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나'들 : 시선과 권력

2002_0605 ▶︎ 2002_0618

권순평_The photogenic Episode_흑백인화_2002

● 이 전시는 200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진흥기금(창의적 예술지원)을 사용합니다.

초대일시_2002_0605_수요일_06:00pm

책임기획_권순평

참여작가 권순평_김재민_윤정미_임민수_장용근_전미숙_최재경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02_734_1333

노먼 브라이슨은 "확장된 영역에서의 응시"라는 글에서 라캉이 말한 상상계와 상징계의 의미를 라캉 자신이 정의한 것 보다 더 확장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억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과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우선 브라이슨이 뭐라고 했는지 들어보자. 그는 "우리는 확실히 라캉의 용어들인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이 주체의 초기형성(어린 시절)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성인의 활동무대에서도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라캉의 설명은 성인의 삶의 길고도 다양한 노력이 아니라 발생의 형성순간에 역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노먼 브라이슨, ""확장된 영역에서의 응시"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눈빛, p.129)고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의 네가지 기본개념"에 나오는 라캉의 유명한 거울단계에 대한 얘기다. 노먼 브라이슨이 읽은 라캉 얘기를 먼저 들고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이 글의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30대 초반-후반의 사진가들이 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용하는 것이다.

윤정미_을지로_컬러인화_2002

그렇다면 브라이슨은 라캉의 어떤 면을 확장하고 있는가? 원래 라캉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어린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그게 자신이라고 착각하는데서 자아가 형성되며, 그것은 거울 속에 비친 허깨비를 자기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자아라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 됬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라캉의 논의는 자아가 생겨 나는 그 초기단계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브라이슨은 그런 잘못된 상상적 동일시는 인간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라캉의 논의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거울이나 사진에 투사된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하고 살아가며, 그런 확인은 거울이나 사진 같이 인물의 이미지를 직접 보여주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마고들 집, 자동차, 취미, 의복, 음식, 친구 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즉 어떤 친구가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이미지에 손상이 온다고 믿기 때문에 정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차가 더 이상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바꾸거나, 집을 늘리는 것 등이 모두 거울단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신의 정체성의 확인행위이다. 수시로 점검하여 동일시를 이루고, 만일 그게 안 일어난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바꾸는 것이다.

임민수_성철스님 기념관, 경남 산청_컬러인화_2002

라캉에 따르면 거울단계, 즉 상상계 다음에는 상징계 즉 의미와 질서의 세계가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거울단계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녀)에게는 상징계는 다가오지 못 하고 지체되거나, 아니면 다가와 있어도 거울단계라는 유치한 국면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른이 되어서도 영화를 보고는 그 속에 나오는 장면이 진짜라고 믿는 것, 혹은 주민등록증에 나온 자기 얼굴이 진짜 자기 모습이라고 믿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거울단계를 극복했거나 비판적으로 취급한다면 영화에 나오는 것은 감독과 배우, 아트디렉터가 짜고서 하는 연기이고 트릭이고 픽션일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더 심하게는 움직이는 색과 형태와 선의 배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주민등록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울단계를 배체하고 보면 그것은 국가기관이 부여한 신원증명의 체계일 뿐이거나, 카메라가 남겨 놓은 빛의 흔적일 뿐이지, 그게 결코 내가 거기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그 어떤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진을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성의 수준에서 카메라가 눈앞에 있는 현실을 정확히 재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진에 제공하는 표상의 수준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미숙_이승복상, 강원 속사 이승복기념관_흑백인화_2000

그간 한국에 어느 정도 퍼진 시선, 응시, 권력 등의 담론은 자아와 타자의 갈등, 그것을 매개하는 기구나 제도들에 대해서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그 가운데 있으면서 온갖 담론들의 폭격 속에 해체의 위기를 맞은 '나'가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들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결국 시선의 권력은 나 밖에 있는 어떤 힘 세고 나쁜 놈이 나를 못 살게 구는 문제가 아니라, '나'가 누구냐를 결정 짓는 '나' 자신의 성향과 편향성을 '내'가 어떻게 조절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에서 권력을 말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는 얘기하지 않지만,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이 나이고, 내가 나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사람 됨됨이와, 삶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장용근의 사진에 들어 있는 수많은 '나'들은 다들 '나'임을 잊지 않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는 '나'들이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주 고전적으로, 사진 속에는 더 이상 그 대상 자체는 없으므로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나'인 것이다. 그들 각자가 거기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나'란 사실은 없다. 그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아서 들춰보면 없고, 저기 있는 것 같아서 들춰보면 없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달아나는 것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상상계 속에서 이미지를 보면서 저게 '나'라고 기대하지만, 상징계는 '이러이러한 것이 나이니까 믿어라'는 진술을 던져줄 뿐이지 어디에도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찾아서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저 멀리 어딘가에, 사방에 퍼져 있는 비인격적이고 어디에나 있으면서 아무데도 없는, '나'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를 훨씬 초월해 있는 그 응시이다. 참 약 오르는 노릇이다. 권력의 문제는 어떤 나쁜 놈하고 싸우는 문제가 아니라 '나'를 나라고 규정해주는 바로 그 본인의 의지와, 또 그 의지를 부추겨 주는 제도와 담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 이영준

Vol.20020611b | 수많은 '나'들 : 시선과 권력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