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山水

김형민 회화展   2002_0412 ▶︎ 2002_0421

김형민_詩山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73cm_2001

초대일시_2002_0412_금요일_05:00pm

갤러리 사간 서울 종로구 소격동 55번지 Tel. 02_736_1447

'그림같은' 그림 ● 진실로 절경(絶景)을 만났을 때, 우리는 두 눈을 사로잡는 경치에 취에 달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것이 그림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의구심이 생겨난다.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풍경을 두고 왜 또 굳이 '그림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예술가의 작품이 이데아로부터 멀리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그래서 실재하는 사물보다 더 하급의 것이라고 플라톤은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바로 지금, 저곳에 있는 풍경을 일러 감탄하기를 '그림같다'고 한다. 관용어구처럼 쓰이는 '그림같다'는 표현에는 이처럼 여간해서는 풀기 어려운 난제가 숨어 있다. 대체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언뜻 판단하기 어려운 지점, 실제의 풍경이 좋다는 소린지, 아니면 그림이 더 낫다는 뜻인지 여간해서는 잘 알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 기왕에 풍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산수화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전통 풍경화에서 어쩌면 '그림같다'는 표현의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련의 종교화를 제외한다면 우리나라의 회화는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회화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시절에 우리나라 회화의 한 축을 이루는 문인화가 제작되었는데, 중국의 남종문인화에서 전해진 일련의 작품들은 그림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그 특징이다. ● 뜻있는 사람들이 책략과 권력에 떠밀려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뒤, 세상의 일에 시름하면서 꿈꾸던 이상향. 그것이 중국 남쪽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그와 맥을 함께 하는 일련의 문인화가 그려진 것이다. 주변의 절경, 혹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광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림으로 도달하고 싶었던 무릉도원의 경지. 그러니 우리의 전통 산수화는 어지러운 삶의 숲 속에 들여놓은 멋진 자연의 모습임과 동시에 그 숲을 떠나 닿고 싶었던 하나의 이상이 아니었겠는가.

김형민_詩山水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73×91cm_2001

그런데 우리는 그 오랜 역사적인 꿈을 스스로 체득하여 말 그대로 '그림같은'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는 한 작가를 만난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우리 앞에 내어놓은 일련의 「시 산수」 시리즈에서 이 '그림같음'의 난감함에 다시 한 번 봉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대체로 푸른 색의 안료가 화면을 거의 덮고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는 김형민의 작품과 처음 마주하게 되면 벽, 그렇다, 하나의 벽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무 것도 친철하게 내어놓지 않은 그림. 그저 푸른 벽 한 채를 들이민 듯한 그림. ● 김형민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 한 붓으로 그려낸 전면(全面)회화(All-over Painting)같지만,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면 화면 아래로 언뜻 언뜻 보이는 또 다른 흔적들이 눈에 띈다. 벽이라는 근경(近景)이 막아서고 있는 것의 내밀한 모습, 혹은 굳이 드러나지 않아도 좋을 풍경을 아끼고 아낀 듯한, 아니면 아예 그 자잘한 말쯤은 그저 덮어버리고 싶은 의지가 지층의 단면처럼 켜켜이 드러나는 것일까.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다음 날이면 다른 그림으로,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그림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수를 셀 수도 없는 색채가 오고 갔으며, 차마 말로 담아낼 수 없는 독백의 어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림, 거친 고민의 날을 거치면서 한 겹 한 겹 그려올린 화폭은 어느 날 모두 그 푸른 화면 아래로 침참해버린 것이다.

김형민_詩山水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60×73cm_2001

작가는 언젠가 전라남도 영암의 구림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바람의 존재를 느꼈다고 한다. 만물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 어디가 그 출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그 바람이 또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고, 그 움직임이 다시 바람을 만들어 서로를 일깨운다는 것. 도시에서는 그다지 알아챌 기회가 없었던 그 단순하고도 신비로운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난 후에, 그는 「시 산수」를 그리기 시작했다. ● 제목이 「시 산수」인 것을 보면 분명 산수화인데, 그림 속에서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도, 산 속 오솔길을 건너가는 노인 한 사람도, 또 울퉁불퉁 솟아 있는 바위도, 먼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왜 그 산수의 풍경을 모두 막아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푸른 화면을, 바람의 흐름도 다 차단할 것같은 그 푸른 벽을 전면에 드러내 놓은 것일까. 도시에 살면서, 도시에서 젊음을 지나던 한 작가가 그림을 통해 다다르고 싶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구림마을에서의 경험은 이 질문을 해결할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 지도 모르겠다. 답답하도록 어지러운 삶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좋겠다, 굳이 드러나지 않아도 될 조악함은 덮어두어도 좋겠다, 그저 바람이나 들락거릴 틈, 그래서 그 바람을 감지할만한 여유, 그 정도면 되겠다싶은 낮은 깨달음 말이다. 그러니 김형민의 그림은 어느새 시(詩)가 된다. 눈을 해치는 자잘자잘한 것들을 최대한 짧은 문장으로 압축하는 것, 혹은 그저 한 줄만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넘쳐나도록 담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니던가. ● 김형민이 만나게 된 바람의 존재는 어쩌면 '그림같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개체였던 것은 아닐까. 굳이 다 드러내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불러 일으켜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 그것이 구현되어 있는 푸른 화폭, 그 아래로 숨어 있는 수많은 흔적의 울림.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 '그림같은'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 '그림같다'는 말은, 본래 있는 것과 예술로 표현된 것을 따로 구분하여 그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의 경중을 따지려 하거나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달하려는 의지, 기어이 만나야겠다는 다짐, 혹은 그 합일의 순간이나 둘이 함께 흘러가는 모양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훌륭한 그림과 그 그림을 닮은 자연과 삶의 모습, 또 그것을 내처 담아내려는 또 한 점의 그림. 그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그림같은' 풍경이 아니겠는가. 그림과 삶과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하나의 경지(境地)와도 같은 상태, 그것이 바로 '그림같다'는 말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진실인 것이다. 오래 전 문인들의 산수화에서 만났던 그것을 한 참 시간이 흘러간 지금, 우리는 다시 김형민의 회화에서 만난다. ■ 황록주

Vol.20020414a | 김형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