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상표

장정연_크리스티안 쇼흐展   2002_0410 ▶︎ 2002_0423

장정연_일시적 사랑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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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410_수요일_05:00pm

갤러리 피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1층 Tel. 02_730_3280

'길 내기'_장정연의 작업에 대하여 ●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운채 긴장이 풀린 자세로 앉아 있다. 그녀의 얼굴 생김새는 약간 동양적이고 긴 금발머리를 하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우리의 곁을 비스듬히 지나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우리, 즉 관객의 왼쪽에 있는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리모콘을 누르고 있는데, 그 리모콘의 빨간 점화 신호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젊은 여인의 하반신을 두르고 있는 초록색 시트는 마치 출렁이는 성난 바다처럼 화면 아래쪽에 펼쳐져 있다. 장정연의 이 그림은 「마법의 시트 위에서」 라는 제목인데 이 시트가 왜 마술적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그처럼 열중해서 바라보는 것을 보면, TV에서 무엇인가 아주 마술적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프로그램에 관해 전혀 알 수 없으며, 단지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 그 자체일 뿐이다. ● 하지만, 이 그림안에는 이야기들이 암시되어 있다. 첫번째 이야기란, 이 젊은 여자가 끈이 반쯤 풀린 운동화를 신고, 나체로 있다는 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인적 없는 한적한 바닷가나 돌, 파충류 또는 조개껍질 조각으로 뒤덮인 바위가 많은 해안을 산책하기 위한 차림새일 수도 있다. 그녀가 여기서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은 조금이나마 한적한 바닷가를 느껴보고 싶기 때문일까? - 이 마술의 시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까? 혹은 단지 방바닥이 차서일까? 아니면 지난밤 파티에서 생겨난 많은 잡동사니 때문일까? 또는 무엇인가가 깨진게 아닐까? ● 이런식으로, 그녀의 그림은 대상을 상영하고, 이야기들을 암시하면서도 어떤 얘기에 대해서인지는 논하지 않는다. 이점은 여러 장정연의 그림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내가 선택한 낙원」이라는 그림에서 욕실을 보게된다. 한 여인이 긴장이 풀린 편안한 자세로 욕조안에 누워서, 그녀 앞 쪽 벽에 걸려있는 젊은 남자 사진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 듯하다. 바닥에는 신발, 쵸콜렛 봉지, 음료수 캔, 거울, 또 스타킹 두짝이 떨어져 있다. 만약 보라색 헤어드라이어가 그녀의 등쪽 바닥에 있지 않았다면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나절이거나 일요일의 목욕시간과 같은 평화로운(한적한)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쩌면 생길 수도 있는 위험성을 우리는 언뜻 상상하게 된다.

장정연_마법의 시트 위에서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02

암시성과 주석 없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정연의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영화 - 스틸(Film-Stills)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한가지 차이점이라면, 이 그림 속의 영화는 단지 우리의 머리속에서만 상영되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사진에서의 이미지 발췌는 영화분야와 관련되는데, 즉 스냅샷의 미학을 말할 수 있다. ● 2000년에 그린 「특이한 풍경」을 보자. 두명의 제복차림의 경찰관이 젊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모호한 대상을 연행하여 끌고 가는 이 그림은 사진에서 나타나는 가장자리가 잘린 구성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회화의 구성이 아니다. ● 장정연의 최근 작품, 「반 열대성의」는 영화적인 미학을 물씬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그림과는 달리 붓자국 보다는 부드럽고 기교적으로 표현되어져 마치 예전의 아그파색(Agfa color)의 영화나 흑백 사본 위에 채색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이 무릎만 오른쪽으로 조금 보이는 남자 앞에 관능적 포즈로 않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키쓰인지, 아니면 단지 그의 얘기 속으로 깊숙히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윗쪽 입술 높이에서 끝나고 있는 이 그림에서 그녀의 눈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이미지 발췌는 영화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 카메라가 위쪽으로 움직였다가 천천히 내려와 여인의 얼굴과 표정을 취하는 그것은 전통적 회화에서의 구성이라 할 수 없다.

장정연_반 열대성의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02

20세기에 전통적인 구상화는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표현주의, 신 즉물주의 화가들, 그리고 피카소의 조형주의가 있다. 전후에는 추상미술과 개념미술이 주요한 흐름을 장악했으므로, 발뛰스(Balthus), 루씨안 프로이드(Lucian Freud), 또는 다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같은 구상화가들은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있었다. 다양한 신 대중매체의 출현으로 구상화는 과거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또 일찌기 회화에서 사진 미학을 시도한 작가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있는데, 그는 전시에 대중잡지의 모델을 기초하여 누드화를 그렸다. 에릭 휘슐(Eric Fischl)은 중간 세대 작가들 이후 그 범위에서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작가로 사진의 모델을 토대로 해서 주석없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장정연의 작품에서도 대중매체를 통해 옮겨진 실질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에 대한 직접적 묘사라기 보다는 사실을 필터로 한번 걸러내어 표현되고 있다. 모델이 잡지나 영화에서 발췌된 그녀의 몇몇 그림에서도 매스미디어는 자체 그대로가 아닌, 그녀 특유의 관점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변환된다. 그녀 그림의 구도는 사진의 시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장정연_완전히 행복하면서도 다가설 수 없는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1999

지각분야에서 경험을 야기시키는 대중매체를 연구하고, 변화를 추구함에 따라서 회화의 전통적 방식은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은 그점에서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중매체 세계의 미학은 장정연에게 있어 방어해야 할 도전이나 위험신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대중매체에서 그림의 주제와 미학적 기준을 자연스럽게 찾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해 옮겨진 비판적 개념이나 가장 즉각적인 느낌으로서가 아니다. 신표현주의는 마지막으로 이 개념의 감정적 표현을 주장했으나, 장정연과 같이 젊은 작가에게 있어 이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의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 장정연은 차라리 의사소통 방식으로서 대중매체에서 소재를 채택하는 것 같다. 그림의 제목들은 사건이나 이야기를 상기하거나 그림 메세지를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거나 또 마술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렇게 주석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또 다른 사고의 길로 열어주는 그녀의 그림은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라 하겠다. ■ 사무엘 헤르조그 Samuel Herzog

크리스티안 쇼흐_등록상표_컬러인화_2002

수수께끼 같은 그림과 비밀의 문을 열어 줄 표제어_크리스티안 쇼흐 Christian Schoch의 최신 작품들 ● "밖에서 열려진 창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코 닫혀진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_샤를르 보들레르_파리의 우울_파리 1998_111쪽 ● 당혹케 하는 근접성과 유혹적 거리 ● 통상적인 미술을 접하게 되는 제도권적인 틀 안에서 크리스티안 쇼흐의 최근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처음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광고화면에서 만나게 되는, 문자가 들어있는 옥외광고판의 형태를 한 사진들로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얼굴을 비쳐 보이고 있는 www.netzwerk.de에 나오는 잠자는 미녀거나 아니면 www.ekonomikboy.de에 나오는, 몸에 착 달라붙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옷이 짓이겨진 일회용 생수병과 미묘하게 조응하고 있는 한 여인네의 하체 같은 것이다. 그걸 보자 우리는 벌써 시선을 돌리려 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직 제대로 알기도 전에 벌써 우리를 마력 속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는 저 유혹적 미학에 절대로 더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다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돌리려던 발길을 멈추게 되고 도대체 어째서 우리가 이런 데서 보잘 것 없는 시장의 전략에 속아넘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광고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선전하는가? 우리가 만약 그의 도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ekonomikboy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만약에 우리가 그녀의 잠을 감히 깨우려고 하기라도 한다면 잠자는 미녀는 우리를 어느 연결망에 접속시키게 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벌써 이들 작품들에서 광고의 시각적 어휘들을 가지고 교묘히 주재하고 있는 쇼흐가 마련한 전략에 "사로잡힌 것이 된다". ● 부분적으로 호사스럽고 고혹적이며 빈번히 수수께끼 같은 그림들이 등장하는 그러한 가상의 광고판들은 예외 없이 쇼흐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그는 이미 초기의 브루노 뷔르긴 Bruno Burgin과의 공동작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광고미학에 의거하고 있다.1) 더 없이 각양 각색인 재료들로 되어 있는 그림들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한데 그 그림들은 이 예술가가 이번 시리즈를 위해서 특별히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에 만들어 놓은 것에서 선택한 것들이다. 이 그림이 대규모적이면서도 단편적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력을 놀랍게도 증가시키고 있다. 그래서www.now.com, www.RoughCut.com, www.LeCercle.fr 혹은 www.ekonomikboy.de에 표현된 것은 바짝 다가가서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비로소 알아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과 사진의 큰 부분들의 불명확함을 통해 각 세부요소들은 전체적인 연관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고 이것 역시 빠른 인식을 방해하게 된다.그리고 끝으로 www.now.com 혹은 www.ekonomikboy.de에 실린 그림의 요소들의 색깔과 소재의 유사성 또한 우리의 지각을 현혹시키는 데 일조를 한다. ● 형식상의 단편성은 많은 경우에 그림들이 스냅사진적 특성을 나타내게 만든다. 그리하여 www.slantstep.com 이나 www.Geneva.ch는 불명확함과 탈중심적 위치설정 때문에 임의적으로 동작진행과정이나 행동의 흐름에서 끄집어내어진 것처럼 작용하게 된다. 거기다 묘사된 젊은 여자는 그림들 중 그 어디서도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 순간적 성격을 배가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림에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정지된 것의 전과 후의 순간들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단편이 비교적 크다거나 상세하다는 것 역시 설명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혼동을 야기하고 그렇게 해서 매력만을 더하게 한다는 것을 www.eldorado.es나 www.Paul.fr이 인상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자의 경우에 특히 부합하는데 그 그림은 화려한 실내장식, 그 재료의 다양함과 화려한 조명을 가지고 모르는 사이에 재차 우리로 하여금 인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안 쇼흐_14개의 사진_컬러인화_2002

그렇게 되면 도대체 무엇이 그림의 본래의 내용인지가 불분명해진다. 비록 우리가 여자와 남자를 재기발랄하고 극도로 불명확한 내용과 결말을 가진 소극장극의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쇼흐의 작업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나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인물구성에서 처럼 여기서도 인물들이 비록 한 공간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으나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www.Paul.fr에서 인물들은 각자 그림면의 제일 가장자리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접근이 결핍되어 있는 것처럼 시선의 마주침은 없으며 혹은 보다 적합하게 표현한다면 시선의 마주침이 어쩌면 열릴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배경에 있는 남자 쪽으로 여자의 머리가 돌아가 있는 모습이나 정지와 움직임 사이에서 결정되지 않은 머리의 자세에 주의하게 된다. 이들 그림들에서는 가까이 다가감과 의사소통은 언제나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림 내부에서 적용되는 것은 이미 암시되었듯이 표현된 것과 관람자 사이의 관계에서도 해당된다. 표현된 것이 아무리 매혹적이라 해도 우리가 쇼흐의 모델이 갖는 매력이 여기서는 전적으로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서 벗어나 있게 된다. www.PRIMAVERA.IT에 나타난 것과 같이 비교적 근접적인 시점도 이러한 거리를 제거 할 수 없으며 역으로 오히려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끌어당김과 밀쳐냄, 매력과 무관심의 이러한 혼합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바로(우리가 근접적인 구성으로 된 그림에서 그 부인이 그림의 주대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우리와 표현된 것 사이로 틈입하는 저 모든 요소들인 것이다. 그것은 www.ekonomikboy.de에 나타난 피부에 짝 달라붙는 바지의 황금색 재료이며 www.RoughCut.com에 나오는 그물 모양의 셔츠이고 www.slantstep.com의 불명확함이거나 아주 분명한 것으로는 www.Klassiker.de나 www.eldorado.es에 나타나 있는 방풍유리창의 유리 같은 것이다. 이들 두 경우에는 우리에게 향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한 미녀의 시선으로 우리로 하여금 일별할 수 있게 허락하고 있는 창유리에 조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사를 통해 물질적인 경계선인 것으로 입증되고 우리를 되 밀쳐내며 반사된 구조들로 된 우리의 갈망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방해하고 있다. 그것은 쇼윈도우가 드러내는 유리 같이 단단한 거짓말이다(아돌프 로스 Adolf Loos).2)

크리스티안 쇼흐_14개의 사진_컬러인화_2002

핵심적 자극들 ● 우리가 이제까지 우리의 관찰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또 다른 중심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다소 거창하고 넉살좋게 그림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www. -it, -es, -de 등과 같은 기호들로 해서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로 인식되게 되어 있는 문자들이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기호의 덩어리들이 야기시키는 연상에 대한 섬세한 감각으로 쇼흐는 그것들을 끌어당김과 밀쳐냄의 미묘한 아이러니적 유희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급된 사이트로 들어가는 열쇠, 그러니까 중립적 도구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자극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우리의 관심을 유인하며, 연상을 불러일으키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사이트를 선택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 쇼흐가 관람자의 기대와 벌이는 유희는 다시금 이전에 브루노 뷔르긴과의 공동 작업물과 대비된다. 거기서는 사진에 찍힌 미세공간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상상 속에서 전체 전시건축물이 탄생한다면 가상의 인터넷 주소는 선택된 사이트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발견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 선택된 언어만으로도 벌써 관람자에게 인쇄술과 언어양식의 수사학에 의해 환기되는 것과 같은 특정한 관념과 이미지들이 일깨워진다.3) 언어적 전달 내용을 극도로 간략히 할 때 선택된 것들의 조합체는 결코 궁극적인 정보를 전달할 수도 없으며 전달하도록 되어 있지도 않다. 오히려 그 매력은 바로 PRIMAVERA와 같은 여러 겹으로 의미가 중첩된 개념들이나 BLACKMILK와 같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개념의 결합이 주는 암시에 있다. 쇼흐에 의해 선택된 그림들에서도 그렇듯이 아무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바로 그것들과 함께 벌이는 유희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궁극적인 해석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 이를 넘어서 www. -it, -es, -de와 같은 기호의 연속체는 시각적인 것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항상 가장자리에 위치하는 한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간략화의 전략이며 그것은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져 가는 데 대한 반작용인 것이다4)

크리스티안 쇼흐_14개의 사진_컬러인화_2002

간략하지만,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암시가 풍부한 로고는 짧은 시간에 기억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나중에 더 많은 정보를 불러 내는데 기여한다. 거기다 그렇게 되면 자극과 "성취" 사이에 욕망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간 단계, 즉 우리가 크리스티안 쇼흐의 사진작품에서도 구성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던 망설임의 과정이 설정되게 된다. ● 상상적 참여와 관음주의, 약속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성취의 혼합역시 인터넷에서 그렇듯이 쇼흐의 최근 작품들을 특징짓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리하여 모더니즘에 의해 시작된 시각적인 것에 대한 집중을 인터넷과 그와 유사한 매체들을 가지고 계속 해서 앞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그러한 문화에 대한 아이러니적인 진단으로 나타난다. ■ 하인츠 슈탈후트 Heinz Stahlhut

1) 쇼흐가 고안한 타이틀을 가진 인터넷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의 작업이 갖는 추가적 매력이 된다.

2) 여자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쓰여진 글시가 비교할 만한 어떤 전략을 열어보일 때 이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본다면 거기에 쓰여진 '오직 only'이라는 말은 소유하고 싶다는 자극을 증가시킬 뿐인 유일무이성과 결핍성을 연출한다.

3) 이러한 함축성이 유럽 언어권 밖의 관객들에게 밝혀지기가 어렵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미술에게는 중요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강조해서 추상미술을 국제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찬양했지만 그러한 언어는 분명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역할을 넘겨받은 것으로 보였던 광고도 이러한 점에서 틀림없이 좌절하리라는 것이다.

4) 다만 여기에서 암시하고자 하는 것은 시각적인 간략화는 기하학적 추상미술, 미니멀 아트 그리고 개념미술과 같은 모더니즘 미술의 중심적 특징으로서 광고미학의 경우 다만 이를 재빨리 수용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가들은 팝아트 이후 이것을 광고라는 우회로를 거쳐 조형미술로 이끌어 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미술과 미술이라는 제도들의 생성배경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Vol.20020415a | 장정연_크리스티안 쇼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