행하였다. 여기서 투표자격은 인간만이 가능하다. (어쩌면 인간은 심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투표결과는 압도적인 인간의 승리.......이렇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왕좌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된 인간은 곧바로 이견자들을 향해 마녀사냥을 시작하였다. ● 작품 "마녀사냥"은 약 일천명의 설문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설문의 내용은 주로 설문자 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 그리고 그 설문의 내용들에서 대다수의 여론은 또다른 폭력을 잉태하여,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때로는 진실을 뒤엎기도 한다. 어쩌면 진실은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언젠가 어느 형태이던 간에 진실은 기존의 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진실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우리가 당연시하였던 진실이 허위가 되고, 허위는 진실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 과연 영구불변의 주체란 가능할까? 사이버시대 과학의 성장은 우리의 주체적 자부심을 드높이기에 충분하다. 과학문명은 인간에게 객체로서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과연 이 역할분담이 앞으로도 계속 변함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나현_잡초 weed_캔버스에 혼합재료_227×181cm_2001

나는 『공각기동대』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사이버그의 전뇌화電腦化는 인간을 정보의 바다 위에서 객체화시켜 버린다. 충성스럽기만 하던 컴퓨터는 어느새 우리를 객체화시켜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불변의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테크놀러지의 발전은 과학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해결사이자 불사신이 되었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1951년생,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의 사이보그 전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자 죽음을 예기하는 곳이 있다. 바로 지구의 4분의3을 덮고 있는 바다이다.(극중-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에서 사이버그는 자신의 몸이 기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 속에서는 가라앉고 만다.) 때로는 그곳은 그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구상 수많은 생명의 원천인 바다는 사이버그나 인간을 객체화시키기도 하지만 결코 바다는 주체에 집착하는 법이 없다.(작품 사이버그) 다시 말해서, 주체는 대상을 객체화시킴으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객체화된 대상은 거꾸로 주체를 객체화한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서 자연은 객체일수 있지만 자연에게서 인간은 객체일 뿐이다.

나현_주체_설치광경_2001

작품"주체"는 우리가 알고있는 태양과 태양계의 내행성과 외행성의 정보를 나타내는 도표들을 설치하여 놓았다. 애석하게도 본인은 그 정보들이 정확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리고 전시장의 작품들은 관람자들이 감상하기에는 도무지 알아보기 힘든 천장 가까이에 걸려져 있다. 관람자의 시각으로서는 작품들은 전시장의 한 귀퉁이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살고있는 지구는 우리의 미약한 정보만을 가지고 우주를 객체화시킴으로서 수학적 계산이 불가능한 수많은 행성들 중에서 태양계의 지구는 주체가 된다. 아니 중심이 되고자 한다. 과연 우주의 중심은 지구인가! ■ 나현

Vol.20011114a | 나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