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木-생명의 뿌리

양화선 조각展   2002_0313 ▶︎ 2002_0326

양화선_山水紀行-숲_브론즈_56×36×55cm_2001

초대일시_2002_0313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2층 Tel. 02_736_1020

조각으로 그려낸 회화적 현실-나무에게 길을 묻다존재를 향한 여행, 산수기행 ● 산수는 오랜 동안 동양 회화의 중심에 있어왔고 산과 물은 단순한 현상계라기보다는 마음 깊은 곳의 상태를 의미했다. 고분벽화에서는 선계(仙界)이자 영지(靈地)였으며 중세 이후에는 이상적인 자연의 상태, 인간이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영지이기도 했던 회화의 중심에 있던 산수라는 개념을 조각적으로 재해석한 양화선의 산수기행(山水紀行) 앞에서 관객은 대상의 재현, 물성의 실현이라는 전통적 조각의 관심에서 벗어나 심상(心狀)의 묘사라는 서술적 작업의 결과를 즐길 수 있다. 명제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작품에의 접근은 다분히 문학적이어서 자신의 관심사를 거리낌없이, 재료에 관계없이 자유로운 운율과 어휘로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인간 내면의 기억을 시처럼, 산문의 한 구절처럼 읽어나가게 만든다. ● 거대도시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물이나 나무, 산의 모습은 시골에서 자란 작가 개인의 것이겠지만 그들은 묘하게도 보는 이의 향수를 자극한다. 인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 방식을 제공한 것으로 생각되던 프로이트가 근대기 최고의 문제아로서 지탄받는 지금 이 시점에도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유년을 회색도시에서 보낸 사람조차도 마음 속 깊은 곳에 한 자락 깔려 있는 플라타너스의 그늘, 물수제비 뜨던 수면이 파동치고 있음은 어떤 연유일까? ● 명암이 엇갈리는 물에 대한 이미지는 추억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산수기행-山上의 호수」는 "어린 시절 산을 몇 개 넘어 발치에 외갓집이 있는 동네가 보이는 산 중턱에서 만나는 옹달샘은 내게 가장 맑고 달콤한 물이었다."라는 작가의 말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극대화되어 각인된 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듯한 이 작품은 산 속에서 만난 샘물의 에너지는 생명의 근원체로서의 물이며 그 존재는 산, 그것에 다름 아님을 말하고 있다. 산에 물이 있음인지 물이 산에 있음인지의 경지, 그것을 노장의 도(道)에 비한다면 이 땅에서 여성으로서 또 작가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를 필요로 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사유의 깊이에 대해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하였다. 모래알이나 들꽃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하잘것없는 존재의 대명사이다. 하지만 그 하잘것없음에서 생명력을 발견하고 인생과 희망, 사랑을 노래했던 워즈워드의 시 한 구절이 적힌 작은 종이쪽을 햇빛 가득한 이 작가의 거실에서 발견할 수 있음은 그의 산수여행이 관조적 세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이 작가에게 경험의 틀은 서정이라는 시적인 감흥을 빌어 현상화된 기억의 편린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호수를 담은 산의 존재성은 어린 날의 가슴 설레는 산길의 모험과 무조건적 사랑을 보여준 외가의 향수와 함께하는 샘물로 인생의 고비마다 희망의 존재로서 자리했을 것이다. ● 생명의 상징으로서 물은 양수를 몸에 지녀본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 세계를 비옥하게 한 물의 신 강가여신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 것이다. 메마른 대지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강가 자신은 땅을 적시고 생명을 낳았지만 또한 생명을 삼키는 존재이다. 물에서 가족을 잃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은 어두움의 상징으로서 물을 가두어 버릴 법도 하건만, 작품에 나타난 모든 물이 생명의 이미지로서 작용하고 있음은 작가가 지닌 개인적 기질에 의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무나 대지와 분리된 물의 존재는 자연의 구성원으로서 제 자리를 단단히 지키는 고집불통의 존재로 보여지기도 한다. ● 양화선의 「산수기행」 시리즈는 분명 현실의 공간을 탐험하는 것도, 현재 진행형의 상황도, 그렇다고 관조적 세계관의 반영도 아닌 현상화된 과거의 분절적 경험이다. 경험이란 분명 기억과는 차가 있는 보다 리얼리티에 근접하는 개념이지만 사물을 보기 전에 느끼는 인간은 조합된 경험을 지닐 수밖에 없다. 순간의 경험에 대한 기록에서 출발한 그의 세계가 필연적으로 인생에 대한 관조를 담게 되었음은 그 자연의 재현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존재에 대한 무거움, 생명의 열기를 느끼게 하는 태양의 열기가 식은 어스름 녘의 공간을 인생에 비추어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 공통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산수풍경-석양」은 바로 이러한 공통 경험치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잎새 하나는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건만 그 자신 나무가 되어 대지에 서 있다. 나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그림자 또한 당연히 하나의 잎새 모양이 되지만 그 안에 호수와 바위와 산과 계곡을 담고 있다. 이제 나무는 나무가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니되 그 모든 것이 또한 다르지 않은 경지에 이른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목가적 정경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즈넉함은 고달픈 삶의 반영, 경건히 수용한 신이 내린 내 생명에의 충실함이라는 인간 본연의 겸허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한다.

양화선_자연에 대한 서술-1_동판, 투명수지, 브론즈_35×32×50cm_2000

우주의 반영, 그림자라는 실체 ● 생명적 순환성 내지는 그 분리될 수 없는 관계성은 「산수기행-물의 나무」 시리즈에서도 강조된다. 세포 하나 하나가 인간이 아닐 수 없듯 나무가 아닐 수 없는 잎새 하나가 물 표면에 떨어져 몸이 물에 젖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대지에 솟은 듯이 형성된 물의 형상은 분명한 나무 등걸이다. 나무의 나이테와 수면에 생기는 동심원이 동일한 형태임에 착안한 위트 있는 작품이지만 물이 나무에 스며드는지, 나무에서 물이 떨어져 흐르는지 모호한 상황이다. 동일한 명제의 또 다른 작품은 마치 파초처럼 잎새를 좌우로 벌려 길게 늘어진 식물의 잎이 땅속으로 들어가 물이 되어 흐르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들 두 작품은 형상화는 다르나 표현에 있어 동일한 조형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찰라적 두 존재의 만남은 물이나 나무라는 존재에 대한 확인과 존재의 소멸을 동반한다. 나무와 물이 어느 한쪽을 완벽히 통제하거나 포용하고만 있지는 않은 미묘한 긴장감은 바로 우주적 법칙인 생명의 순환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포착된 때문일 것이다. ● 물과 나무 그리고 인간 삶의 관계는 「산수풍경-홍수」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무성한 이파리를 자랑하던 나무는 우지끈 부러져 지붕에 나뒹굴어져 있고 집 또한 물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으로 덮여있는데, 물은 이제 지표면에서 물러나 땅속 깊숙이 가라앉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히 땅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은 대지를 할퀼 수 있다. 그래서 가뭄 뒤에는 씨앗이라도 남아 있지만 홍수 뒤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물며 인간 삶, 집이라는 견고한 틀을 믿던 여성에게 홍수가 할퀸 자리는 대지와 집이 다를 바 없음을, 지하로 스며드는 물처럼 자신을 세상에서 지켜주던 거처 또한 그러할 것을 알게 한다. ● 「홍수」를 비롯한 「등나무」 「정오풍경」 「대지인 나무」 「폭풍」의 다섯 작품은 여성이 갖는 인생과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이들은 삶에의 응시라는 입장으로 이해되는데 나무와 대지·집의 관계를 통해 자연과 인간, 인생의 빛과 그늘, 상처와 치유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정오풍경」은 자연적 현상으로는 가장 그림자의 길이가 짧아야 할 시간인 정오에 작은 집은 멀리 있는 플라타너스의 그림자로 덮여 있다. 「대지인 나무」에서는 커다란 잎새 하나가 지붕을 전체 감싸고 있으며 「폭풍」에서는 비바람에 끊긴 커다란 나무가 잔인하게도 자신이 그늘을 덮어 안온함을 주던 집의 지붕을 짓뭉개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을 터이나 나무는 결과적으로 주택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지반이 단단하고 기초가 잘 다져진 견고한 집이라면 한 오십 년쯤은 버텨줄지도 모른다. 「등나무」는 이 수종의 특징인 꼬임을 통해 감싸안듯 집을 지켜주는 든든한 나무가 될 수 있지만 지붕을 덮어 자신의 덩굴을 뻗어나가고 있어 실지로는 의지처를 집으로 삼고 있음을 보인다. 커다란 나무, 작은 연못, 덩그라니 놓인 둥근 바위 몇 개를 통해 집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주택이 분명한 건축물의 형태적 특성은 이러한 광경이 관념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복선 역할을 한다. 삼각형 지붕, 직사각형 몸체라는 견고한 집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존재성에 의해 규정되는 그 상황의 절박함은 바로 작가 스스로 항상 나무와 마주 서서 살아온 탓이거나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규정되는 나무라는 타자적 존재와 집이라는 자아적 존재가 인식된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론 누구나 나무이기도 하고 집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한 그 어떤 비절대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갖기도 한 때문일 것이다. ● 햇빛 속 존재가 빛나는 것은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잎새를 길게 드리운 화초가 싱싱한 것은 뿌리가 깊은 땅 속에 있는 탓이다. 이 모든 진리는 지식과는 다른 존재이다. 「산수기행-버드나무」와 「산수기행-숲」은 진리와 지식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기 위한 작가의 발언이다. 생물도감의 버드나무로 물가의 버드나무를 알 수는 없으며 나무만 보면 숲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의 고정된 서술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무와 돌의 물성을 재현한 「Uelsmann의 사진을 보며」에 드러나는 풍요로운 바위의 윤기와 까칠한 나무의 건조성은 상대적 세계에의 조명, 어둠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는 촛불의 의미를 알게 한다.

양화선_자연에 대한 서술-6_나무화석, 규사, 브론즈_35×32×50cm_2000

나무에게 길을 묻다, 자연에 대한 서술 ●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물성에 얽매이거나 조각적 표현에 매달리기보다는 자유스런 언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는 「자연에 대한 서술」 시리즈에서 구체화된다. 이들은 마치 뚜껑을 막 열어젖힌 상자에서 튀어나온 놀라운 광경 같은 구조체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섬과 흰 구름 세 점이 하늘로 올라가는 「자연에 대한 서술-1」은 물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섬이 있다 하였기에 그 중심에 선 나무는 「산수풍경」을 형성한 나무와 다르지 않다. ● 「자연에 대한 서술-2」는 누른 갈대밭에 패인 작은 웅덩이와 둥실 떠가는 흰 구름 두 점이 물과 대지와 구름의 관계를 암시한다.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에서처럼 하늘에 달린 수도꼭지에 고드름이 매달린 「자연에 대한 서술-3」은 모래사막과 그 옆에 흐르는 물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역으로 해석하는 신선한 발상을 보인다. 나무와 물을 보여주지만 여성적인 표현을 통해 생명력을 강조한 「자연에 대한 서술-4」, 돌로 이루어진 대지와 여기에 자리한 돌로 만들어진 제단과 같은 형태의 계단 그리고 눈과 같은 물을 간직한 나무를 통해 남성적인 힘을 은유한 「자연에 대한 서술-5」는 서사적 구조로 구성한 성 담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 규사를 이용하여 황폐한 대지를 표현하고 여기에 나무화석을 배치하고 브론즈에 채색한 나뭇잎을 하늘에 배치한 「자연에 대한 서술-6」은 화석이 된 나무와 생명이 있는 나무 사이에 연상되는 결과성이나, 썰물 뒤에 섬처럼 남게 된 웅덩이와 작은 돌멩이가 있는 정경인 「자연에 대한 서술-7」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큰물에 속하고 싶은 -회복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의 강도만큼 처절한 외로움에 대한 단상이다. 「자연에 대한 서술-8」은 물에서 자라난듯한 버들잎과 흰 구름 세 점이 반사된 커다란 물은 이들 존재의 연관성-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와 흐늘거리는 버들잎의 동질성-에 의탁하여 개념화된 작품이다. ● 하늘과 땅, 바다를 담은 이 상자들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세상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들은 아직은 숨어 있기에 행복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산수기행-선착장」에서 느껴지는 미니어쳐의 세계는 건축적이라기보다는 곧 내 마음이 닻을 내리고 돛을 걷어올릴 그 지점을 의미하는 듯 인생에 대한 충고와 관조화된 세계를 일련의 만화경처럼 스쳐 지나게 한다. ● 작가는 오랜 동안 「내면풍경」이라는 제하에 작업을 하여 왔다. '풍경'이라는 장르는 현실성을 수반하지만 그 현실성이 반드시 리얼리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심상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정신분석적인 느낌을 수반하는 명제의 이 작업은 풍경이라는 서구적 논리의 틀을 빌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산수기행」 내지 「자연에 대한 서술」을 통해 드러내는 작가의 속내는 아마도 풍경이라는 '전개형태'보다는 문득 보여진 세상의 모습에 대한 기록 또는 생각의 골을 넘어선 세상에 대한 말 걸기일 지도 모르겠다. 타자인 동시에 자아로 형상화된 나무는 분명 작가가 거주하는 뜨락에 선 그저 나무 한 그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무에 속한 모든 것은 그 나무 안에 함께 있다"는 말처럼 대상에 대한 사유가 낳은 우주적 존재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존재의 확인 작업의 과정으로 드러나는 그의 세계에 선 우주수, 생명의 나무를 만나게 된다.

양화선_山水紀行-정오풍경_투명수지에 아크릴채색_85×50×65cm_2001

황금빛 옛 시절에 대한 향수 ● 작가에게 있어 나무는 물론 식물의 한 유형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절대고독, 극한의 상황에서 작가와 함께 했던 어떤 존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 그것을 작가의 나무를 통해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그리곤 한 인간의 개인사에 지나치게 깊숙이 관여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의 작품 앞에서 내게도 나무가 있는가 묻는다. ● 어린 시절 툇마루에 누워 바라보던 플라타너스, 작은 시집 한 권 들고 쪼그려 앉았던 정원 한구석의 등나무 그늘, 가지가 너무도 무성하던 모과나무… 이제는 모두 남의 집이 되어 버린 그곳에 있던 나무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을까? 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에 있던 200년도 넘은 느티나무는 어느 날 말라죽어 잘리어 나갔는데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아마도 예기치 않은 '상실'을 최초로 이 나무를 통해 겪은 탓으로 안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서 자란 이에게도 나무는 추억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 나무가 '햇빛을 받아 우뚝 빛나면서 높이 서있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황금빛 옛 시절이 있었다. 빛나는 이마와 반짝이는 눈빛만으로도 이 세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 황금빛 옛 시절에 대한 향수, 유년기에 나를 지켜보던 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간접경험의 제공으로 작가는 관객을 정화시키고, 겸허하게 한다. ● 양화선의 작업은 초현실주의를 규정하는 '행동하는 상상력'이란 언어로 서술될 수 있는데 오브제의 사용에서만 아니라 조각으로 그려낸 회화적 현실체로 그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론즈, 투명수지, 화석, 규석, 화강석 그리고 아크릴물감이나 유화물감에 이르기까지 작가에게 재료의 한정은 없다. 조각은 만들고 그림은 그린다는 고전적 규정 또한 물론 없다. 직접 호흡하며 인지된 세계에 대한 표현은 그 세계의 색과 형태에 따른다는 소박한 원칙이 판도라의 상자같은 좌대 위의 작은 공간을 행복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언어로는 나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 개체에게 자신의 길을 묻는 인간, 자신의 나무를 가슴에 묻고 집 앞 뜰에 또 나무를 심은 가장이자 어머니이며 작가로서 사회의 바람 앞에 우뚝 선 한 존재를 나무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산수기행」의 여정에서 가끔은 옆이나 등뒤에 선 나무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법칙임을 알게 된다. ■ 조은정

Vol.20020312a | 양화선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