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시간의 거리

이숙진 채색展   2002_0130 ▶︎ 2002_0205

이숙진_자연-시간의 거리_한지에 먹과 석채_57×55cn_2001

초대일시_2002_0130_수요일_05:00pm

열린미술마당 올 서울 종로구 안국동 1번지 Tel. 02_720_0054

이숙진, 자연미의 애착과 마음 속의 표현 ● 미술은 손과 머리와 마음이 움직여서 창조되는 예술이다. 달리 말하면, 훈련되고 능숙한 손놀림의 조형 솜씨와 풍부한 감성의 예술적 사고, 그리고 남다른 상상력이 합쳐져야 평가할만한 미술 작품이 창작될 수 있다는 뜻이다. ● 지당한 말이지만, 그 상관관계가 잘 결합되고 또한 조화를 이룬 형태의 미술 작품을 실현시킨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높은 평가를 받는 미술가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이 그만큼 지난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련되고 특이한 기법, 그 속에 내재되는 선명한 창의성, 그리고 개성적인 취향과 순수하고 깊이 있는 화면 창출이 선명하게 이루어진 작품에서만 눈이 있는 감상자들은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 화가들은 누구나 그러한 실현을 지향한다. 그러면서 어느 단계 혹은 그 이상의 어떤 뚜렷한 독자성에도 도달하게 된다. 이숙진의 작품에서도 앞에 말한 요소들의 조화와 밀도의 단계를 엿볼 수 있다. 섬세하면서 특이한 질감을 자아내는 동양화 전통의 석채기법 효과와 구체적인 형상 부분의 조형적 균형과 조화가 우선 이 여성작가의 남다른 감성과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열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 그 내면적 감정으로서는 매우 시적(詩的)인 시선이 가 닿은 삶의 현실 속의 어떤 특정한 대상의 자연미 체험과 그에 대한 애착, 그리고 그 자연 현상의 계절적인 표정들―곧, 흔한 야생화·풀잎·낙엽 또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등의 존재에 대한 시적인 시각과 정감이 바탕을 이룬다. 그 자연미 체험의 은밀한 편린들은 화가의 마음과 선택 및 상상력에 따라 극히 우아하고 생동적인 선과 임의의 변용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또 장식적이고 서정적인 문양 형태로 평면적인 출현 혹은 전환을 나타내게 하는 방법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숙진_자연-시간의 거리_한지에 먹과 석채_57×55cn_2001

게다가 그 화면의 전체적 이미지와 조형적 특성은 두터운 석채 기법의 릴리프적〔浮彫的〕입체감 조성도 수반하며 더욱 독특한 표현미를 창출한다. 석채가 엷게 부여된 두꺼운 장지(壯紙) 바탕은 표면적으로는 단조롭게 밝고 은근한 회색조의 분위기면서도 의도된 부드러운 질감이 균등한 무한공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구체적 자연미의 릴리프적 형상들도 모두 흰 대리석처럼 부각되게 함으로써 근래의 이숙진 작품들은 모두 무채색의 담백한 조형작업으로 집중되고 있다. ● 그러나 그 무채색 형태의 화면들은 내면적으로는 은밀하게 자연미의 색감이 느껴지게 함으로써 미묘한 깊이의 감응을 유발시킨다. 그런가 하면, 무슨 뾰족한 기구를 사용하여 부드럽운 음각선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꽃과 잎사귀 등의 섬세하고 확실한 릴리프적 부각효과의 수법은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의 박지(剝地) 무늬 기법을 방불케 하는 조형 아이디어로 매우 신선하고 독특한 조형미를 실현시키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표현사고와 현대적 작품 추구가 그만큼 치밀하고 탐구적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 앞에 말한 릴리프적인 구체적 부분은 전체적인 화면 공간에서 추상회화처럼 순수하고 환상적인 형상으로 부동(浮動)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작가가 단일 명제로 붙이고 있는 '내 안의 풍경'으로서의 화의(畵意)를 감지하게 한다. 그것은 매우 감미로운 시정적(詩情的)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내 안의 풍경'이란 곧 '작가의 마음 속의 풍경'을 뜻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심상(心象)으로서의 자연미의 애착을 말해주는 무한한 상념일 수도 있다. ● 이숙진은 분명히 문학적인 사색과 정념으로 자신의 자연애의 마음을 그림의 내용으로 귀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최대한 은유적으로. 그 마음을 그는 이렇게 스스로 말하고 있다. ● "나의 작업의 모티브는 언제나 자연이었다. 야생화와 들풀을 소재로 하여 계절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자연의 변화의 움직임을 화폭에 옮겨보려고 하였다. 자연 안에 들어 있는 많은 것들,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미의 본질을 표현하고 싶었다." ● 그 충동의 구체적 매체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간이 흐르면서 느껴지는 거리의 변화속의 단순한 나뭇잎의 모양이나 흙바닥에서 자연스럽게 나둥그러지는 돌과 나뭇가지 등'이었다. 그 매체들을 심정적으로 화면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숙진은 구체적 묘사를 평면적 단순화와 부분적 변용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현실감의 채색이나 어떠한 색상도 배제하며 단지 유백색의 단색조로 고결한 무색미(無色美)의 형상을 창출한다. 이는 남다른 회화 시도의 주목할만한 구현이다. 다만, 한결 깊은 맛의 회색조를 갖는 전면적인 화면공간 위에 유동적으로 부각적인 구성을 보이는 자연미 형상의 부분들은 계절적 분위기를 암시하려고 한 엷은 청색조 혹은 갈색조의 색감이 개별 작품의 계절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할 따름이다.

이숙진_자연-시간의 거리_한지에 먹과 석채_100×57cn_2001_부분

1996년에 가진 첫 개인전 카탈로그를 보면 그때 이미 자연 속의 들꽃 소재를 집중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단일 명제「야(野)」의 사실적인 채색화 연작 과정이 확인된다. 그 뒤로 차차 대상의 세밀한 현실감 묘사나 색채를 억제하고 혹은 배제하며 그 자연미의 본질만을 심의적으로 변용시키고 혹은 부각시켜 작품화하려는 변화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작가의 말이 현재의 그의 작품태도를 이해하게 한다. ● "아무리 비워내려 해도 결국엔 하나씩 하나씩 채워지고 마는 화면을 보게될 때면 스스로 답답하기만 했다. 최근의 작업에서는 최대한으로 많은 객관적 부분을 제거해 나가는 가운데 자연의 내면적 본색을 드러내고 싶었다." ● 그림 행위에 대해 '표현정지(表現停止)'란 말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표현을 아니함으로써-혹은 아낌으로써 오히려 화면의 본질적인 격을 높인다'는 차원의 말이다. 이는'감필(減筆)'의 뜻과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음미하게 한다. 그러한 정신적 표현주의는 현대회화에서도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숙진에게서도 보게 되는 그러한 면은 그의 표현의식이 선택한 앞서와 같은 정신주의의 지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 이구열

Vol.20020128a | 이숙진 채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