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그림의 형식

최진욱展 / CHOIGENEUK / 崔震旭 / painting   2002_1002 ▶︎ 2002_1020 / 월요일 휴관

최진욱_우편물수령증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60×73cm_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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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2_1002_수요일_05: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회화의 종말"을 이겨내려는 "개념적 회화"의 여정을 지켜보며1. 시대적 상황_ 왜 아직도 그림을 그리며, 그림을 보는 일이 즐거운가? 오늘날과 같은 영상시대,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에 그림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런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모더니즘의 출현과 더불어 그림을 그린다는 일은 과거와 같이 더 이상 자명한 일이 아니게 되었고, 화가들은 이런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의 추상미술이라는 형태로 그림 그리는 일은 지속되어 왔고, 현대 도시의 건축공간 내에서 그림은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자기 자리를 차지해 왔었다. 그러나 지난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상황은 크게 변했다. 디지털영상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과거에 그림이 차지했던 공간은 디지털사진이나 영상매체 또는 새로운 유형의 설치구조물로 대체되고 있다. 오늘날 그림은 극소수의 컬렉터의 거실이나 미술관, 화랑, 화가의 작업실과 같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소통되고 있다. 이를테면 자연스럽게 구시대의 '유산'으로 화석화되고 있는 셈이다. "회화의 종말"이라는 얘기조차도 이제는 과거지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계속될 수 있다. 마치 영화와 텔레비젼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소극장에서 소수의 관중을 상대로 한 연극이 계속되고 있으며, 위대한 문학의 시대가 사라져 버린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이 생존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때 그림과 연극과 문학의 생존은 한 때 당대 문화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던 것과는 달리 '잔존하는 문화', '주변적이고 소수적인 문화'로서 변화된 위상 속에서의 처절한 생존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가 있다.

최진욱_1992년 서울의 서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520cm_1997~8_부분
최진욱_1992년 서울의 서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520cm_1997~8

그러나 이런 위상변화가 무조건 통탄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배적인 문화'에서 '잔존하는 문화'로의 위상변화는 "거품빼기"라는 긍정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잔존하는 문화의 가치를 유행을 넘어서는 "인간학적 역능"의 관점에서(대홍수 이후에도 유지되어야 할 인류학적 유산이라는 측면에서) 재평가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적 근대성의 틀 내에서 형성되었던 "순수예술", "순수회화"의 전모를 온전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시점에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문화사적 맥락에서 볼 때 오히려 오늘과 같은 "회화의 종말", "순수예술의 종말"의 시대야말로 군더더기 없이 그림의 생존 가능성과 타당성과 전망을 정확하게 타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닐까? ● 그렇다면 "인간학적 역능"의 관점에서 볼 때 영상시대에도 필요하고 중요한 그림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그림의 존재이유는 그것이 가장 야생적인 의미에서의 "신체적 사건"의 효과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그림을 세계의 재현, 주관적 표현, 개념적 의도 등의 근대적 패러다임에 따라 정의하는 대신, 세계에 대한 신체의 시각적 반응이라는 동물행동학적(etholoical) 차원에서 재정의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정의는 그림을 예술적 코드나 문화적 코드, 사회적 관습과 기능 등의 면에서가 아니라 인간학적 역능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재평가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그림을 "신체적 사건"으로 보자는 것은 그림을 '재현'이라는 오래된 관습적 틀로부터 떼어내어 일종의 '달리기'나 '무술', '춤'이나 '제스처', '노래'와도 같은 신체행동학적 선상에 놓인 것으로 보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리기는 말하기나 노래하기, 글쓰기와 같은,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역능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림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진욱_누가 이 그림을 훼손하는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415cm_1999_부분
최진욱_누가 이 그림을 훼손하는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415cm_1999

2. 신체적 사건의 생태론적 의의_ 신체적 사건으로서의 그림이란 메를로 퐁티가 강조했듯이, 주체가 장갑 속에 끼인 손처럼 세계와 빈틈없이 밀착하고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효과이며, 세계와 전방위로 작용-반작용하는 "살"(flesh)의 시각적-촉각적 진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야생적 의미의 직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말했던 시각적-촉각적 "돌발흔적"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기는 달리기나 걷기, 구부리기와 뛰기가 우리 신체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살"의 탄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행위인 셈이다. 나아가 그리기는 혼자 뛰기와는 달리 세계 이미지와 신체 이미지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을 화면 위에서 반복한다는 점에서 "세계-내-신체"가 세계 및 타자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직면하는 차이들을 겹으로 반복하면서 "공생"의 의미를 체득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신체적 차이와 반복의 중층적 과정에서 출현하는 공생의 의미, 아마도 시각적 감동의 물결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기는 인간 존재가 세계 속에서 겪게되는 다양한 생태학적 사건의 증언이자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 그리기는 시각-생태학의 실천인 것이다. "손으로 보고, 눈으로 만지며, 손과 눈으로 감싸안기"라는 '공감각적 실천'.

최진욱_'그림아, 너는 뭐냐?'중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02

그러나 이런 역능은 인간 신체에 잠재해 있으나 저절로 완전하게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사자나 호랑이가 야생의 들판에서 사냥하는 법을 훈련하지 못할 경우 번번이 사냥에 실패하듯이, 이렇게 공감각적인 실천으로서의 그리기의 역능 역시 지속적인 훈련을 요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거쳐 그리기의 역능이 성장할 경우 세계와의 신체적 만남의 즐거운 순간들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상실해가고 있는 역능이 바로 이런 것이며, 무차별적인 도시화, 산업화, 상품화를 통해, 근대적 시공간기계를 통해 야기되는 생태계의 파괴란 바로 이런 역능의 파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기 훈련은 세계와 주체와의 생태론적 친화성의 회복을 위한 가장 원초적 훈련의 일환이며, 물 속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것과 같이 하늘과 땅과 생물과 식물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시각적 삶을 향유하게 하는 훈련인 것이다. 보고 그리는 신체적 행위 전체를 카메라와 컴퓨터가 대신하게 되는 오늘날 시급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그리기 훈련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 그리기 훈련은 동물원에 갇힌 사자와 호랑이에게 행하는 야생으로의 복귀 훈련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오늘날과 같은 전지구적 생태위기의 시대에 그림 그리기는 마비되고 상실되어 가는 신체적 역능의 잠재력을 치유하는 생태적 복원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림 그리기에 내포된 생태론적 의의가 있다. ● 그러나 소위 근대적 의미에서의 "예술제도"와 "예술개념"이 망각한 것이야말로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그림 그리기의 생태론적 의미가 아닐까? 물론 개개의 예술가들 모두가 그랬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근대적 예술제도는 장르와 양식, 사조와 코드들로 무장한 채 그리기에 내포된 이런 야생적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회화의 종말을 초래한 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오늘날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기의 이런 측면인데, 이 때문에 또한 화가의 교육학적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화가는 세계에 대한 신체적 사건의 시각적 공감각적 기록이라는 인간학적 역능을 일깨우고 성장시키는 위대한 교사의 일원으로 사회생활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최진욱_살아있다는 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48×462cm_2002
최진욱_살아있다는 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48×462cm_2002

3. 최진욱의 "개념적 회화"_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그림의 생태론적, 인간학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림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보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 어느 시대에나 현명한 화가들은 그림의 야생적 의미를 위협하고 상실케 하거나 또는 그 틈을 열어주는 역사적 환경변화와 맞서 왔으며, 그로부터 그림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왔다. 이런 점에서 미술사란 신체적 사건으로서의 그림과 시대적인 시각문화환경의 변화의 역동적 마주침의 변증법적 과정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영상시대, 생태위기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긴히 필요한 그림의 형식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최진욱의 작업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지속 가능한 그림의 형식"을 찾으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찾아낸 그 런 형식에 대해 "개념적 회화"라는 용어를 부여한 바 있다. 이는 신체적 사건으로서의 "살"의 생동하는 느낌이라는 씨줄과 공간적 설치와 구성에 필요한 개념적 연출이란 날줄이 교차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새로운 그림의 형식을 지칭하기 위한 잠정적 용어일 따름인데, 그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작업을 지속해 왔다는 것은 이미 90년대 초부터 그의 그림의 표제들이 「생각과 그림」, 「그림의 시작」, 「 그림 그림」, 「수업중」과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고 본다. 개념적 연출이 필요한 이유는 디지털시대의 시각문화환경, 공간환경 전체가 개념적 조작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며, 이런 점에서 「개념적 회화」란 이와 같은 개념적 조작의 시대적 환경에 대한 회화적 대응과 도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 물론 화가의 이런 응전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는 2년전 인터넷 홈페이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의 변혁이 대단한 것 같지만 육체의 변혁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죠. 그림은 신체적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이 그림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림 바깥으로 항상 튀어나와야 합니다. 그림이 그림 같아 보인다면 제겐 실패일 뿐이죠. 제 그림 중에 「그림 속의 생각」이란 작품이 있는 데 그건 실패작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그림에 갇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유일한 성공작은 「생각과 그림」이죠. 그 그림에서 생각은 그림과 같이 있고 그림은 그림 바깥에 있습니다"(2000.11.18). 이렇게 보면 92년 전시에 출품되었던 「생각과 그림」 이후 10여년이 지나면서 그의 그림은 실패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르며, 94년, 97년 개인전을 치르면서도 항상 이런 느낌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이런 고통의 심정은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 중 「누가 이 그림을 훼손하는가?」라는 대작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 여기서 고통의 핵심은 무엇일까? 단적으로 "이성의 열쇠로 감성을 열기", "몸이 흥분하면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안다는 것", "자기의 생과 한마디로 얽혀있는 운명적 형식", "주관의 저 밑바닥까지, 미세한 떨림까지 잡아내 강력함을 얻을 때까지 밀어 부치기"가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순간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패로 간주한다면 이것이 최진욱만의 문제일까? 차라리 이것은 시대적 문제가 아닌가? ● 실제로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작품들은 그 스스로가 설정한 엄격한 기준에서 보면 실패의 연속에 대한 솔직한 증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실패의 솔직한 드러냄의 결과로서 보여진, 생동하는 몸의 느낌이 실린 장면들과 싸늘하게 식어버린 화실 풍경의 연속적인 대비로 이어지는 연작들은 생태위기의 시대, 회화의 종말의 시대에 대한 화가의 필사적인 응전의 치열한 기록이라는 또 다른 리얼리티를 보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개념적 회화」라는 새로운 시도가 극복해나가야 할 시대적 장애물의 거대함에 대한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최진욱_회화의 종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518cm_2001_부분
최진욱_회화의 종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518cm_2001_부분
최진욱_회화의 종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518cm_2001

그러나 개념적 회화라는 새로운 시도는 아직 출발 단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의 이번 작품들 중에서 그 출발이 결코 원점 반복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3개의 대형 캔버스가 겹쳐진 도로풍경을 그린 「살아있다는 것」(2002)이 그 경우인데, 이 그림이 보여주는 풍경은 3개 서로 다른 초점거리를 가진 연속촬영 형식으로 포착된 하나의 도로풍경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롱숏-미디움숏-클로즈업이라는 영화적 시선에 의해 단순하고 평범한 도로풍경이 생기를 띄며 주목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영화적 장치가 도입됨으로써 도로는 마치 달리는 차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며, 정지된 이미지를 운동-이미지로 전환시켜주고 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큰 터치로 시원하게 처리된 아스팔트 도로와 가드레일을 주변의 숲과 나뭇잎들이 넘실거리며 타고 넘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생명체의 역동성과 영화적 운동-이미지의 이중적 겹침으로 인해 평범한 풍경을 스쳐지나가며 느꼈던 갑작스러운 "살의 생생한 느낌"의 일부가 환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그가 지향하는 "개념적 회화"의 고통스러운 여정에서 이룬 작은 승리이자 "생활의 발견"이라고 부르고 싶다. 회화의 종말을 이겨내는 일은 이렇게 오랜 인내와 작은 승리들의 축적에 기초하게 될 것이 아닐까? ■ 심광현

Vol.20021001a | 최진욱展 / CHOIGENEUK / 崔震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