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site:전이의 트라이앵글

이경 회화展   2002_0410 ▶︎ 2002_0416

이경_#203_캔버스에 유채_131×162cm_200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경 홈페이지로갑니다.

초대일시_2002_0410_수요일_05:30pm

덕원갤러리 5층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감각의 공간/실재의 공간 ● 고대 중국의 어전화가가 황제의 침실 벽에 그린 폭포 그림이 황제의 잠을 설치게 한다. 신라 시대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이 제비 등 미천한 새들을 꼬인다. 파르하시오스는 벽에 휘장을 그려 포도 그림으로 새를 속인 제욱시스의 눈을 속인다. ● 동서를 막론하고, 재현이 기계적으로 완성되기 전, 그러니까 사람들이 카메라 같은 기계적 재현을 몰랐고 여전히 그린다고 하는 것이 신비로운 일 중에 하나였던 시절 있었던 전설 같은 이야기들. ● 기계적 재현이 완성됐다고 회자되는 이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그 옛날, 화가의 손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우문(愚問)일 수도 있다. 굳이 석도(石濤)의 기(氣)를 중시하는 화론이나, 들뢰즈(G. Deleuze)의 '감각의 논리'를 배워 익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림이 단순히 무엇인가를 '잘 베끼는 것' 혹은 '똑같이 그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를 잠 못 들게 했던 폭포의 그림은 그것이 단순히 실제의 폭포와 유사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넘치는 기운생동 때문일 것이고, 잡새의 눈을 속인 솔거의 노송은 그것이 앉아서 쉴 만한 온기를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피그말리온의 여인이 된 조각처럼. ● 그림에는 감각의 공간과 실재의 공간이 있어 보인다. 그림에 투여된 감각, 그림을 통해 촉발되고자 하는 감각, 서로 동조적이거나 상이한 감각들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또 다른 감각 등 이들이 집결하거나, 추상화되어 지각되는 공간이 전자이고, 그림과 그림 틀, 그림이 기생하는 벽(지지체)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제작되는 물리적 공간, 전시되는 장소 등을 후자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W. Benjamin)의 말마따나 예술이 제의(祭儀)적 가치에서 전시(展示) 가치로 변화하면서 그림 또한 이동 가능한 것, 여러 곳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장소에서도 동일한 그림이 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중요해 지는 것은 그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의 공간'(전자)일 수밖에 없다. ● 이 경이 독일에서부터 그린 그림들에는 "물(水)"이 있다. 이 물은 물은 물이되, 물이 아닌 물이다. 그림을 보는 입장에서 딱히 무슨 물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운동이나, 색채 등을 통해 '아! 물이구나'하는 지각이 가능한 면에서는 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의지하거나 활동하는 장소가 그림에서 부재하다는 면에서, 또 그것이 '캔버스 위에 물감들'의 흥건한 흘림, 분출이라는 면에서 실제의 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경은 캔버스라는 '실재의 공간'에 물이라고 하는 '감각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는 물을 그릴 때 붓을 사용하지 않고, 실제 물감 용액들이 물과 같이 운동하도록 캔버스를 움직여서 작업하는데, 그런 결과로 캔버스에 그려진 물들은 운동하고, 서로 삼투하며, 기포의 흔적마저 갖게 된다. ● 이 경의 "물" 그림을 통해 촉발되는 감각은 제욱시스의 포도처럼 눈속임(trompe l'oeuil)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의 장소(캔버스)에 감각들이 유동하면서 오는 것 같다. 우리는 그 그림이 바다의 한 조각, 심지어 수영장 물 한 방울 담고 있지도, 표현하고 있지도 않지만 마치 중국 황제처럼 귀가 시끄러워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미술관이라는 실재의 고요하고 단절된 공간에 들어가 있을 지라도.

이경_Memory of 34years_종이에 아크릴채색_263×135cm_2001

이동 ● 8년 간의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이 경은 그 시간만큼 지속했던 "물" 작업을 일단락 지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 그 깊은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독일에서 한 개인전 서문(Kyong Lee, 삶과 미술, Stadt Braunschweig Kulturinstitut)을 참고삼으면 아마도 그녀는 독일에서 가능했던 "관념과 다른 세계를 향한 시선과 동경"이 자신의 서울생활에서는 떠났음을 지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 한 작가에게 삶의 공간은 실제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저 곳에 있지 않고, 이 곳에 있는 자신의 상태를 아는 것, 생활의 올올한 면들이 구체적 지시물의 얼굴을 빌려 드러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몸이 체감하고 밖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은 숨길 수 없는 경험의 흔적 같은 것이고, 별 예외가 없는 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이 변화는 감지된다. ● 이 경의 그림들은 크게 나누어 앞서 언급한 '물그림'과 서울에 돌아온 후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경험의 그래프화(畵)'작업이 있다. '경험의 그래프화'라는 명칭은 2001년 여름부터 하고 있는 이 경의 최근작들을 필자가 지칭하는 말로서, 「지난 여름」, 「우연의 삼각형」, 「Memory of 34 Years」, 「성실도 테스트」 등등이 이에 속한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최근작들은 작가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이 경이 몸으로 경험한 기억들을 작품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의 편린, 장소의 이동 등이 표현되는 방식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다. ● 예컨대 그녀가 지난 2001년 쌈지스페이스 입주작가로서 외국 작가들과 공동 프로젝트(ssamzie site-specific)를 수행했던 35일간의 기억은 70개의 붉은 색 계열과 회색 계열의 색 막대 그래프로 「지난 여름」에 기록되어졌다. 그러니까 35일간의 실제적 경험이 심장 박동 기록처럼 그래프화(化) 됐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 「우연의 삼각형 Serendipitous Triangle」은 그녀가 유학했던 독일과 태어나고 자랐다가 이제 다시 돌아온 서울, 그리고 개인적 추억의 어느 장소를 종이 위에 지점화 하고 붉은 색 삼각형으로 연결한 것이다. 마치 항공노선표 같은 이 그림을 작가는 묘하게도 "피바다"라 부른다. 그만큼 그 장소에 얽힌 기억과 이동이 그녀에게 강렬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 강렬함은 냉정한 직선과 도형으로 우리에게 온다. ● 작가에게 있어서 필연적이었을 이 작업의 이동(물 그림-」 경험의 그래프畵)이 객관적 입장(viewer)에서 좀 생경하기는 하다. 물 작업에서 보이는 표현의 운동성, 감각의 증폭 같은 것이 경험의 그래프화 작업으로 오면 억제되고, 기표화 되며, 압축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자신의 34년 인생을 기억하고, 형상화하기 위해 했다는 작품「Memory of 34 Years」를 보면서도 관람자들은 그녀의 기억 한 쪼가리, 이야기 한 토막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바로 이 지점이 물 작업과 최근작에 일관되게 흐르는 그녀 작업의 성격일 것이다. 그녀는 물 작업에서도 특정한 물을 재현하는 방식보다는 그 기운을 표현하려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직선으로 형상화하여 개입시켰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용 면에서 보다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최근의 작업들 또한 '생활의 재현'보다는 그 걸 통한 추상화(化), 즉 '생활의 발명'에 가깝다.

이경_Last summer_종이에 아크릴채색_135×240cm_2001

장소 ● 앞에서 필자는 미술 작품의 전시 가치가 중요해 지면서 강조되는 것이 그림 "안"에서의 감각의 공간이라 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억압되는 것은 '장소 특정적'인 그림일 것이다. 예컨대 작가의 작업실에서만 보여질 수 있는 그림을 상상해 보자.(현재 그런 그림은 별로 없다는 의미에서) 만약 그렇다면 그 그림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에 들어 올 수 없을 것이며, 매매되어 누군가의 집 벽에 걸릴 수 없을 것이다. ● 이 경의 물 작업에서 경험의 그래프화 작업으로의 전이에서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작품이 있다. 「파랑 지우기(delete Blue)」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쌈지 작업실 벽에 그려졌던 것으로 이 경의 작업이 변화하는 과도기(turning point)적 그림이다. 이 작품은 시기적으로도 상징적이지만, 작품의 표현 요소에도 상징적 해석이 가능할 듯 하며, 회화 작품의 장소성 문제와도 관련이 될 듯 싶다. ● 먼저, 시기적으로 상징적이라는 것은 물 작업이 경험의 그래프화로 넘어 가기 전에 일종의 갈등, 혹은 새로운 모색으로서 이 작품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다음, 「파랑 지우기」의 표현 요소에서 '과도기(turning point)'라는 상징을 해석해 보자면, 우선 물 작업의 흔적(혹은 기표)으로서 파란색이 벽에 칠해졌다는 것, 다음 꽤 오랜 기간을 두고 그 파란색을 벽과 같은 흰색으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더 이상 서울에서 독일에서와 같은 "관념과 동경"을 계속한다는 것이 작위적임을 긍정하고, 자신의 지나 온 34년의 기억,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듯이 말이다. ● 이 작품과 관련해서는 회화 작품의 장소성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경은 이 작품을 포함하여 몇 몇의 드로잉을 1년 후면 떠나야 하는 쌈지 작업실 벽에 했다. 물론 그 중 몇 개의 작품은 다시 설치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일군의 드로잉 작업들은 그녀가 작업실 공간을 매개로 삼아 자신의 개인사를 기록하고, 그림을 다시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얻어낸 결과물들로 여겨진다.

이경_Sincerity Test_종이에 아크릴채색_135×270cm_2002

예컨대 「파랑 지우기」가 새로운 공간에 부지불식간에 영향 받은 작가와 작업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성실도 테스트」는 그녀가 작업실 공간을 '창작의 장소이자 생활의 장소'로서 인정한 작품이다. 출석부에 도장을 찍듯 작업실 입구에 설치된 이 종이그림은 낱낱의 날들을 그 날의 심리상태에 따라, 그 날 작업의 만족도에 따라 갖가지 색띠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벗겨낸 물감 묻은 마스킹 테이프는 그 옆에 조그만 산을 이루며 작가의 체취를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서 그녀는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현실 삶과 긴밀하게 직조된 그림(물론 그것이 그녀의 개인사에 한정된 것일지라도), 작업실이라는 '장소 특정적'그림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물론 「파랑 지우기」는 전시장에 가져 올 수 없다. 또한 작업실 벽에 했던 「빨간 그림」등도 떼어서 다시 전시장에서 설치할 수 있을지라도 작업실에서 형성됐던 긴밀한 문맥(작가-작업실-작품)은 다시 재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 하지만 이 경이 서울을 떠나 독일에서 유학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겪었던 물리적, 정서적 이동이 '기운생동'에서 '생활의 발명'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처럼, 그림 '안' 감각의 공간이 작업실이라는 실재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작업실에서 형성됐던 작가-작업실-작품이라는 "우연의 트라이앵글"은 다시 한번 작품-전시장-관람자로 이동할 것이다. ■ 강수미

Vol.20020418a | 이경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