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욕망

김기수展   2002_0111 ▶︎ 2002_0122

김기수_스텔스(stealth)_옥상 위에 종이테이프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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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김기수의 새로운 욕망 ● 우리는 가끔씩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과 그 공간을 묶어 주는 알 수 없는 힘을 뚜렷하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니까 '볼'수 있는 경우가 있다. 많은 작가들이 고백하는 정신적 섬망상태가 아마 그런 경우의 하나일텐데, 그런 순간들은 언제나 우연히 찾아오며, 순간적인 충격을 주고 나서는 사라져 버리고, 오랜 시간 정신 상태를 지배하고는 한다. '일상'이라는 영역을 유지하는 힘은 그렇게 시각적이지 않은 것들 중에 가장 가시화되기 힘든 종류에 속한다. ● 이것은 사물과 공간에 대한 일상적 접촉을 다루는 미술이 돌연 난해해지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일상이란 난해한 비평이론이 종종 오도하듯이 특권적인 영역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많은 '순수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배제하는 시간성을 가지고 있는 차원이다. 그렇다고 순수(한 시각)성이라는 개념이 거짓은 아닌데, 정말이지 그 어떤 힘이란 순간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붙잡으려는 재현의 노력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마치 유에프오를 촬영했다는 사진에 대한 논란에서 보는 것처럼 궁극적으로 진실과 거짓말이라는 '사실성'의 문제로 환원되어버리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감각적으로 영민하기 짝이 없는 전위적 작가들은 사실판단에 대한 끊임없는 반문의 기술들을 개발하여 현대미술을 고감도의 정치적 게임으로 변화시켰고,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시대가 된 후부터는 모든 사회영역이 정치적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므로, 전위미술을 둘러싼 저간의 사정은 적어도 우리가 거리를 두고 보는 한 사회를 정확히 반영하는 거울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이러한 진술은 전위미술의 중요한 발견을 이미 원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 적어도 비가시적인 힘을 재현하는 문제에 있어서 - 사실여부의 판단이란 어떤 외부의 (대상과의 거리를 둔)고정된 시점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지금 그 시점이 (원천적으로)불가능한 지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포복절도할 노릇은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지점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어떤 정신분석가/철학자는 그것에 '결여의 기호'라는 개념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상징적)재현이란 태생적으로 불구이며, 일상이야말로 단조롭게 반복된다는 측면에서 결여중의 결여라면, 그 정체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은 바로 (일상의)재현이 완성되는 순간이자, 결여에 의존했던 일상적 삶이 - 결여의 충족으로 인해 - 와해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 미술에서 최대한의 결여는 그냥 평면, 그냥 입방체와 같은 것들로 대표된다. 최대한의 결여는 즉, 최대한의 형식이다. 형식에 대한 전복적인 입장은 위의 논지에 따른다면 형식의 현존을 유예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은 결여 자체이므로 은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리얼리즘이란 애초에 진/위의 문제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에게는 진실보다는 필요가 몇 배나 더 사실적인 것이다.

김기수_경계탑-국유지와 사유지_패널, 흙_2001

김기수가 보여주는 사진들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오브제와 같은 '작품들'과 그것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일상적 풍경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이다. ● 「경계 탑」들의 경우 흙으로 쌓은 탑이 익숙한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서있는 장면들이다. 배경은 그토록 평범해 보이는데, 평범하기만 한 흙으로 쌓아 올린 길쭉한 입방체는 왜 그토록 비범해 보이는가, 혹은, 눈에 익을 대로 익은 도시 풍경에 평범한 흙더미가 서 있는 장면이 왜 비범해 보이는가 등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에 대한 것이므로 답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질문들이 될 것이다. ● 그 흙더미들은 마치 문장의 구두점처럼 세상살이의 텍스트로 가득 찬 공간에 돌연 두드려져 보이는 마침표들인 듯하다. 그래서 사진에 보여지는 공간을 문장으로 쓴다면, "…빨간 벽돌집이 있다● 멀리 분홍색 아파트가 있다● 무너진 담장이 있다●… "와 같이 될 것이다. 모더니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한 듯한 이러한 비유는 곧바로 그의 오브제가 어떤 '휴지(休止)'의 시간 - 그 경계의 공간을 가시화시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 「경계 탑」이라는 제목은 전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 진다. 그 탑들은 어떤 공간의 구획을 표시하는 탑이 아닌 것이다. 그럼 무엇의 경계인가. ●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장면이 사진 찍힌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사진은 부재를 내용으로 하는 기호라는 것이 이 경우처럼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 같은데, 우리는 그 흙더미들이 작가에 의해, 혹은 다른 이들에 의해, 또는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 - 임시적이라는 본질적 속성을 사진을 보자 마자 알 수 있다, 결국 사진은 대상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 충족되는 변증법적 실존의 차원을 보여주게 된다. 사진 찍힌 대상이 와해된다는 인식을 통해서만 충족되는 무엇. 이 경우 사진 찍힌 것은 흙덩어리가 아니라 순간 그 장소를 지배했던 어떤 힘인 것이다. 결국 그 오브제의 의미는 결정되지 않는다. ● 흙덩어리를 이렇게 추상적인 배후의 역능을 향해 정신화시키는 것 - 사진을 제거시키는 것, 다시 말해 무한으로 열어 버리는 독해는 참으로 모더니즘적인 충동이라고 할 만하다. 정말 그럴까? 그 사진들이 그렇게 유토피아적 충동에 대한 것들이라고 생각되는가? 이 경우에 우리는 무언가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닌가? ● 사진에서 피사체는 전혀 우리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시선을 되돌려 줄 어떤 구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냥 직립 해 있는 입방체이다. 보는 이 - 카메라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피사체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주관화될 수 없는 응시로 가득 찬, '봉합되지 않은 기호'들이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시선을 흡수하는 구멍들인가? ● 그런데, 어떤 트릭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사진을 보여주는 작가는 현장에서 사진 찍힌 바로 그 흙을 다지던 작가이다. 그가 흙을 다지는 순간에 과연 사진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그 유령 같은 대상 - 그것을 생각했을까? 다시 말하면, 그가 자신의 삽에 올라가 있는 흙더미를 비현실적인 오점 같은 것으로 경험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사진을 보는 것과는 거꾸로, 즉 우리가 흙더미를 보면서 결여를 찾아내고, 그것을 봉합하는 자신의 능동적 의식 - 그 관계의 힘을 의식하는 것과는 거꾸로, 뭔가 의식에 계속 붙잡히는 어떤 관계를 '물질화'하려고 애쓰고 있지 않았겠는가? 다시 말해 앞의 독해와는 달리 작가는 단순 명료하게 대상을 전면에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 둘 중에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진에는 경계 탑뿐만 아니라 배경의 아파트, 공터, 담벼락과 같은 공간들이 같이 찍혀져 있으며, 이들이 두 가지 독해 중에 어느 경우에 의미 있는 요소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김기수_성형-보도블럭과 사람_숯, 재, 흙_2001

이것이 철저하게 힘에 관계된 문제라는 것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누구나 빈 놀이터나, 아무도 없는 공원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비현실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진에 익숙한 사람은 실제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아니, 건축과 도시계획 - 이들은 일종의 외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 들은 본래부터 사진 찍히기 위한 것이므로 아무도 없는 도시 공간은 정확하게 사진적이다. 사실은 이러한 동일시야말로 일상이 도시적인 회색 빛 신기루로 와해되어 버리는 경험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경계 탑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은 후자가 될 것이다. 그 사진들은 이미 신기루와 같은 공간을 한 번 더 신기루처럼 만들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이 신기루처럼 와해되는 압력에 대한 저항으로 읽어야 한다. 즉, 전면적인 형식화를 전복하는 것은 입방체라는 결여를 전면에 등장시킴으로써, 결여를 현존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읽었을 때만이 사진의 배경과 경계 탑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을 설명할 수 있다. 작가의 언급대로, 그는 현실의 와해 끝에서 공터의 흙을 '문득' 보고 다른 현실을 발견해 낸 것이다. ● 이제 「경계 탑」을 두고 욕망을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들이 꽤나 외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숯과 흙을 반죽하여 캐스팅한 작업들을 보며 더더욱 굳어졌다. 이들은 즉각적으로 배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들의 위치가 또한 외설적이다. 벽과 바닥이 만나는 모서리, 계단의 구석, 보도블럭과 행인의 다리, 아스팔트와 타이어… 이러한 목록은 마치 욕망의 심리지리를 통한 지형도를 전해주는 듯 하다. ● 그렇게 무의식적인 영역을 뻔뻔스럽게 현존시키는 감각은 통쾌한 유머로도 나타난다. 작가는 잠복근무중인, 그 비존재 때문에 어디에나 존재할 것 같은 이름의 미 공군 전투기를 옥상에서 불러낸다. 「Hi! Stealth!」● 이러한 불복은 우리에게 그다지 명료하게 알려진 종류의 것이 아니다. 형식성에 대한 불복이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술에서 뻔뻔스럽고, 조금은 악마적이고, 교활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인간형이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로 잡혀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 그러나 이것은 성장기의 고통을 반면교사로 한 얼굴이다. 우리는 성남의 70년대에 대해 이야기했었고, 연탄가스 중독사, 화장실에 익사한 할머니, 끝없이 이어지는 동네의 소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집이 헐린 후 이사한 바로 그 성남 말이다. 그리고 소규모 공동체운동과 같은 아나키즘적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과거로 향한 이러한 시선들은 김기수의 이전 작업들이 만들어 내는 다소 폐쇄적인 공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작업에서도 흙과 재, 숯과 같은 재료들은 작가에게 깊이 숨어있는 폐쇄적인 멜랑콜리의 흔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느 누가 멜랑콜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 나로서는 그 시기의 반성적 사유로부터 생각의 단정함을 얻어 낸 작가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주고 싶고, 작가가 우리 세계의 근본적인 패러독스를 통과하여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전망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역사의식과 계급의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죄의식과 유토피아에 대한 미련을 털어 버리고 말이다. ■ 전용석

Vol.20020119a | 김기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