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얼굴을 찾읍시다

조광호 회화展   2002_0226 ▶︎ 2002_0307

조광호_목마름_종이에 수채_25×1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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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미술관 서울 중구 태평로1가 61번지 2층 Tel. 02_724_6328

우리시대의 실존, 사랑과 연민의 초상 ●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고 그 의의 또한 다양할 것이다. 아마 중요한 것은 언제 누가 왜 인간을 그리고자 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가령 선사시대만 해도 혈거인穴居人과 농경인들이 그린 인간상은 시대와 그린 사람, 그리고 목적에 따라 차별화되어 나타난다. '생존이냐, 신에 대한 제례냐' 하는 관점의 분화가 분명 이를 촉진했을 것이 틀림없다. 고대 세계에 들면서 그 숱한 신화에서 인간상의 출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역대의 제왕들 역시 정치적 목적에서 어김없이 그들의 얼굴을 그리거나 만들게 하였던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또한 중세 종교의 시대가 신앙의 목적에서 그러했다면 근세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인간상의 출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품목들이라 할 것이다. ● 아마도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근대 세계 이래 인간이 고독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적나라한 현실 속에 내던져진 모습을 상상해 보는 일일 것이다. 이 시기야말로 정작 신의 존재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했겠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를 거부한 채, 신 대신 물신物神을, 근원적 가치대신 과학만능을 신봉하면서 점차 물질로부터의 소외와 자폐증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이 또한 심각성의 정도에 있어 근대 세계의 전기 상황을 지칭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시대의 인간은 소외니 자폐증이니 하는 용어로는 그 정황을 설명할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사이버 시대의 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는 병적 증후군을 앓고 있는 여러 정황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전기에는 그래도 우리 인간은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신념을 포기하지는 않았건만, 후기에는 이것마저 회의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스스로 추악하다고 할 정도로 동물적이고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다. 사제이자 화가인 조광호 신부가 40여 년 그려 온 얼굴 그림들을 모아 초대전을 가진다기에 그가 과연 이 시대의 얼굴을 왜, 어떻게 그리고자 했는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무엇보다 심각한 분열증을 앓고 있는 이 시대를 살면서 그가 어떠한 대안적 시각으로 우리의 얼굴을 응시하고 또 그리고자 하는지에 주목할 차례가 되었다.

조광호_새우깡 수녀님_종이에 수채_2001

그가 지난 해 말 출간한『얼굴』에 수록된 글과 그림(얼굴)들은 그 스스로 한 시대의 와중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역정의 소산임을 확인시킨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어린 시절 가난한 해안 두메에서 태어나 눈 많이 내리던 향리를 뒤로 하고 상경하여 사제의 수련을 마친 후, 독일 유학을 다녀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림으로 글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담론들을 밀집시킨 것이 작금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작 글에서 과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 무심한 바람 / 나뭇가지 흔들리고 / 나뭇잎 떨어지듯 / … 아름다움은 빛보다 더 빛나고 / 어둠보다 더 어두운 / 절망이었다." ● 그가 자신의 실존과 인생사史에 대해 가지고 있는 회상은 유년 시절, 어머니와 눈과 가난을 테마로 하고 있음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의식에는 무심함·흔들림·떨어짐·어둠·절망이라는 현실원리의 냉혹함이 잠재해 있지만, 반면에 아름다움과 빛을 향한 근원적인 목적지향을 동경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또한 가득 차 있다. 그의 그림들의 심층부에 항상 비극적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지만, 낙관적이고 힘찬 선의 일필휘지하는 필세가 전면에 등장하는 원천이 여기에 있다. 그는 거의 연민의 시선으로 그가 만난 아이들·시인·승려·이방인·잡부는 물론 야곱·베로니카 같은 성서의 인물들을 거의 이와 유사한 필세로 그려내고 있다. ● 그가 그린 얼굴들은 자신의 실존의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았던 비극적 인간상의 이러저러한 편린들이다. 지치고 할퀴고 마침내 침몰하는 가엾은 인간들의 모습이다. 그의 얼굴들은 이를테면 '빛과 어둠이 만나는 모순의 극치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태어나 엄마 품에 안기는 인간이며, 부질없는 순간의 반복이 연속되는 삶을 이어가면서도 항상 영원한 시공을 갈망하는 인간이자,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 엄마 품에 다시 안기는 아기처럼, 한 점의 물방울이 되어 하느님 품에 안기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꾸미지 않고 필 가는 대로 온통 먹물 투성이의 필획들이 만들어 내는 이목구비와 거친 얼굴의 윤곽선하며, 무겁고 어두운 안면 분위기에는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신으로부터 부하된 연민의 빛이 잠재해 있다. ●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기 전, 애초 사랑과 연민, 그리고 빛의 세계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깨우쳤다. '그 시절의 어머니가 된 오늘의 나, 촛불을 켤 기회가 유난히 많은 나는 초를 켤 때마다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고 회상하면서 "얘야 초만 있으면 뭐하니? 누군가가 초에 불을 붙여야지" 하던 음성을 그림을 통해 그려내고자 한다.

조광호_아무리 말을 해봐도 알아들을 수 없는_종이에 수채_2001

그는 어둠 속에 빛을 그려 넣는 마음으로 타자의 얼굴들이자, 거반은 그 자신의 얼굴들을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자아투영'의 방식이 지난 번 개인전Brad Cooper Gallery, USA (2000)에 선보인 바 있는『불의 화두』에서 시작된 동기를 재확인시킨다. 『불의 화두』에서도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를 도와 풍로에 부채질하면서 저녁나절 까맣게 죽어있던 숯불이 발갛게 타오르던 일을 회상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이번『얼굴』초대전 역시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이를테면 『불의 화두』에서 숯의 메타포를 제기하면서 '숯'이 칠흑 같은 어둠의 모습을 띠지만, 불을 소유하게 되면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로고스의 진리를 해명하고자 했던 것처럼, 근작 얼굴에서도 역시 검은 수묵의 표정들이 작가의 손과 마음에 촉발됨으로써 인간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어둠의 그림자를 끄집어내는 한편, 하느님의 진리의 빛이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자 한다. 여기서, 조광호의 얼굴들이 지향하는 근원적 핵심은 이러하다. ● 그것은 바로 물신에 짓눌려 분열하고 마침내 허물어져 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얼굴에서 인간들의 운명적인 어둠을 폭로하는 일이다. '생애의 저 깊은 강을 건너가는 데 그 누군들 예외가 있으랴'는 작가의 실토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들은 이러한 폭로의 일차적 과제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 점은 그가 사제이기 때문에 그가 그린 그림의 얼굴들이 속인들이 그린 얼굴과 똑같을 수가 없는 본질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사실을 그의 그림에서 확실히 하고자 한다. 그는 절망의 종점에 서 있는 인간들에게 '당신께 드릴 내 생애의 진정한 기도는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글귀의 헌사를 잊지 않는다. 20세기 최대의 성화가 루오Rouault, Georges(1871~1958)가 그랬듯이, 어둠의 극한에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빛에 입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들은 총체적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거나 밝음을 내재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발상은 속인들의 얼굴뿐만 아니라 성서의 인물들이나 성상을 그릴 때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가령, 베로니카를 그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베로니카, 그대로 인하여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이 어떤 사람의 가슴에 새겨지는지 알게 되었다. 베로니카,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욕, 시기와 질투 앞에서 그 누가 여인을 꽃에 비유했는가 묻고 있는 듯 하구나. 베로니카, 화가 루오가 그대의 이마 위에 아름다운 꽃 대신 십자가를 새겨 넣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의 성화들은 이렇게 해서 단순한 다큐 속의 인간상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처럼 빛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는지를 실존적 해석을 통하여 그려내고 있다. 처음부터 아름답고 성스럽게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통해서 도달했던 현존의 확인을 통해서 성스러움에 도달하도록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이렇다. 그의 얼굴들은 선사인들과 고대인들의 역사화나 중세인들의 성상 같은 것이 아니며 권력자들의 초상이나 개인들의 심리를 묘사한 것도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그가 사제요 화가로서,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실존적 상황이라는 필터를 통해 고뇌와 어둠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극한에서 그 역으로서 빛의 세계로 구원해 내려는 데 뜻이 있다. 그의 얼굴들은 세인들을 단순히 미적 관점에서 재현하거나 자신의 심리적 표출을 위해 그린 삽화나 일러스트는 더욱더 아니다. 그의 얼굴들은, 루오에게서 그러했던 것처럼, 어둠의 극한에서 빛의 세계로 거듭나기를 기대하는 실존의 열망을 내재한 구원의 표징들이다. 다른 한편, 그의 얼굴들은 대범하고도 요약된 필치와 개성적인 필세, 무엇보다 가감하지 않고 꾸밈없는 운필에 의해 드로잉의 새 장을 일궈내고 있음도 또한 강조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출품작들은 세 부류로 나누어 전시되었다. 하나는 버려진 대형 사전의 텍스트에다 수묵·과슈·흑연가루의 톤을 살려 그린 150여 점의 작은 흑백 얼굴 그림들이다. 30×40Cm의 크기에 담은 얼굴들은 위에 언급한 내용의 축소판이자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조광호_주여, 나를 불상히 여기소서_종이에 수채_2001_부분

이것들은 거반 40년 동안 그가 수묵에 매력을 가지고 접근해 온 것들로 즉흥적인 붓의 흐름과 수묵의 매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만끽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부류인 죽음을 다룬 동판화 15점이 눈을 끈다.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애쿼틴트로, 원판은 15년 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공방에서 제작한 것들이지만, 근자의 테러사건들이 빈발하면서 증폭되고 있는 인간의 잔인성을 고발하려는 데서 이번 전시에 특별히 포함시켰다. 이 동판화들은 인간에게서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가, 또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잔인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다룬다. 마지막 부류인 100호~150호의 대작 몇 점은 몇 년 전부터 시도해 온, 혼합재료를 사용한 작품들로, 앞서 언급한『불의 화두』의 연작들의 일환으로 제작되고 출품되었다. 요컨대, 조광호 신부의 근작 얼굴들은 그의 내면에 투영된 타자의 얼굴이자 그 자신의 실존적 고백록이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인들이 직면해 있는 절망과 대결하면서 인간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진실과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데 뜻이 있다고 할 것이다. ■ 김복영

Vol.20020227a | 조광호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