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의 미학

강혜진 판화展   2002_0412 ▶︎ 2002_0423

강혜진_Individual aspects_혼합재료_70×70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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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412_금요일_05: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천칭, 저울, 각도기 등, 강혜진의 판화 화면은 온통 측정하는 기구들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기구들 사이에 부유하듯 나타나는 숫자들이 있다. 이러한 측정 기구와 숫자들은 금속적인 은색과 여러 겹으로 올려진 유리가루로 표현되어졌다. ● 측정이나 숫자, 혹은 기구들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어 왔다. 16세기 화가 알베르 뒤러의 「Draughtsman Drawing a Nude」에서 일례를 찾을 수 있다. 남성인 화가의 맞은편 테이블 위에 전라의 여성모델이 누워있다. 그들 사이에는 모눈종이처럼 구획이 나뉜 스크린이 있다. 그리고 화가는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는 여성모델을 자신 앞에 놓인 스크린처럼 구획이 나뉜 종이에 그대로 옮기고 있다. 결국 기하학과 원근법이라는 측정방식을 통해 남성은 여성을 측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측정의 주체는 남성이고, 측정의 대상은 여성의 몸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남성의 규제와 측정을 통해서만 여성의 몸은 예술이란 형식으로 남성의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강혜진_Shadow of glances_혼합재료_60×60cm_2002

그러나 강혜진은 역사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측정과 그 도구들을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택했다. 그의 초기작품부터 계속된 이 측정도구에 대한 집착은 측정의 대상 없이 측정도구들만이 그의 화면의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사물을 측정하던 도구들은 강혜진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가가 여성이고, 이 측정도구들이 남성적이라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다시말해, 앞에서 언급한 뒤러의 작품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강혜진의 화면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측정 대상이었던 여성이 주체가 되어 이제는 그를 측정하던 측정 도구와 기준들을 바라보고 측정하고 있는 것이다.

강혜진_Gauge_혼합재료_60×60cm_2002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진 이러한 측정 도구를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택한 강혜진의 방법론은 20세기 페미니스트 작가인 로리 앤더슨의 그것과도 매우 유사하다. 로리 앤더슨은 남성에 의해 또 남성을 위해 만들어지고 발달된 테크놀로지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 테크놀로지를 완벽하게 소화해 냄으로써 앤더슨은 그 테크놀로지에 숨겨져 있던 남성과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개념들을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여성을 억압하고 비하하던 남성의 테크놀로지를 과감하게 완벽하게 소화해 냄으로써 가부장적 제도에 대한 효율적인 비판이 가능했던 것이다. ● 앤더슨처럼, 강혜진 역시 측정과 분석이라는 과학적 방식에 깔린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절대주의를 측정도구들을 차용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 속에 등장한 측정도구들은 여기서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금속적인 은색으로 표현된 도구들은 흰 바탕 위에서 희미하게 그 형태를 드러내기도 감추기도 한다. 또한 유리 가루로 몇 겹을 올려진 측정도구들은 더욱 그러하다. 보는 위치와 각도 그리고 빛의 양에 따라 그들의 모습은 변하게 되는 것이다.

강혜진_Invisible decision_혼합재료_각각 지름 60cm_2002

이러한 그의 화면 속의 측정도구들은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절대적 측정도구들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측정 대상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하는 도구들인 반면에 강혜진의 측정도구는 상대적이다. 그 측정 도구 자체가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그렇기에 대상에 대해 그 어떤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 강혜진의 작품 속에 나타난 측정 도구와 그 기준, 그리고 관점과 시선은 상대적이며 그 기준 자체의 변화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강혜진이 추구하는 이러한 측정 기준과 도구는 그 대상을 억압하지 않으며 존중하고, 변화에 열려있게 되는 대화와 상호관계의 도구인 것이다.

강혜진_Criterion-touchstone_혼합재료_각각 지름 60cm_2001

강혜진은 측정과 그 도구들, 그리고 그 측정의 결과인 숫자들에 끌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측정과 도구들은 분명 기존의 절대적인 기준이나 잣대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측정도구들은 상대적이며 변화를 인정하며, 다른 기준들과도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미래의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열려있다. 이러한 열린 측정기준과 도구들이 가능할 때 강혜진이 추구하는 측정의 미학도 가능한 것이다. ■ 김민아

Vol.20020422a | 강혜진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