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적 풍경

서정인 수묵展   2002_0410 ▶︎ 2002_0416

서정인_운주불_순지에 수묵_195×200cm_2002

덕원갤러리 2층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단순한 형식으로 나타나는 정서와 미감 ● 한국의 전통적 이미지를 차용하여 작업의 모티브로 삼는 경향은 근래 한국화에 있어 보편적인 현상 중 하나라 할 것이다. 분청사기의 질박하고 친근감 있는 문양이나 단청, 색동과 같은 과감한 원색의 구사, 혹은 전통 문양에의 관심과 민화적 표현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정통 미술에 속하는 것이기보다는 민속적이며 서민적인 것으로 기교적으로 엄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동양 회화의 전통을 이루고 있는 문인적 심미관과는 다른 질박하며 여유로운 것이다. 새삼 이와 같이 서민적이며 민속적인 내용들이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와 정감을 내재하고 있으며, 과거 전통 회화에서 간과하였던 우리 미술의 원형, 혹은 특질을 발현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 작가 서정인의 작업 역시 이러한 추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분청사기의 다양한 문양들과 장승, 벅수와 같은 전통 조형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오랜 풍파를 거쳐 이루어진 석장승의 여러 형상을 통하여 바라 본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장승의 표정들에서 그것들이 가진 소박하고 순수하며 따뜻한 정서를 현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과 삶의 본연의 모습으로 보고 이를 극대화시켜 표현하였다"라는 것이 작가의 소재 선택에 대한 변이다.

서정인_얼굴_순지에 수묵_162×130cm_2002

사실 동양의 회화는 오랜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하여 독특한 심미관과 감상법을 형성하였다. 그 중 특징적인 것은 바로 사물에 일정한 의미와 가치를 두어 상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양회화가 일정한 패턴과 정형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작가가 주목하고 차용한 문양과 상징적 조형물들 역시 일정한 의미와 내용을 지닌 상징물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내용들을 재현하고 그 상징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형상을 통하여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포착하려 하고 있으며, 소박하고 순수하며 온화한 정서를 바로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조형을 통한 전통의 재해석이자 주관적 조형 의식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 작가가 주목한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의 조형 특성은 무기교적인 질박, 소박, 담백, 여유로움 등으로 수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형상화하기 위하여 작가는 독특한 화면 구성의 묘를 보여주고 있다. 진하지 않은 먹으로 형상을 그리고 이를 채색으로 메워 나아가는 작가의 화면 구성 방식은 일차적으로는 소재들이 지니고 있는 이른바 '자연에 순응하면서 오랜 풍파를 거쳐 형성된' 형상의 재현이며, 이를 통하여 순수하며 따뜻한 정서를 표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맑고 고운 분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쌓아 감으로서 이루어지는 화면은 일단 마치 분청사기의 표면이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풍상에 마모된 석장승의 외형처럼 질박하고 정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채색 기법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이러한 조형 기법은 기교보다는 색채가 축적됨에 따라 무게와 깊이가 더해지는 둔중함이 특징이다. 모필의 유려한 필선이나 색채의 현란한 자극을 배제한 단색조의 담담한 화면은 바로 작가가 한국적 정서와 미감으로 상정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라 여겨진다.

서정인_얼굴_순지에 수묵_162×130cm_2002

작가가 소재로 삼고 있는 장승이나 벅수는 부락을 수호하거나 특정한 지역을 표시하는 독특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민속물이다. 신령스러운 힘과 권위를 지닌 장승의 형상들은 무섭거나 권위적이고 또한 소탈하고 서민적이며 해학적인 친근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문인 중심의 전통 미술의 심미 기준과는 다른 파격적인 해학성을 지닌 미감은 분명 토속적이며 서민적인 것으로 우리 미술의 심미 특징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즉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한국적 정서와 미감'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형식들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조형화하여 표출해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단순한 형상의 차용이라는 일차원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소재주의적 발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관찰과 적극적인 취사선택, 그리고 이를 조형화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기능의 확보는 실로 중요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형상을 메워 나아가며 이루어내는 형태들과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교적인 담백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굳이 무표정한 장승의 모습을 확대, 혹은 변형하여 대상을 이미지화, 혹은 사의화하고자 하는 경향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작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미술이 추구하고 있는 이른바 원형, 특질 등의 탐구와 연계되어 있는 심중한 문제이다. 작가가 굳이 민속적 이미지가 강한 사물들을 통하여 '현대인의 삶과 본연의 모습'을 투영해 보고자 하는 발상의 근거 역시 이러한 곳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 민간, 혹은 민속 미술에 대한 관심은 기성 미술이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화려한 것으로 흘러 유약해 졌을 때 이에 대한 처방으로 종종 등장하는 것이다. 작가를 비롯한 일단의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민속적 미감과 정서에 대한 추구 경향은 오늘의 우리 화단 실정에 비추어 보아 분명 일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 방향은 평범하고 담담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즉 질박한 품격과 경지에 대한 추구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를 통하여 '지향해야 할 인간의 삶과 본연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은 현대인이 구가하고 있는 번영과 풍요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상실, 인간의 소외에 대한 물음이자 답이라 할 것이다. 비록 작가의 작업 연륜에 비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무거운 내용일 수도 있다 여겨지지만 작가의 분투와 더불어 우리 미술에 건강한 자양분을 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김상철

서정인_바라기_장지에 수묵과 분채_47×56cm_2002

상념적 풍경 ● 우리시대의 표상으로서, 응집력 있는 생명력을 가진 매개체로서, 현대인의 삶 속에서 되새기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오랜 풍파를 걸쳐 형성된 석장승의 형상을 통하여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나타내었다. 또한 그들의 극대화된 표정들에서 장승이 가진 순수하고 해학적이며 따뜻한 정서를 현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과 삶의 본연의 모습으로 보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본인은 이들을 현대인들이 가져야 할 진실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상징물로서 우리의 삶과 의식 속에 다시 세우고 싶다. ■ 서정인

Vol.20020421a | 서정인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