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게 하는 약속들

박윤영展   2002_1113 ▶︎ 2002_1119

박윤영_벽지여자_벽지에 채색_350×240cm_2002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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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1113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2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어떤 그림을 놓고 동양화인가 서양화인가를 파악하려는 일은 사뭇 진부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터넷 초고속망 세계1위의 국가라는 환경이 그렇고, 무국적의 혼성적 건축물의 서울이란 도시가 그러하며 각종 매체와 장르가 넘나드는 인사동의 전시회 풍경 속에서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한 질문이 아닌 듯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을 구분해 보려는 이유는 박윤영의 이번 근작전을 읽어내는 중요한 맥락이 그것의 구분에 준거하여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또한 특정 그림이 놓이는 맥락에 따라 비평의 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미셀푸코의 널리 알려진 저서에서 인용되었다. 푸코는 이 책에서 실제 파이프와 그림으로서의 파이프, 그리고 언어로서의 '파이프'간의 등가적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그려진 파이프의 형상이 말해지는 '파이프'를 지시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확언'을 부정하는 푸코의 태도는 이번 박윤영의 다양한 그림들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벽지에 작가가 국화를 반복해서 그려넣은 「국화벽지」는 동양화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동양화가들이 국화를 '재현'해 놓은 국화를 보는 '태도' 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작가는 동양화를 배울 때 가장 많이 그려보았다는 국화를 아카데믹하게 재현해 놓았다. 실제 국화를 보지 않고 외워 그렸을 법한 수많은 국화들은 살아있는 식물을 지시한다기보다는 사군자로 대표되는 전통적 '동양화' 를 지시하고 있다. 식물로서의 국화를 재현한 것이 아니므로 그럴듯하게 잘 그린 아우라(aura)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국화 그리기'이면 그만이다. 그럼으로써 이 그림은 대표적인 그림(동양화)에 대한 동양화, 즉 메타회화적 성격을 갖는다. 그림이 그림을 지시하는 메타회화의 전통은 서양의 벨라스케즈 훨씬 전부터 이미 중국과 한국의 대표적 동양화 매체인 병풍에서 이미 즐겨 사용되던 미학이다. 드로잉 중에 간간이 등장하는 대나무,국화, 설치에 사용된 대나무, 픽토그램에 찍혀진 낙관 등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관통하는 메타회화적 태도를 반영한다.

박윤영_국화벽지_벽지에 채색_350×240cm_2002_부분

벽지국화가 아니라 「국화벽지」로 명명된 작업은 그 제목으로 인해 국화보다 벽지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그것은 작가가 꽃무늬 벽지를 단순히 국화를 그리기 위해 장식적인 목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 벽지 속의 반복적 꽃무늬는 그야말로 가장 통속적이고 장식적인 대량 생산품이자 모조이다. 그 위에 담담하게 반복된 국화는 늦가을에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난다는 국화의 생명력을 찾아볼 수 없는 대신 희미하게 서양적 벽지장식과 오버랩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역설한다. 이것은 마치 무국적적 서울환경에 사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캐나다에서 체류하며 뉴미디어를 습득한 서양적 환경과 오랫동안 연구해온 동양화간의 갈등과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그간의 박윤영의 작업과 큰 획을 그으면서 달라진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장식적의도의 벽화 위에 그려진 재현적 국화가 아니라 상징적 동양화 소재와 통속적 서양적 대량생산물간의 충돌과 이합의 작동에 기인하는 '개념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박윤영_장판몽유_장판지에 먹과 채색_240×100cm_2002_부분

이러한 개념을 작가는 더욱 과격하게 밀어붙인다. '픽토그램'이라는 너무나 서양적인 명칭의 각종 싸인판 이미지의 그림은 바로 푸코가 부정하는 언어와 이미지간의 결합이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상징하는 언어와 지시물간의 관계를 먹의 번짐을 통해 너무도 간단히 작가는 훼방놓고 있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상징하는 실재물이 붙어있는 대표적인 경우는 바로 중국의 상형문자이다. 실재 '말'과 '馬'의 관계는 서양언어 알파벳처럼 임의적이 아니라 픽토그램처럼 적당히 필연적이다. 상형문자 같은 그림을 캘리그라피와 같이 '써놓은' 박윤영의 픽토그램은 진한 먹 고유의 느낌으로 화선지에 스며들면서 동서양의 이미지 기록방식의 유사와 다름을 강조하며 노출시키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개념적으로)실험적인 동양화가 되고 있다.

박윤영_장판몽유_장판지에 먹과 채색_240×100cm_2002_부분

문제는 대나무 지팡이를 이용한 설치작업과 플래쉬작업, 그리고 장판 위의 드로잉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벽지국화」와 「픽토그램」이 자기참조적인 소재와 서양적 이미지를 충돌시켜 교묘하게 변증법적으로 아직도 '동양화'임을 설명하고 있고, 개념적 작품으로 새로운 동양화의 시도로 성공하고 있으나 드로잉에 사용된 장판이나 지팡이를 지시하는 대나무를 위와 같은 맥락에서 대량생산물이나 사군자를 지시한다고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를 위해 지팡이에 소리나지 않는 헝겊을 대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후회감에서 비롯된 설치작품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개인적인 작품이다. 공간을 점령한 그럴듯한 조형적 감각의 대나무와 아름다운 슬로우모션의 영상시퀀스, 그리고 센티멘탈한 작가의 노랫소리는 그것 그대로 심성을 자극하고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뉴욕에서 '동양적이다' 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할머니에 대한 유대감, 상실감과 그리움의 메카니즘이 반드시 동양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치작업이 여성적이거나, 결핍에 대한 비움(空)이 느껴지며, 서정적이란 측면에서 현대미술 설치작업에서 느껴지는 강한 이미지(남성성), 메시지 또는 강한 개념성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된다. 특히 이 작업이 이전까지 작가가 추구해온 서정적 콜라주 작업에서 과감하게 변신하게된 중간과정이란 측면에서 이해가 된다.

박윤영_여자_화선지에 먹_50×46cm_2002

뉴욕에서 설치작업을 마친 작가는 한국에 돌아와서 변신을 시도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1000장의 드로잉을 했다고 한다. 대나무 설치작업과 플래쉬작업이 조형성에서 개념성으로 변신하는 고민의 과정이었다면 1000장의 드로잉을 통해 탄생한 '장판드로잉'은 새로운 형상성에 대한 시도라고 보여진다. 때문에 캐나다와 뉴욕 등지에서 작업을 계속했던 것은 서양국가에 갔던 경험 탓에 작업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과 위치를 타국에서 대상화 시켜 봄으로써 본인에게 절실한 변신을 모색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장판드로잉은 먹으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양화의 '드로잉'맥락에서 읽혀지기 쉬운 속성을 갖는다. 바탕이 되는 그을린 장판은 온돌방이 갖는 동양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텍스츄어를 갖는 마티에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캔버스 재질을 연상시키며, 지우고 덧씌우며 오버랩 되고 흘려진 자욱 위의 다양한 드로잉 레이어와 낮선 이미지간의 충돌은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서양화와 다른 방식의 채색, 동양화적 상징의 등장, 라인중심의 컨투어 드로잉으로 작가는 동양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박윤영의 드로잉 작업이 계속된다면, 동양화에 대한 끈을 놓치지 말고 새로운 동양화의 현대적 실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윤영_Cane_단채널 비디오 영상과 설치_2002

질문에 대답할 차례이다. 이것은 동양화가 아닌가? 동양화인가 아닌가를 구분 짓는 일은 그려진 재료나 작가의 전공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1차원적 방법이다. 문제는 그것의 개념에 있으며 심지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준거 또한 개념이 중요하다. 그것은 그림이 어떤 맥락에서 평가되어져야 하는가를 판단한다. 박윤영의 작업은 얼핏 보이는 서양화의 외연 속에 동양화에 대한 애정과 동/서양간 회화와 이미지에 대한 변증법적 놀이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보석을 품고있는 동양화가 된다. 이것은 매우 독특하면서 젊은 동양화가가 마땅히 고민하고 실험해야할 모범적인 케이스로 보여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윤영의 작업이 동양화의 맥락에서 읽히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며 이러한 실험을 지속해주길 바란다. 그만큼 이번 박윤영의 변신은 단순한 외연적 탈바꿈이 아닌 가치 있는 모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혼돈과 혼성의 시대에 탄탄한 개념과 표현감각으로 전통의 가치와 새로운 방법론의 실험간에 균형을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실험'이란 이름조차 진부해져 버린 인사동의 화랑가에서 조용히 개념적 실험을 시도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동양화에 대한 진보적 발걸음을 제대로 디딘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일이다. ■ H

Vol.20021112a | 박윤영展