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ne, Language Dictionary

채승희 드로잉展   2002_0628 ▶︎ 2002_0704

채승희_Sine Dictionary_종이에 잉크_19.5×21.7cm×300_2002_부분

초대일시_2002_0628_금요일_06:00pm

롯데갤러리 부산본점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15번지 롯데백화점 B2 Tel. 051_510_3788

굳이 분류하자면 채승희의 작업은 드로잉에 속한다. 흔히 드로잉은 그 자체가 완성작으로 이해될 때조차도 작가의 내면에 밀착하는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장르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 일기와 같은 성격을 띠거나 무의식적인 낙서와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채승희의 작업을 접해보면 드로잉에 대한 이런 생각이 고정관념이었음을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녀의 작업은 형태상으로 볼 때는 분명 드로잉이다. 흰 종이에 흔히 쓰는 검은 펜으로 그어진 단순한 선들의 조합이다.

채승희_Sine Dictionary_종이에 잉크_19.5×21.7cm×300_2002_부분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우선 이 드로잉들이 마치 모종의 '설명서'처럼 건조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박물관의 벽에 걸려있을 법한 생물 진화도를 닮아있거나 혹은 기계의 조립설명서와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그림들, 병원에 걸려있을 법한 두개골과 뼈들의 해부도 비슷한 형태들, 곤충이나 식물도감의 그림같은,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인체 내부의 풍경 비슷한 느낌을 주는 드로잉들.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알 수 없는 기호들. 서명을 대신해 쓰여진 이 메일 주소 등. 몇 개의 선으로 단순하게 그려진 이 그림들은 언뜻 매우 차가운 느낌을 준다. ● 하지만 물론 이 그림들은 설명서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처음의 건조한 분위기와는 달리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이나 병원에 어울릴 것 같은 이 그림들은 다시 보면 결코 그런 곳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선들은 직선이 아니고 형태는 슬쩍 그리다만 것 같이 구석으로 사라진다. 무엇보다 이 드로잉들은 매우 '무의미'하다. 설명서적인 형태를 차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러한 보편적이고 진부한 기호로 이루어진 문명 전체에 대한 풍자이기 때문이다. 작은 종이 속에 그녀가 담고있는 것은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만들어낸 하나의 선입견적인 이미지-기호의 체계이며, 그것을 가장 개인적인 장르인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통해 교묘하게 비틀고 있는 것이다.

채승희_Sine Dictionary_종이에 잉크_19.5×21.7cm×300_2002_부분

분류하고 정돈하고 판단하는 문명의 이미지-기호의 문화는 그녀의 작업 속에서 수수께끼같은 형태들로 변형된다. 그녀는 이미지-기호들을 슬쩍 비껴가면서 그러한 분류체계의 억압성을 가벼운 선의 유희로 바꾸어놓는다. 분류체계처럼 보이는 형태는 말하자면 일종의 '덫'에 불과하다. 드로잉이라는 장르에 대한 역시 우리의 '분류체계'의 진부함 역시 그녀의 작업이 겨냥하는 바이다. 채승희의 드로잉들은 건조한 '설명서'와 아주 개인적인 '일기' 사이를 가로지른다. ● 분명 이 드로잉들은 그녀의 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독이 불가능한 수수께끼이며 퍼즐 같은 일이기다. 자주 등장하는 n자 비슷한 글자 역시 이런 '덫'의 역할을 한다. 멀리서 볼 때는 실제의 글자들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다. 우리가 두뇌와 시신경의 합작으로 머리 속에 넣고 있는 온갖 이미지들은 의미의 과잉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의미들은 어떤 주어진 틀과 체계 속에서 형성되고 고착된 것들이다. ● 채승희의 드로잉 작업은 주관적인 재해석을 통해 이 과잉을 풀어헤치고, 유머를 부여해 그 무게를 가볍게 한다. 작가는 예전에도 "멸종동물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연작 드로잉을 통해 문명에 대한 풍자라는 자신의 관심사를 보여주었다.

채승희_Sine Dictionary_종이에 잉크_19.5×21.7cm×300_2002_부분

그 작업들은 쓰다버린 봉투를 사용해서 거기에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이었다. 이미 쓰여진 편지봉투에 다시 그림을 그려넣는 것은 역시 의미의 과잉을 해소하고 거기에 주관적인 창조성을 부여하기 위한 행위이다. ● 이번 전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지만, 더욱 여유로워진 형식이나 더욱 뚜렷이 드러난 주제의식에 있어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가는 또한 종이상자나 팬던트 같은 사소한 일상의 기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녀는 쓰다버린 작은 종이상자에 글씨를 쓰고 색을 칠한다. 아주 진지하게 깨알같이 쓰여져 있는 글씨들은 의미체계의 집요함을 풍자하고 있는 듯하다. 실은 이 글씨들은 임의로 따온 책의 문구들이며 그것을 읽어보려고 하는 관객들을 비웃듯이 작가는 어린아이의 낙서같은 드로잉으로 글씨들을 덮어버린다. 팬던트 작업 역시 단순한 유희의 정신을 진지한 비판과 결합시킨, 재미있는 작업들이다. ■ 조선령

Vol.20020627a | 채승희 드로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