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화된 세계 들여다보기

백연수 조각展   2002_0626 ▶︎ 2002_0709

백연수_찜 게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지름 60×12cm_2002

초대일시_2002_0626_수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3_9636 www.altpool.org

"주체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객체 속에 들어 있고, 그리고 약간 더 많다"라고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인간이 주체로서 자기 외의 모든 대상을 관념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객체 화 시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인류의 문화는 이러한 세계 인식 방법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종적, 횡적으로 분류된 결과와 그것의 재생산된 것 다름 아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안녕을 위해서는 하찮은 물건이나 특정 동물에도 신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숭배하기도 하거나 저주하기도 하고, 육체적 안녕을 위해서는 모든 유기체를 먹을 것으로 취하기도 한 것이다.

백연수_병아리를 끌다_각목에 혼합재료_74×80×75cm_2002

서구 미술사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주관적 인식 방식을 전복시키거나 상대 화 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기능성의 논리에 따른 사물 인식방식을 전복시키려 한 미술가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그 후예들이라면, 그것을 상대 화 시킨 이들은 초현주의자들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괴테의 말로 표현하면, 객체 속에서 "약간 더 많은" 것을 찾으려 한 것이다.

백연수_무명 돼지를 끌다_돼지뼈와 혼합재료_75×95×65cm_2002

한편 대학원을 졸업하고 첫 개인전을 갖는 백연수의 작품들은 그녀가 위와 같은 보편적 원리에 대해서 웅변적인 방식으로 가 아니라, 자신과 주변의 대상들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서 사변적인 방식으로 한 재고들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애완용 동물을 좋아했고, 동물형상인형을 가지고 즐겨 놀았다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동물 경험을 주제화 한 것은 인간이 동물을 자신의 여러 척도들로 애완용과 식용으로 분류하고, 애완용의 경우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사육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한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독일 현대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은 그의 한 저서에서 '동물은 천국에 가지 않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그의 견해는 동물과 인간 모두 그의 신 앞에서는 똑같은 피조물인데, 어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전자의 기준으로 착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동물 착취는 전자가 절대적인 주체로서 후자를 객체 화 함으로써 발생한다. 백연수의 '깨달음'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만심과 이율배반성에 대한 소박한 질문의 한 표현인 것이다. ● 백연수에게서 이러한 주제는 작가 자신과 동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동물에 대한 이중적 관계를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자기 자신을 객체화 시켜서 동물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물고기 사진 작품들과 동물이 은유적으로 조각으로 표현된 작품들이고, 후자는 작가의 사진과 동물 이미지나 오브제가 결합된 일련의 작품들이다.

백연수_강아지를 끌다_거울, 사탕과 혼합재료_35×60×53cm_2002

동물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작품들은 모두 바퀴와 끈이 달려있다. 이 장치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동물들의 수동적 상태의 기호이다. 노란 나무틀 입방체는 병아리의, 구멍이 있는 상자는 작가에게는 애완견의 은유적 표현이다. 특히 후자의 속에 가득 찬 사탕은 애완견의 비만을 뜻하고 앞쪽에 달린 원형 거울은 그것의 눈이다. 병아리와 강아지의 은유를 통해서 백연수는 모든 동물을 장난감으로 취득하고 그것의 생리적 조건을 파괴하며 그것을 쉽게 폐기하는, 특히 어린이를 포함한 도시인들의 동물, 넓게는 자연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상자에 실제 돼지의 뼈들을 붙인 후 채색한 작품들과 (게와 그것을 먹는 사람의 손의 유사성에서 착안한) 주변 사람들의 양손을 캐스팅한 형상은 그녀가 인간의 육식 습관에서 발견되는 그의 애완 동물과의 관계와 외관상 상이해 보이는 인간의 동물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풍자한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화려한 사진으로 표현된 열대어와 회색 조 사진으로 나온 얼린 생선에서도 보여진다.

백연수_헤엄치는 어항_종이에 디지털 출력, 아크릴판_6×11×70,80,90cm_2002

백연수가 어항 속의 열대어를 찍은 사진을 인쇄하여 작은 상자 갑에 붙인 작품들은 첫 번째 방식과 두 번째 방식을 잇는 다리라 할 수 있다. 몇몇 사진들 속에는 어항 속에 비친 작가 자신의 모습의 실루엣이 나타나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대어와 함께 자신도 피사체로서 대상 화 시키게 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 자신을 실제 바퀴와 사진기처럼 만들어진 오브제가 달린 커다란 초록색 틀과 동일시 한 사실은 중요하다. 즉 그녀는 카메라를 통해서 주체이자 객체가 된다. '카메라'가 르네상스적 일 점 투시도의 창안자처럼 냉정한 시선의 주체라면, 이 '기계'의 산물인 사진에서 그녀는 객체가 된다. 이 작품들에서는 그녀의 사진이 그 위를 부분적으로 덮은 동물이나 식사와 연결된 모티브의 이미지나 오브제와 결합되어 작가 자신이 동물과 같은 '절대적 객체'와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사진이 찍히던 당시의 시·공간적 상황이 이미지로 표현되어 작가의 이미지가 '말을 하게 됨'으로써 이미지로 나온 작가는 다시 주체가 된다. 이 사진들은 그녀가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을 만나 찍은 것들이다. 기계로서의 그녀는 바퀴를 달아 자율적으로 보이지만, 수동성의 기호인 끈도 달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그녀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제한적 자율성 또는 능동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연수_나를 끌다_천에 디지털 출력, 각목과 혼합재료_160×57×44cm_2002

한편 이 사진들은 더 복잡한 담론을 야기 시킨다. 즉 같은 '주체', 즉 그녀의 동일한 카메라로 여러 장소에서 찍은 그녀의 모습들은 서로 다르며, 이 다름은 사진과 이미지나 오브제의 결합, 즉 작가가 자신을 읽어 냄으로써 더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후기구조주의 식으로는 차연(differance)으로 부를 수 있다. 객체 화 된 동물들을 은유적인 형상으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들의 모습을 자신의 실루엣과 중첩시킨 사진 작품을 거쳐 나온 이 작품들에서는 작가 자신이 상이한 모습으로 객체 화 되었고, 이 작품들은 인간이라는 동종의 유기체 안에서는 절대적 주체도, 따라서 절대적 객체, 또는 절대적 타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 김정희

Vol.20020626a | 백연수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