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의 밤

공성훈 회화展   2001_1121 ▶︎ 2001_1130

공성훈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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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1_1121_수요일_05: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모든 것 ● 모든 작가는 최종적인 '그것'을 원한다. 배 나온 공성훈이 벌거벗고 서서 보는 세계는 '시녀들(Las Meninas)'에서 도미에의 고독한 '자화상'에 이르는 작가의 내재적 초상들이 겹쳐지면서 망가진, 희화화(戱畵化)된 세계이다. 작가는 우스꽝스러워지고, 그 작가 앞에서 세계는 불타고 있다, 는 것이, 그 인식이 공성훈이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럴 수 없겠지만, 삶이 생로병사라는 말로 일단 통칭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희로애락이라는 방법이 주어져 있다. 분노를 통과한 슬픔을 그것 아닌 것처럼 딴청 피우며 말하기 위해 돼지 닮은 개와 펭귄 닮은 개는 거의 심연의 수준에 있는 거룩하고 황량한 들판에서 우리 쪽을 쳐다보며 앉아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직도 눈이 오고 그걸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거다. 망가진 세계를 깁고, 보수하는 건 이 지극한 쾌락 앞에서 하소연하는 것부터가 아닐까? 거기에서부터 그림이 다시 말을 시작하고 우리는 시평(time-horizon)을 획득한다.

공성훈_눈오는 밤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2001
공성훈_개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01
공성훈_개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01

나는 낙관적이다. 이 낙관적인 태도를 붙잡아 준 단어가 시평인데, 이 말은 소설가 복거일이 어느 글에선가 조합한 단어-인 것 같다-로 내게는 '역사적 시각'이라는 말에 비해 훨씬 듣기 좋게 들렸다. 왠지 시간의 평원에 선선하게 서있는 것 같지 않은가. 공성훈 작업의 미덕은 다시 그림이 말하기 시작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애쓴다는 거고, 여전히 그림이 세계를 사랑하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환기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은 세상 앞에서 칭얼대고 작가는 그 칭얼거림을 견디면서 부서진다. 사실은 이런 게 보고싶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과도한 쾌락이다. 이 쾌락 앞에서 그것에 포섭되지 않고 저어하는 것. 쾌락을 과시하지 않는 작가로써의 양심. 그리고 그런 자세를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양식. 그러나,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세계를 대상으로 열애(熱愛)하려는 헌신(獻身). ●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최종적인 그것은 그것이고 그 너머이지 싶다. 개의 눈이 얼마나 아름답고, 밤이 이토록 축복인지를 그림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황세준

Vol.20011121a | 공성훈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